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동해까지 갈 생각은 아니었다. 모여서 축구만 잠깐 보고 헤어질 생각이었다. 다만 친구가 동해의 본가가 비는데 놀러가자고 하였고, 나도 즉흥적으로 결정하였다. 물론 내 자취방도 친구의 자취방도 잘만 비어있지만. 짐도 마음도 가볍게 갔다. 나는 저번 주에 졸업하였고, 스물 몇 해만에 처음으로 소속이 없었으며, 이번 주까지 아무런 일정도 없었다. 예비군 율천동 동대를 제외하고 말이다.

오후 네 시에 출발했다. 청량리에서 발착해 동해까지 가는 기차는 한반도의 강과 산을 때로는 따라가고 때로는 가로지르며 꼬불꼬불 지나갔다. 지루한 시간이었다. 제천역에 정차했을 때는 친구에게 화를 냈다. 강원도를 가는데 왜 충청북도를 찍고 가는 거야? 하지만 창밖의 풍경은 어느 역과 역 사이에서든 다를 게 없었다. 똑같이 생긴 능선과 논과 밭, 고압선들이 오와 열을 지어섰다. 종종 묘지가 보였다. 절벽에는 그물망이 설치되어 있었다. 터널이 귀가 아플 정도로 많았다. 이렇게 똑같은 찰나를 5시간이나 반복하는데도 밥차는 한 번도 돌지 않았다. 역무원에게 물어보니 식당칸의 자판기가 전부라고 하였다. 황량한 식당칸에서는 우리는 칸초만 세 곽을 잘근잘근 씹으며 롯데제과와 코레일을 같이 씹었다. 풍경은 해가 지니 차라리 나았다. 달도 뜨지 않는 어두운 밤이었다. 친구는 잠들고 나는 책장을 읽는둥 마는둥 대충 넘기며 버텼다.

동해는 내가 가본 항구 중에 가장 바다냄새가 안 나는 곳이었다. 열차에서 내린 후 킁킁거려봤지만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친구에게 내 코가 이상하냐고 물어봤지만, 그도 바다냄새는 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니 정말 바다냄새가 나지 않거나, 둘 다 코가 이상하거나. 그렇게 역사 밖으로 나왔다. 교차로 건너편에 도서관이 있었다. 내가 가끔 책을 빌리러 저 도서관에 가는데, 왕복 한 시간 반 거리야. 걷는 것을 좋아하는 친구는 동해에 살 때 걸어서 안 가본 곳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친구는 걷다 지친 내가 얼마나 더 가야하냐고 물으면 금방 도착한다는 말밖에 안 했다.

그렇게 한참을 가서 아파트에 짐을 풀고 일단 늦은 저녁을 먹기 위해 그나마 번화가로 향했다. 가는 길은 어둡고 한산했다. 가게는 많았지만 전부 불이 꺼져있었다. 을씨년스러운 풍경이었다. 열차를 타고 보는 대한민국의 산과 들의 풍경이 다 비스무리 하듯이, 번화가도 어느 도시와 비교해도 거기서 거기였다. 넓고 높은 상가건물에 가게들이 꽉꽉 들어차있는, 음식점 위에 약국이 있고, 약국 위에 노래방이 있고, 노래방 위에 마사지숍이 있는 이런 풍경은 대한민국 밖에서는 본 적이 없다. 건물들 사이에는 작은 쉼터가 있었다. 친구는 동해에서 2년 살면서 이곳에서 버스킹하는 것을 딱 두 명 봤다고 한다. 일 년에 한 명씩. 챔피언스리그 결승과 빈도과 같다. 각 공연마다 관객은 두 명 정도 있었다고 한다. 골목에는 이디야 커피가 있었는데, 그렇게 큰 이디야 커피 지점은 본 적이 없었다. 동해에 가서 사진을 딱 세 장 찍었는데 그 중 한 장이 바로 이디야 커피였다.

가게를 고르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일단 동해까지 왔건만 친구는 해산물을 먹으려고 하지 않았고, 사실 돈도 없었다. 회는 나중에 노량진에서 사먹어. 그게 더 싸게 먹혀. 조언인지 변명인지 모를 말이었다. 음식은 양 많은 게 최고라는 지론을 가진 친구는 열심히 무한리필집을 찾아다녔지만 모두 영업을 마친 후였다. 나는 빨리 가게를 찾아내라고 친구를 걷어찼고, 압박을 받던 친구가 고르고 고른 집은 ‘서울 감자탕’이었다. 왜 우리가 동해에서 서울 감자탕을 먹었을까? 가게는 한산했다. 우리를 포함하여 손님이 두 테이블밖에 없었다.

서울 감자탕은 다른 모든 게 서울의 감자탕집과 비슷하였지만, 가격은 좀 달랐다. 5,000원 정도 더 비쌌다. 고기도 퍼석하고 국물은 맹탕이었지만, 서울의 감자탕 집도 분명 그런 집이 있지 않은가? 그러고 보니 파리에도 감자탕을 파는 집이 있었다. 어떤 맛이 날까 정말 궁금해서 찾아가봤는데 하필 휴일이었다. 아, 김치 얘기도 빼놓을 수 없다. 내가 가본 모든 감자탕집의 김치 중 가장 형편없었다. 짜기만 했다. 굵은 소금을 믹서에 간 후 배추에 묻혀 먹으면 비슷한 맛이 날 것이다. 김치가 정말 맛이 없었다.

“김치가 정말 맛이 없네.” 다음날 집에 오늘 길에 친구가 해준 말에 따르면, 내가 김치를 씹으며 저대로 나직이 내뱉었다고 한다. 소리가 크진 않았지만 적막을 깨기에는 충분했다고도 한다. 그 순간 카운터에 앉아있던 식당이모가 내 뒤통수와 친구의 얼굴을 쳐다보기 시작했다고도 한다. 본인은 당황스러운데 나는 천진난만하게 고개를 처박고 맛없다는 배추줄기만 계속 씹어댔다고 한다. 식당에는 한반도 정세와 같은 긴장감이 흐르는 가운데 친구는 이모의 뜨거운 시선을 받을 용기는 없었고, 반대쪽 TV로 고개를 돌렸다고 한다. TV에는 성남시장 이재명이 나오고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나도 기억이 난다. 친구가 뜬금없이 물어봤다. 이재명의 대권가능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니? TV만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내가 대충 대답했다. 재작년만 해도 킹찍탈이 유행어였는데 미래는 모르는 일 아닐까? 내 시큰둥한 반응에도 친구는 결코 정치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감자탕 얘기를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친구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바다를 따라 걸었다. 잠을 설친 개들이 목이 찢어져라 짖었다. 달은 여전히 뜨지 않았고, 그래서 바다를 하늘과 구분하기 힘들었다. 하늘에는 구름에 많이 껴있었고, 바다에는 파도가 치고 있었는데, 둘 다 검은 천에 흰 얼룩이 진 것처럼 보였다. 간간히 바다를 따라 늘어선 철길이 창백하게 빛났다. 한참을 도니 묵호항이 보였고, 그제야 사람이 만든 불빛이 수면에 일렁이며 바다와 하늘을 갈랐다. 파도소리를 들으며 만을 따라 걷다 다시 바다가 보이지 않는 언덕에 접어들었다. 언덕은 별장들로 꽉 차있었는데, 친구의 말에 따르면 가격은 1억에서 3억까지요, 모양이 같은 집은 하나도 없었다. 고개를 넘는데 사람은 한 명은 보지 못했지만, 집마다 개가 살았다. 또 한참을 걸어 편의점에서 먹을 것을 사들고 친구의 집에 들어갔다. 도착하니 대망의 월드컵 최종예선 마지막 라운드, 우즈베키스탄 대 대한민국, 경기 시작 10분 전! 그런데 TV가 나오지 않았다.

친구는 당황하여 부모님께 전화하여 진상을 물었다. 오늘 부모님이 집에 있었으면 서울에서 꼼짝 않았을 효심이 넘치는 아들...알고 보니 부모님이 여행을 길게 떠났는데, 그 동안 돈 나갈만한 건 다 끊어놓은 것이다. 심지어 온수도 나오지 않았다. 와이파이도 안 되어 기껏 가져온 아이패드도 먹통이었다. 나를 쳐다보면 친구의 동공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PC방에 가자 민기야. 그렇게 우리는 일 년에 한 번씩 버스커가 나타난다는 번화가로 다시 향했다. 나는 반보 뒤에서 따라가며 손바닥으로 때리거나 신발앞굽으로 걷어찼다.

경기결과는 다들 알다시피다. 한국이 졸전을 펼쳤지만 이란 덕에 겨우 올라갔다. ‘대한민국 짝짝짝짝짝’이 듣기 싫다는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주장은 눈물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감독은 이란-시리아 경기가 결과가 나오지 않았음에도 국민들에게 감사하다는 인터뷰를 하였다. 만약 시리아가 한 골을 더 넣었으면 우리가 플레이오프로 가는 상황이었는데도 말이다. 나는 오래전부터 한국 국가대표의 성적에 아무 관심이 없었고, 솔직히 시리아가 2위로 올라가기를 바랐다. 시리아의 국내사정은 엉망이라는 말로도 표현이 안 되는데, 축구가 위로해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우리가 3위였다면 플레이오프를 뚫을 가능성이라도 있지, 홈경기를 할 수 없는 시리아가 도저히 아시아 플레이오프와 최종 플레이오프를 모두 뚫을 것 같진 않다. 그럼에도 오늘 기사를 보니 시리아 국민들이 극적인 동점골에 무척 기뻐하였다고 한다.

경기가 끝나고 다시 아파트까지 그 길을 발을 질질 끌며 걸어왔다. 오는 동안 내 졸업, 내 시험, 친구의 시험, 무책임했던 중학교 시절 교사들, 배우의 연기방법, 한국의 40대 뮤지션들, 호날두의 발롱도르, 월콧의 주급, 내 옛 여행, 언덕의 별장들, 군시절, 폭력, 돈 이야기 따위를 하였던 것 같다.

집으로 오는 길에는 버스를 타고 왔다. 버스터미널까지 가는 길에는 전날 지난 언덕, 미역 썩은내가 진동하는 해변, 그 해변을 따라 있는 기찻길, 여성친화공원, 동해문화원이 있었다. 언덕에는 사람보다는 개가 더 많았던 것 같다. 해변과 기찻길에서 사진을 한 장씩 더 찍었다. 이것으로 동해에서 더 찍을 사진이 없었다. 동해문화원에는 피아니스트 백건우가 예술의 전당에서는 어림도 없는 가격으로 연주회를 연다는 포스터가 붙어있었다. 터미널은 더 한산했다. 동해에 있는 사람도 없지만, 동해를 떠나려는 사람은 더욱 없는 듯이. 김밥나라도 문을 닫고 있었다.

고속버스는 기차처럼 지루한 길만 타고 갔지만, 터널은 훨씬 적었으며 무엇보다 서울까지 3시간밖에 안 걸렸다. 충청북도를 들르지 않은 덕이다. 중간에 영월 휴게소에서 잠깐 쉬긴 하였다. 영월 휴게소에는 뜬금없이 사랑의 자물쇠를 거는 곳이 있었는데, 철그물도 6개밖에 없던 자물쇠도 보기 흉하게 녹슬어있었다. 그들의 사랑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턱이 없다. 저녁이 되어 강동터미널에 도착했다. 휴가를 나온 군인들이 많았다. 거리는 소음과 매연과 사람으로 가득 찼다.

우리는 후암동에서 밥을 먹고 헤어졌다. 오는 길에는 버스를 타고 왔는데 교통체증이 심했다. 집이 멀지 않았는데도, 750A 저상버스는 교통체증에 쩔쩔맸다. 버스를 가득 채운 사람들의 어깨뼈가 부딪혔다. 그럼에도 떠나는 길보다는 몸과 마음이 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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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시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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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9.23 14: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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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단면적이고 광주의 입체적인 면모를 보여주지 못했다는 비판이 있으나, 그러면 대체 어떻게 했어야 했냐고 되묻고 싶다. 보통 이런 비판을 하는 측에서는 피해자 집단 안의 다양한 갈등양상을 보여주던가, 혹은 가해자와 구분이 안 되는 회색지대를 보여주길 바란다. 하지만 광주는 저런 걸 입증할 사료는커녕 언급조차 하는 기록도 찾기 힘들다. 광주의 남은 미스터리라곤 전두환이 정말 어디까지 지시를 했는지와 같은 것들 뿐이다. 2차원적 기록의 어디에 층을 쌓아 올려야 한 차원 끌어올릴 수 있다는 것일까?


광주를 그 어떤 영화보다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봤던 이창동의 <박하사탕>도 지나치게 폭력적인 묘사만 피했을뿐 사건을 다시 해석하지는 않았다. 이또한 이창동이 힌츠페터의 영상을 안봤을리가 없으니, 광주에 폭력이 없어서라고 생각했던 게 아닐 것이다. 사건이 폭력적인 것과 폭력을 영상에 재현하는 것은 다른 문제고, 또 영호(설경구)가 이십여년에 걸쳐 순수함을 천천히 잃어가게도 해야 하니 광주의 폭력에 집중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택시운전사>처럼 사흘 남짓의 사건을 재현하는 영화가 폭력적이고 평면적인 묘사를 피할 길이 있을까?


만약 방법이 있다면 택시운전자 캐릭터를 바꾸는 게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 싶다. 극중의 송강호는 <변호인>의 송변을 연상케한다. 속물적인 변호사였다가 각성하여 인권변호사가 된 송변이, 학생운동만 보면 혀를 차다가 광주의 참상을 보고 자신을 희생하는 택시운전사가 된 것이다. 송변은 실제 모델이 있다. 택시운전사도 실제 모델이 있기는 한데, 여기서 결정적 차이가 있다. '택시운전사'는 힌츠페터를 태우고 광주로 진입한 택시운전사가 있다는 것 빼고는 모든 게 완전한 창작에 가깝다. 극중 사건의 대부분이 실제 증언을 각색한 것인데도(심지어 실화라고 도저히 믿기지 않는 '그 장면'도...), 막상 주인공인 택시운전사는 그렇지 않다. 당사자인 힌츠페터도 그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에 한 줄 달랑 있는 '대장금'이라는 단어로 50부작 드라마가 탄생한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송강호의 훌륭한 연기, 외화 벌러 사우디 갔다왔다는 설정, 택시운전사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보수적이고, 쪼잔할 것 같고, 말 많고, 적당히 불친절하고 등등...)이 겹쳐 설득력 있는 외부의 관찰자 캐릭터가 나왔다. 하지만 실제 택시운전사 김사복 씨는 그렇지 않았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원래 정의감이 넘치는 사람일 수도 있고, 해외 파견 노동자들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일 수도 있고, '비싼 돈 내고 학교 보내놨더니 데모하는 학생'에 별 관심이 없을 수도 있고, 나이를 보아하니 4.19에 참여했을 가능성도 있고, 손님이 듣기 싫다고 해도 전두환 욕을 줄줄 하는 사람일 수도 있고, 외국인 손님들에게도 열린 마음으로 대하는 사람이었을 수도 있고, 말투에 동남방언이 섞인 송강호와는 전혀 다르게 고향이 광주여서 귀향하는 마음으로 힌츠페터를 태워줬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영화는 이 모든 가능성을 배제하고 안 그래도 바깥사람인 송강호를 더 밖으로 내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래서 아마 다음 광주 영화가 나온다면 새로운 시선이 가능하지 않을까. 외부자의 시점에서 관찰만 하지 않고, 내부자를 억지로 찢지도 않고...요컨대 설정에서 기승전결을 끌어내는 게 아니라 내부자의 시점에서 어떤 인물들이 항쟁을 주도하였고 어떤 판단을 왜 내렸는지, 혹은 내부자들과 교집합을 가진 사람들이 사건을 어떻게 겪고 이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사태의 본질이 폭력인데 이 과정에서 반드시 폭력을 배제할 이유도 없다고 본다.


송강호는 늘 그랬듯이 훌륭하다. 대한민국에서 착잡한 표정을 가장 잘 짓는 사람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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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시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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