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차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오후 다섯 시 오 분, 비행을 시작한 지 5시간 정도 지났다. 뮌헨까진 5600km, 7시간을 더 가야한다. 경유하여 이스탄불까지 가려면 으음...그래도 울릉도에서 휴가 복귀할 때와 시간차가 크게 없다. 서쪽으로 석양을 피해 멀리멀리 달아나고 있다. 그래서 언제나 점심처럼 밝다. 비행기 왼편에 앉은 게 실수였다. 해는 동쪽에서 떠서 남쪽을 거쳐 서쪽으로 진다. 그래서 창문을 열 수 없다. 잠깐만 열어도 눈이 부신 걸 넘어 아프다. 구름 위에 있으니 당연히 아래는 보이지 않는다. 내가 궁금한 건 앞에 달려있는 스크린이 알려준다. 비행기는 키질이라는 지역 위에 있단다. 들어봤던 이름인데 어느 나라 땅인지 통 기억이 나질 않는다. 스크린은 또 조악한 CG로 근방의 지형을 재현해놓았다. 이 아래는 좁은 강이 흐르는 황무지 같다. 


왕복을 한 번으로 친다면, 비행기를 타는 게 이번이 네 번째다. 중국, 싱가폴, 일본...앞의 두 번은 수학여행, 일본은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 내가 탄 비행기는 A340인데, 한국에서는 몇 대 보기 힘든 비행기라고 한다. 좀 알아보니, 원래 국제선의 황태자 보잉의 747기의 아성을 무너트릴 각오로 심혈을 기울여 만든 에어버스 사의 역작이었으나, 바로 뒤에 나온 보잉 777에 모든 면이 밀려 3년 전 생산중단 된 저주받은 작품이란다. 웃긴 사실이지만 별로 중요하진 않다. 난 그냥 자리가 좁아서 힘들다.


내 옆에 앉은 사람은 또래 같은데, 비행기 타자마자 코를 골면서 잘만 잔다. 난 그럴 수 없다. 비행기라는 게 매번 신기하다. 비행기 날개의 철판들이 홀로 열렸다 닫혔다, 접혔다 펴졌다 하는 아주 단순한 광경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건물들이 작아지고, 바다 위의 섬들이 점토덩이처럼 작아지는 순간도 봐야 한다. 오늘은 바다를 계속 처다보다가 한 가지를 새로 알게 되었다. 흙탕물은 뭉쳐다녔다. 그래서 바다는 파랗기보다는, 파란 바탕이 누런 무늬가 있는 셈이었다. 지구에서 가장 거대한 불균일혼합물이었다.


비행기 여행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던 것이지만, 이런 게 있다는 게 쉽게 믿기지 않는다. 유럽여행이라니. 가당한 말인가. 비행기가 있기 전부터 사람들은 여행을 했다. 종종 세계여행도 했다. 마젤란처럼 배를 타기도 했고 삼장법사처럼 육로로 다니기도 했다. 그래도 유럽여행, 아시아여행 같은 건 없었다. 유럽 혹은 아시아에 가본 타대륙 사람이 없단 소리는 아니다. 그들의 여행은 유럽까지 간 다음에, 다시 집으로 가는 긴 여행이란 얘기다. 지금 나처럼 점에서 점으로, 즉 인천 다음에 뮌헨, 뮌헨 다음에 이스탄불로 이동하는 건 존재하지 않았다. 난 키질 상공을 날아가지만, 키질이 어떤 땅인지 무슨 사람들이 있는지 어떻게들 사는지 알 필요가 없다. 이동 자체가 거대한 여정이 되는 셈이다. 물론 나도 이스탄불에서 런던까지 올라간다. 하지만 런던에서 집에 오는 데 목숨을 걸 필요는 없다. 그렇게보면 이동이란 게 지루하고 별로 할말도 업게 된 시대는 정말 그 역사가 짧다.


영화를 한 편 봤다. 제목은 <보이후드>. 감독은 리차드 링클레이터. 모든 록키드의 향수를 돋군는 스쿨 오브 락과, 모든 배낭여행객의 꿈인 비포 선라이즈 시리즈 같은 영화를 만들었다. 비포 시리즈의 에단 호크도 나온다. 주인공의 약간 무책임하지만 활기찬 아빠로 출연한다. 아이 하나가 10년 동안 어떻게 자라는지...뭐 그런 내용인데 처음부터 끝까지 배우가 같다. 10년 동안 찍었단 소리다. 초등학생이었던 애가 대학생이 되면서 막이 내린다. 좋은 영화였다. 사운드트랙도 좋았다. 제프 트위디, 콜드플레이, 아케이드 파이어, 플레이밍 립스, 하이브스, 포스터 더 피플, 캣 파워, 밥 딜런, 매카트니


주인공은 주로 아버지와 예쁜 여자들 상대로만 속내를 털어놓는데, 유독 여자들에게는 현재 느끼는 것을 어떻게든 추상적인 단어로 설명해보려고 한다. 약은 놈....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이런 대사를 친 거 같긴 하다. 언제나 순간이라고. 언제나 바로 그 순간인 것 같다고. 잘 모르겠다. 난 이 순간을 인위적으로 만든 거다. 


한 숨 자고 일어났더니 해가 약간 비껴가서 내 좁은 창문으로 바로 쬐진 않는다. 하긴 이 좁은 구멍에까지 볕들 게 뭐가 있나. 비행기 밑에는 여름이불 솜처럼 얇은 구름이 깔려있고, 그 아래에는 대체로 평야가 깔려있다고 스크린이 알려준다. 평야는 화강암처럼 구멍이 뽕뽕 뚫려 있다. 호수인 것 같다. 다시 창 밖을 낻본다. 구름의 지평선 위의 하늘은 위로 갈수록 푸른 색이 짙어졌다. 지구가 둥글기 때문에 보이는 풍경이라고 얼핏 들은 것 같다. 그게 맞다면 나는 지구의 모서리를 보고 있는 것이다.


2014/11/05


Posted by 시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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