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문

팝콘에 목이 메이네 2009. 12. 21. 02:20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사람은 추억으로 산다는 말이 있다. 추억은, 즉 기억은 그 사람을 이루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개개인이 모두 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치 초등학생과 국민학생을 구분 짓는 여러 '추억'들이 존재하듯이. 딱지치기를 해봤으면 국딩, 못해봤으면 초딩.

  그러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억의 대부분은 비슷한 것들이다. 딱지치기를 해봤다는 추억이 국딩과 초딩을 구분 지을 수는 있어도 개성이라 부를 만큼 크게 구분 짓지 못하듯이. 우리 기억의 대부분은 소비함으로 생기기 때문이다. 친구랑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 어제 TV에서 어떤 방송을 했고, 그 방송에서 유재석이나 강호동이 어떤 행동을 했는지 되짚어본다. 이야기를 하기 위해 TV를 보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한다. 여행을 가도 사실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비슷한 코스를 다닌다. 관광지가 왜 있겠는가? 해외여행이라고 해도 딱히 달라질 것은 없다. 오사카와 도쿄의 음식점 메뉴판에 왜 한국어 설명이 붙어있는지 생각해보자. 우리는 보통 추억을 공유한다. 그 추억을 같이 나눈 사람이 아닌, 전혀 모르는 사람들하고도.

  <더 문>은 샘 벨의 클론들의 이야기다. 본인들은 클론인 것을 모른다. 그래서 회사에서는 같은 기억을 가지고 있는 샘 벨의 클론을 여럿 제작하여 기지에 숨겨두고, 3년마다 하나의 수명이 다하면 다른 클론을 깨워 교체한다. 이들은 처음의 샘 벨이 아마도 그랬듯이 3년을 달기지에서 가족을 다시 만날 날만 꼽으며 외롭게 보낸다. 그러나 우연히 죽었어야 하는 샘 벨 클론 하나가 살게 되고, 두 클론은 서로 만나게 된다. 두 샘 벨은 본판이 같은데도 하는 짓은 다르다. 3년 오래 산 샘 벨은 더 불안해 보인다. 막 깨어난 샘 벨은 적극적이다. 하지만 두 샘 벨은 곧 둘 다 클론임을 깨닫고 음모를 파헤쳐간다.

  이처럼 클론들을 노예처럼 부리는 <더 문>의 '루나 공업 주식회사'는 깨끗한 에너지를 만드는 더러운 기업이다. 그들은 멀리 떨어져있는 샘 벨에게 지속적으로 당신 같은 일꾼이 있기에 이 기업이 발전할 수 있다고 종종 메세지를 띄운다. 현실에 아직 이 정도로 극단적인 예를 찾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훌륭한 기술을 악용하는 사례를 많이 목격하였다. 그 기술에 대해서, 혹은 기술을 이용하여 거짓말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아직까지 끝나지 않은 황우석 논쟁도 비슷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경제가 어떻게 발전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정말, 샘 벨 같은 일꾼이 많았기에 발전하였다. 우리는 사람이 복제품처럼 고독에 시달리며 죽도록 일하다 결국 죽어나가는 광경을 많이 보았다.

  영화의 기업과 비슷한 기업만큼 극단적인 사례를 찾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지만, 위에서 말했듯이 우리의 기억도 서로 비슷하다. 우리는 TV를 보고, 상품화된 코스를 따라 여행을 하고, 인터넷으로 뉴스를 체크하고 유행에 따라 소비를 한다. 아마 연령대나 지역에 따라서 차이가 있겠지만, 그것은 통계로 나타낼 수 있을 만큼 분류가 가능하다. 그래서 TV를 늘 적으로 삼는 사람도 있었다. 바보상자라는 별명에서 볼 수 있듯이, TV가 아니었다면 사람들이 이토록 멍청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같은 기억이 만들어지는 것을 막을 수 없다. 동시에 우리에게는 같이 가져야할 기억도 필요하다. 영화 마지막 부분 쯤, 다 죽어가는 클론 하나와 다른 클론이 차량 안에서 겪어 본 적도 없는 아내와의 추억을 이야기한다. 괴상하고 고요하고 아름답지 않던가? 설령 기억은 거짓이라도 이들이 가진 마음은 진실하다. 그리고 기술을 창조적으로 악용하는 자들이 있는 만큼, 그 만들어진 세계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면 다들 똑같은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도리어 두 샘 벨이 자신들 모두 클론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친해질 수 있었듯이. 그리고 그 둘은 진짜가 되었다. 마지막에 죽어가는 샘이, 다른 샘에게 네가 지구로 가서 추억을 누리라는 장면은 자신만이 옳다는 생각을 하고 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즉 설령 기억과 추억이 모두 같다 해도 개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제 곧 모든 TV가 한 목소리를 내게 될 것인데, 이런 날들이 와도 불꽃이 쉽게 사그러들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 이 영화에서 인상 깊은 인물이 하나 더 있었다. 영화에는 매우 적은 숫자의 사람이 나오지만, 공허한 월면에 샘 벨이라는 동명이인 둘만 있는 것은 아니다. 샘 벨들의 편의를 돕기 위해 만들어진 GERTY라는 로봇이 있다. 로봇은 처음부터 음모의 냄새를 풀풀 풍기지만, 결국 주인공을 배신하지 않았다. GERTY는 회사가 단 한 가지 목적만을 가지도록 만들었다. '샘 벨을 돕기.' GERTY는 정말 그 말에 따라서만 행동한다. 그리고 샘 벨에게 정말 큰 도움이 된다. 사람들은 흔히 마음이 따듯한 것을 '인간적이다.'라고 표현하는데 이 장면을 두고 보면 단백질이라곤 1g로 안 들어간 로봇 GERTY가 인간적이고, 생물학적으로 분명한 인간인 회사의 중역들이 비인간적이다. 결국 과학이나 기술 따위와 상관없이, 인간을 본질적으로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선한 의지다. TV, 관광지, 아파트, 핸드폰, 인터넷 같은 것은 그 이후의 문제다. 그 뒤에 악의만 숨어있지 않다면야.

  GERTY와 같이 있는 기지 속은 그렇지 않지만, 문을 열고 달의 표면으로 나오면 우주는 넓고 샘 벨은 고독하다. 우주에서는 매질이 없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데이빗 보위의 아들 던컨 존스 감독이 고른 음악은 샘 벨의 외로움을 더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 같다. 샘 벨이 자신의 기억이 거짓된 것이고, 세상은 자신을 속였고, 우주에서 나홀로라는 슬픔에 은막 위에서 몸을 떠는 그 순간마다 우리도 같이 눈물겨울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분명 그런 순간이 있다. 기억은 거짓된 것이고, 세상이 나를 속였고, 지구에서 나 혼자라는 기분. 그때도 우리를 보고 눈물 지을 누군가가 있을 것이다. 결국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샘 벨에게 다른 샘 벨과 GERTY, 그리고 관객들이 있듯이 결국 <더 문>은 인간의 선의와 인간성에 대한 순수하고 단단한 믿음이다.



Posted by 시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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