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Y PARLOUR(1973-, ARSENAL PLAYER IN 1989-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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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이 팔러는 아스날에서 14 시즌을 머물렀다. 비록 여러가지 사정이 겹쳐서 팀에서 은퇴를 하지는 못 했지만, 이건 훗날 아스날에서 무수한 동영상으로도 충분히 전설로 기록될 로베르 피레스, 티에리 앙리, 패트릭 비에이라 같은 선수들보다 긴 기록이다.

  최근 아스날에 실력있는 유망주가 늘어나 알찬 영입이라는 소리를 듣고 있지만, 정작 그들은 모두 아스날에서 주전으로 치고 올라갈 '기회'를 찾고 있는 선수들이고, 사실 그럴 만한 볼에 대한 감각이라든지 자국 청소년 대표팀, 혹은 대표팀에서 그런 입지를 지닌 선수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끊임없이 주전 자리를 탐하고, 그러지 못하면 금방 나가버린다.

  팔러 같은 경우는? 사실 팔러는 결코 최고의 선수가 될만한 자질이 있는 선수는 아니었다. 존 스펄링이 인터뷰한 존 부커라는 한 팬의 평가는 냉혹하기 따름없다. 크로스는 늘 허접했으며, 사각 패스에만 의존했고, 슈팅력도 안 좋은, 말 그대로 그저 '땜빵' 수준의 기량에 지나지 않는 선수라고 했다.

  그럼에도, 실력이라는 중요한 문제를 떠나서 팔러가 14 시즌이나 아스날에 있었던 이유는 분명히 있다. 피레스도, 앙리도, 비에이라도 붙잡지 않았던 아르센 벵거 감독이 그를 쉽게 놓아주려고 하지 않았던 이유는 분명이 있다. 그만이 가지고 있던 충성과 열정.

어쨌거나 암울한 데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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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러니하게도, 유스팀에 있었을 당시 주목받은 것은 그의 기술이었다. 당시 유스팀에는 팔러와 훗날 맨체스터 시티 등에서 활약하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폴 디코프등이 주목받는 선수였는데, 결국 디코프는 이안 라이트, 케빈 캠벨 등의 경쟁자들을 넘어설 자신이 없자 팀을 떠나고 만다.

  팔러는 1992년 1월에 성인팀에 데뷔했다. 상대는? 리버풀이었다. 팔러는 데뷔전에서 박스 안에서 파울을 범해 페널티 킥을 내주었고, 결국 팀은 2-0으로 졌다.

  어쨌거나 팔러는 14년 있던 선수 치고는 꽤 기복이 심한 선수였다. 어떤 날은 리암 브래디 같은 플레이를 보여주더니, 어떤 날은 상대 선수를 하나도 제치지 못하고 맥없이 교체되기도 했다.

  당시 감독이었던 조지 그레이엄이 그 꾸준하지 못하다는 점 때문에 팔러를 자꾸 팔려고 했다는 소문도 돌고, 어쨌거나 그의 하이버리 생활이 안전하지는 그닥 안전하지는 못했다.

  또한 그의 사생활에도 잡음이 많았다. 혼처치 피자헛에 가서는 그와 토니 아담스가 소화기를 집어들고 다른 손님들에게 실컷 뿌리고는 도망쳤고, 부틀린스라는 곳에서는 얼굴을 몇 땀 꿰메야 할 정도로 크게 싸웠다. 그레이엄 감독이 떠난 이후의 일이긴 하지만, 가장 유명한 사건이 있다. 팔러가 잉글랜드 21세 이하 청소년 대표팀에 차출되었는데, 그러던 도중 홍콩에 들렸었다.

  갑자기 삘받은(?) 팔러는 과자 무더기를 홍콩 택시 운전사 라이 팍 얀 씨의 차 본네트에다가 던져넣었고, 열받은 라이씨(미라이 아님)는 나무 몽둥이를 들고 팔러를 추격하는, 대낮의 진풍경이 펼쳐졌다.

어쨌거나 아슬아슬 잔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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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적은 초읽기!"같았던 레이 팔러의 아스날 생활은 끝나지 않았다. 데이비드 로캐슬은 울면서 짐을 쌌지만 팔러보다 먼저 짐을 싼 사람은 그레이엄 감독이었다.

  그리고 곧 브루스 리오치가 아스날의 감독으로 취임하게 된다. 그제서야 팔러는 어느정도 주전으로 자리잡게 되었고, 그레이엄이 만들었던 아스날의 역사에는 그가 없었다면, 이후 아스날이 세워가던 역사의 현장에는 분명 그의 이름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실 정확히는 그레이엄의 마지막 시즌이었던 1993-94부터 자주 선발 명단에 올라오곤 했다. 그 전 시즌 1993년에는 아스날이 쉐필드 유나이티드를 꺾고 오랜만에 리그 컵을 들었던 경기에도 끼어 있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브루스 리오치 감독 아래 한 시즌에는 완전한 주전으로 자리 잡았다.

  1995년, 아스날 역사상 가장 기술적으로 훌륭하고, 이름만 들어도 팬들을 설레게 하는 선수 데니스 베르캄프가 영입되었다.

어쨌거나 준수한 활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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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팔러의 별명중 하나가 '롬포드 펠레(Romford Pele)'다. 롬포드야 그의 고향이고, 펠레는 아마 유스팀에서부터 유독 공을 다루는 기술이 훌륭했기 때문에 붙여진 반장난의 별명일 것이다.

  그러나 데니스 베르캄프의 등장에 이은 아르센 벵거의 도래, 또 그가 데려온 수많은 테크니션들은 이 별명을 무색하게 했다. 단순히 거친줄만 알았던 수비형 미드필더라고 생각했는데, 기술적으로도 입을 다물게 만드는 패트릭 비에이라 같은 선수들을 보면서 그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수많은 훌륭한 선수들의 물결을 보면서 당시 스물 중반의 팔러는 "아, 팔리겠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완전 팔리는 줄 알았습니다. 내가 나가고 폴 머슨이 내 자리를 가져가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머슨이 미들스브로로 팔렸다는 소식을 들었을때, 다시 한번 더 주어진 기회였습니다. 전 제 기록을 찬찬히 열심히 뜯어보고, 제가 경기를 전혀 열심히 뛰지 않았다는 생각을 했지요. 데니스 베르캄프나 패트릭 비에이라 같은 선수들을 본받을 필요가 있었어요. 내가 아스날에게 무언가 특별한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대륙에서 데려온 기술적인 선수들을 본 팔러는 말 그대로 주전을 지키기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을 했다. 그때부터 진정한 '열정의 팔러'가 탄생한 것이다. 대개 충격적일 정도로 놀라운 패트릭 비에이라의 활약에 가려졌지만, 팔러는 꾸준히 출장수를 늘렸고 기량면에서도 확 발전했다.  그 결과 그는 99년부터 잉글랜드 국가대표에도 차출되었지만 인상적인 활약은 없었고, 2001년부터는 국가대표 유니폼을 다시는 입지 못했다.

  다시 시간을 돌려서 1998년 리그와 FA컵을 동시에 석권했을 때도 팔러는 큰 공을 세웠고, 또 소꿉친구 카렌과 결혼하며 행복해 보였다.

  2000년, 아스날은 리그에서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한테 밀려 2위 자리를 하고 있었지만, UEFA컵에서는 승승장구를 하고 있었다. 4라운드에서 콘세이상과 마카이등이 지키고 있던 데포르티보를 대파하고, 4강에서는 베르더 브레멘을 만났는데 2차전에서 팔러는 커리어 사상 최초로 해트트릭을 달성했다. 꿈에 부푼 아스날은 결승전에서, 서구권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강팀인 갈라타사라이를 만났다. '발칸의 마라도나' 게오르게 하지 등이 버티고 있던 팀이다. 아스날은 결국 승부차기에서 비에이라와 슈케르의 실축으로 결국 준우승에 그친다.

어쨌거나 다가오는 서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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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우 아쉬운 시즌이었지만, 팔러의 반짝이는 행보는 그 한 번으로 끝은 아니었다. 예전의 기복 있던 시절에 비하면 훨씬 안정적이 모습이었다. 뉴캐슬을 상대로 다시 한번 해트트릭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2001년 브라질 코린치아스에서 뛰던 에두가 아스날로 이적했다. 겨울에 도착하자마자 첫 경기 뛰고 부상당하는 바람에 2000-01에는 별로 나오지 못 했지만, 다음 시즌부터는 이야기가 달라졌다. 타고난 체격과 브라질리언의 기술 모두 가지고 있던 그는 2001-02 시즌부터 자리를 굳히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팔러가 뛸 수 있는 다른 자리인 오른쪽 미드필더에는 이미 프레드릭 융베리라는 스웨덴 출신의 걸출한 미드필더가 버티고 있는 셈이었다. 그때부터 조금씩 팔러는 다시 '땜빵'의 자리로 돌아가는가 싶었다.

  하지만 팔러는 그런 처사에 한번도 불평을 터트리지 않았다. 오히려 팀에 온 외국인 선수들에게는 런던 사투리를 가르쳐주기까지 하는둥, 인터뷰는 사투리와 함께 버벅거렸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그 누구보다 말 잘하고 사교적이었다. 팔러가 에두에게 영어를 가르친답시고 사투리하고 욕만 가르치는 바람에, 에두가 예전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회장 마틴 에드워즈에게 얼굴에 대고 "꺼져, 이 늙은 개새끼야!(Fxxk off you dirty old bastard!)"라고 말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주전경쟁이고 뭐고 팔러는 결코 버려지지 않았다. 본인의 피나는 노력도 있었겠지만, 벵거 감독이 그를 무척 아끼기도 했다. 얼마전 벵거의 취임 11주년을 기념해서 벵거가 뽑은 베스트 11의 한 자리는 분명 팔러가 차지하고 있었다. 에두가 말하기로는 팔러는 라커룸에서 누구보다 유머 감각이 뛰어난 선수였다고 한다. 가끔은 벵거까지 농담의 소재로 삼아 라커룸의 분위기를 풀기도 하였다.

  출장수는 줄어들었지만 빛나는건 여전했다. 아마 그중 제일 유명한 경기는 2001-02년 FA컵 결승전이 아닐까 싶. 이미 리그를 우승한 아스날은, 첼시를 상대로 FA컵만 잡으면 4년만에 다시 두개의 우승컵, 즉 더블을 석권하게 되는 것이다. 전반전은 무승부로 끝났고, 지루하게 후반전이 이어더준 도중 레이 팔러가 공을 잡았다. 첼시 팬이었던 사커 AM의 해설자 러브조이가, "별거 아니네요. 겨우 팔러가 공을 잡았을 뿐이에요."라고 말을 끝내는 순간, 팔러의 공은 환상적으로 감겨 들어갔다. 아스날은 이후 융베리의 추가골을 더해 2-0 승리를 거두었다.

어쨌거나 데뷔보다 암울한 이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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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러는 2002-03, 2003-04년에도 간간히 나와서 활약했다. 특히 2003년 FA컵에서 맨체스터를 꺾었을때의 활약은 두드러졌다. 아마 은퇴할 때까지 이런 식으로 남아 있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영국 이혼 소송 역사상 가장 비참한 패배자가 되어버렸다. 정말 길이길이 남을 소송이 되어버린 것이다.

  1998년 결혼한 팔러와 카렌은 2001년 결별했고, 2004년 판결이 확정났다. 팔러는 아이들 양육권도 내줘었고,  집 2채를 공짜로 넘기고, 매년 수익의 일부를 그녀에게 줘야 하며, 결국 한화로 약 34억원어치를 지불하게 되었다. 결국 그는 돈이 더 많이 필요했고 경기를 더 뛸 수 있는 그가 468경기를 뛰었던 팀을 떠나 미들스보로로 옮길수 밖에 없었다.

  미들스보로와 아스날 경기 중, 관중들은 "대체 옛 마누라가 네가 여기 있는건 아냐?"라고 소리질렀고, 그는 힘없이 미소지을 뿐이었다.

  별 족적을 남기지 못했고, 나중에는 팀에서 방출되었고 그를 아꼈던 벵거 감독은 같이 훈련하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곧 헐 시티에서 팀을 강등에서 구출하나 재계약에는 실패하고 현재 무직 상태다. 서른 넷의 적지 않은 나이에도 아직 그는 그를 데려갈 팀을 찾고 있다.


Posted by 시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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