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드라마 스페셜>로 습지생태보고서를 봤다. 원작의 시니컬한 유머가 죽은 대신, 없던 극적 이야기가 생겼는데, 생각해보면 4페이지 만화가 단막극이 되는 과정에서 당연한 일일 것이다. 두 장면 정도는 정말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먼저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냄비받침으로 사용하는 장면. 그리고 물 새는 방을 보고 '이게 방이야. 씨...'이라 외치며 주인집으로 쳐들어가는 장면. 저 '씨...'뒤에 뭉개트린 한 글자는 '발'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특히 앞에 말한 장면이 인상깊었는데, 비록 만화에 없고 드라마로 각색되면서 새로 넣은 장면이지만, 저 장면에서 드러나는 심정이야 말로 '습지생태보고서'와 나머지 '아픈 청춘물'로부터 구분짓는 차이다. 지금 흘리는 땀방울이 그냥 땀방울이지, 내일이라고 보석처럼 빛날 리가 있나. 고생한 만큼 무언가 돌아오길 바라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게 그리 쉽게 되지 않는 걸 체감으로 알고 있을 뿐이다. 니들이 덜 살아봐서 그래, 좀만 더 열심히 살아봐, 와 같은 반박이 들어올 수도 있는데, 여기에 대한 재반박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럼 언제까지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살아야 하는데요, 한 마흔 아홉까지요? 소설가 김연수가 전에 칼럼에서 적은 적이 있지만, 쪼잔한 말들일수록 진실에 가까울 때가 있다.


  행복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사는 이유가 당장 내일 행복할 거라고 확신하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내일 모래쯤에 행복 비슷한 무언가가 있을 거라고 희미하게 믿기 때문일 것이다. 습지생태보고서의 주인공들은 예술을 하고, 보통 우리는 예술을 하는 사람들이 꿈에 대해 간절하고 목표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나가기를 바라지만(아니라면 슈스케의 인기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습지생태보고서의 주인공들은 꿈에 대해 거의 얘기하지 않는다. 그들이 목표가 없기 때문은 아니다. 다만 그 목표들이 생계와 분리지을 만큼 별세계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맛있는 것 먹고 싶고, 옷 잘 입고 싶고, 연애하고 싶은 마음도 빠지지 않는다. 이걸 패기와 최소한의 자존심으로 버틸 수 있는 역치가 있다. 그러니 만화 속의 '최군'도 퀸카와의 소개팅에 나가서 삐딱하게 다리를 꼬고 '이 옷 빌린 겁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때까지는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해 '뭐, 어쩔 수 없지'라고 말할 수 있는 여유가 있을 때이다.


  그러나 사람의 밑천이 드러나는 순간은 언제나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다. 그때는 정말 자신이 가진 것이 얼마나 초라한지 깨닫게 되는 날이 온다. '남들 다 하는 연애' 한 번 제대로 해보겠다고 발악을 하는 바로 그 때, 퀸카는 특이하다 여겼던 최군도 다른 모든 남자랑 같다며 실망한다. 퀸카가 최군에게 바란 건 연애고수 같은 쿨한 태도겠고, 최군도 차이고서는 그걸 알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자세를 최군이 가질 수 있는 건 아니다. 그건 밑천이 있거나, 간절하지 않거나, 아니면 정말 강해야하지만 보통 우리는 셋 중 하나도 갖추기 어렵다.


  늘상 진지하고 사회의식 있는 최군의 그림자처럼 '녹용'이 있다. 책표지의 사슴이 '녹용'인데, 녹용은 최군이 원론을 늘어놓을 때보다는 소소하기 보다는 사사로운 욕망들을 풀어놓는다. 그 원론들이 사실은 비루한 자기방어이며 사실 네 진짜 욕망은 아주 사사로운 것들이라며. 비열한 것들은 원론보다 조금 더 진실에 가까워 보이는데, 그건 아마 우리가 그리 정의롭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원래 가장 친한 친구들은 겉이야 어떨지 몰라도 속은 어쩐지 다 깊어보이지 않는가. 비슷하게 우리랑 가까우니 더 설득력 있어 보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욕망들에 대해서만 내내 떠든다 하더라도 그 욕망의 주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전세계의 모든 술집은 사냥꾼과 사냥감으로 미어터지고, 주식시장은 언제나 사상 최대의 호황일 것이다. 결국 습지생태보고서는 이 지점에 선 우리들의 이야기다. 원론은 비루해보이고, 원하는 건 아무 것도 가질 수 없을 때. 그러나 답은 없다. 그러면 이 만화가 있을 필요는 무엇일까? 이야기는 언제나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할 때 필요한 법이다.




Posted by 시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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