오웰이 창조한 국가 오세아니아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신어(newspeak)'일 것이다. 신어는 오세아니아 정부 ‘영사’가 창제하였다. 신어는 피지배자들에게 모순된 말조차 의문을 품지 말고 받아들이라는 ‘이중사고’를 실현시키고, 최종적으로는 독재정부를 영원히 존속시키기 위한 방안이었다. 신어는 문법도 어휘도 무척 단순하지만, 바로 그때문에 인간의 감정도 사고도 표현할 수 없게 되었다. 오직 빅브라더의 지배를 굳히기 위해 만들어진 신어는 다른 언어처럼 세계의 거울이 될 수 없었다. 세계와 언어의 이런 차이가 강렬한 아이러니를 낳았다. 이 기괴한 단순함은 <1984>만의 디스토피아적 이미지를 구축하는 것을 넘어, 아예 디스토피아 세계관의 전통으로 자리잡아 영원히 전수될 예정이다.


여기에는 언어가 사고를 지배한다는 전제가 기저에 깔려있다. 사실 현실의 국가도 신어 같은 시도를 하지 않을 뿐, 언어가 사고에 앞선다는 듯 행동을 하기는 한다. 현실의 국가도 정책을 부드러운 말로 포장한다. 언어를 창제하지는 않지만 종종 언어순화 사업을 벌이기도 한다. 사실 국가만 하는 짓도 아니다. 사회에서 갈등이 있을 때마다 단어를 선점하려는 전쟁으로 비화되기도 한다. 상대가 해당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오염이라고 비난하면서 말이다. 이럴 때 신어가 언어의 중요성의 예시로 종종 튀어나오곤 한다. 마치 소설의 산물이 현실의 예시인 것처럼.


하지만 신어가 정말로 언어가 사고를 지배할 수 있다는 예시가 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는 게 내 생각이다. 신어의 보급은 현실세계에서는 비슷한 예조차 찾아볼 수 없는 강력한 정치권력의 힘 때문에 겨우 가능한 일이라는 점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오세아니아는 대략 2차대전 중에 건국이 됐든지, 결성이 됐든지 한 것 같다. 아직도 국가인지 연합체인지 잘 모르겠다. 어쨌든 소설의 배경인 1984년까지 대략 40년 동안 신어를 강제하는 것을 넘어 신어로 된 기록을 말살하기까지 했음에도 작중에서는 신어의 보급이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작중인물들이 창제자의 의도를 우롱하는 방식으로 신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줄리아가 스스로가 하체 이하만 혁명적이라고 말했듯이.


신어체계를 설명하는 챕터의 시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신어의 보급이 완전히 이루어진 것은 작중 시점 이후이다. 그러니까 국제적으로는 세 열강의 힘의 균형이 깨지지 않고, 국내적으로는 사회가 경제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그 어떤 동력도 잃은 채 몇 년, 혹은 몇십 년이 지속될 때에야 겨우 가능한 일이었다. 신어가 보급됐기 때문에 사람들이 독재에 순응한 게 아니라, 독재에 순응하게 됐기에 사람들이 신어를 받아들였다. 신어가 완전히 보급된 것은 피지배자들의 생각이 말살됐다는 게 아니라, 빅브라더를 사랑하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사회적 환경이 수십년 동안 유지됐다는 뜻이다.


우리가 언어로 사고하고, 또 제때 언어를 배우지 못한다면 평생 지적 학습에 장벽이 생긴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건 우리가 단어의 사전적, 사회적 의미에 일일이 지배당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모국어에 쉽게 지배당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단어의 의미를 바꾸려고 하는 것, 특정 단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과 같이 언어를 둘러싼 갈등이 일어날 수 있는 것도 우리가 언어에 지배당하지는 않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요컨대 언어의 갈등은 언어가 정말로 우리의 마음을 바꾸는 마법 같은 힘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언어 그 자체하고는 큰 관련이 없다. 우리가 언어가 사고를 지배하고, 언어가 사고를 그대로 반영한다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에, 이에 따라 상대방의 언어를 공격하는 일이 무척 효과적이고 선동적이기 때문에, 즉 정치적으로 활용하기 좋기 때문에 언어를 둘러싼 갈등이 일어난다.


<1984>의 신어도 이와 다를 것이 전혀 없다. 대중들의 이중사고를 유도하겠다는 신어의 창제의도는 분명 언어가 사고를 지배한다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작중에서 언어는 단 한 번도 사고를 지배하지 못한다. 오히려 신어를 부정했을 때 중벌에 처하는 규범으로만 작동할 뿐이다. 즉 신어는 언어라기보다는 지배규범에 가깝다. 하지만 순응하는 피지배자는 물론 저항하는 피지배자와 신어를 만든 이들조차 이를 결코 인식하지 못한다. 카프카의 주인공들이 운명처럼 찾아온 부조리에 저항은 하되 부조리 자체에는 전혀 의심을 품지 못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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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시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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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찰나에도 얼마나 많은 꿈을 꿀 수 있나. 대개 순조롭고 희미하게 지나가는 찰나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길고 상세하고 거칠지만 결말은 언제나 아름다운 꿈들. 꿈속에서도 바늘밭을 기워다녀도 종국에는 누군가와 같이 적당히 따뜻한 계절의 볕을 쬐며 누워있는 이야기를 끼워넣기 때문에 그 어떤 고통을 상상해도 고통스러울 수 없는 꿈들.


   오 분만 앉아서 꿈을 꾼다면 수십년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도 뒤로도, 시간축의 어디에도 걸칠 수 있는 수십년 짜리 이야기. 그 내용이라면, 만약에 그때 그랬더라면 지금까지 이랬을텐데와 같은 후회, 혹은 앞으로는 이런 일이 펼쳐질텐데와 같은 예측, 그게 아니라면 복잡한 시간축을 교묘하게 뒤튼 후 그 위에 아무렇게나 드러눕고 굴러다니는 상상들. 미래의 일을 먼저 생각하고 그것을 만든 과거를 상상하다가 다시 현재로 돌아오는 것과 같은 꿈들.


  그게 어떤 꿈들일까. 행복하기 위해 시축을 박살내서 그때 그 장소에서 만날 수 없는 사람과 만나게 하고, 중력을 뒤틀어서 손을 맞잡은 사람을 지축으로부터 하늘로 종종 우주로 날려보내고, 사실을 왜곡하여 변화무쌍한 삶이 어느 순간부터 쭉 평온한 상태로 고정된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이상한 꿈들. 이것들이 영화감독들이나 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상한 짓거리처럼 보일 지라도, 사실은 그 어떤 고통스러운 거짓을 지어내도 아름다운 결말이 앉을 자리를 마련해놓는 우리들이 매일 하는 일이고 영화감독도 그런 우리 중 누군가이다.


  사람의 진지한 생각은 기록되고 계속 인용된다면, 그 생각들이 결코 일어나지 않았고 앞으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해도 위대한 사상으로 남아서 결국 사실이 되곤 한다. 또한 유명한 누군가의 말에 따르면 사실의 총체가 세계라고 하였으니, 세상은 어느 정도는 생각으로 구성된 셈인데, 그렇다면 상상도 어느 정도는 그 역할을 할 수도 있지 않나. 생각이 세계의 사실이라면, 상상이 어떻게 거짓이 될 수 있겠나. 그걸 누가 정하는가. 관객만이 연극을 평가하던가. 연극의 연출자이자 극작가인 배우가 평가할 몫이 있지 않던가. 사고의 일부는 상상이고, 상상의 일부는 생각이다. 다만 생각은 여럿이 양 끝을 잡고 쭉 잡아당긴 덕에 긴 세월을 살아가고, 상상은 상상하는 이가 꾹 압축해 자신의 시간축 어딘가에 쑤셔넣을 뿐이다. 하지만 상상의 그 초라한 처지 덕에 우리는 수천개 수만개의 상상을 살아갈 수 있다. 때로는 같은 상상을 수십번 수백번 돌려보면서. 때로는 여러 가지 상상을 동시에 재생하면서. 그렇게 우리는 영원히 살 수 있지 않나. 돌아보면 짧기만 했던 순간들을 재료로 삼아 이야기를 만들고 또 만들고 하면서, 때로는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면서, 이야기가 끝나는 순간 온 몸을 스미는 암전을 어떻게든 버텨내면서...하지만 그건 상상이 거짓이기 때문은 결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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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시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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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3.17 15: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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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7.03.24 15: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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