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날의 홈구장 에미레이츠 스타디움은 런던 지하철 피키딜리 라인의 아스날 역에 있다. 우리 나라에도 과거 동대문운동장 역처럼 경기장 이름을 딴 역 이름은 있지만, 아예 구단 이름을 딴 경우는 없다. 당장 프로축구팀만 열 몇 개 있는 런던에서도 아스날역이 유일하다. 전세계로 범위를 넓여도 별반 다를 것 같진 않다. 세계유일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세계최초는 확실하다. 무려 1930년대의 일이다.

원래 역 이름은 길레스피 로드였는데, 당시 아스날의 감독이었던 허버트 채프먼이 이슬링턴 구청에 그런 조그마한 거리를 누가 아냐, 아스날은 다들 안다며 빡빡 우겨서 이뤄진 일이다. 요즘 같으면 갑의 횡포라고 신문에 나왔겠지만, 당시 상황은 약간 다르다. 일단 아스날이 딱히 갑이 아니었다. 당시는 축구는 노동자 스포츠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했던 때이고, 인기도 경견이나 모터사이클 경주 같은 새로운 스포츠에 밀렸다. 하지만 허버트 채프먼은 그 인기가 얼마 가지 못할 것이라 예상했고, 그의 말대로 되었다. 그는 축구가 최고의 스포츠가 될 때를 기다리며 철저하게 준비했다. 그 중에는 위처럼 지하철 역을 바꾸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는데...아마 광범위한 정치적 공작이 있었을 것이라고 다들 추측은 한다. 아스날의 이름값으로 역명을 바꾸기는 턱없는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채프먼 감독이 단순한 로비스트였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팀 운영의 전권을 쥐고 있는 당대 최고의 감독이었다. 그는 하이버리 스타디움의 낙후된 스탠드를 아르데코 스타일로 다시 지어서 다양한 관중층을 경기장에 불러모았다. 또한 TV중계 시대가 올 것이라 예상하여 관련설비를 갖추었다. 선수들에게 처음으로 등번호를 붙인 사람도 그였다. 관중들 입장에서는 선수들을 더 쉽게 구분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그에 따라 감정이입 하기도 쉽고, 선수들 입장에서는 자기 번호에 책임을 지게 하려는 조치였다.

인프라만 잘 짜둔 것이 아니다. 전술을 짜고 선수를 기용하는 데 있어서도 당대에 대적할 자가 없었다. WM전술을 발명하여 상대팀을 박살내며 아스날을 리그 최고의 팀으로 끌어올렸다. 그 주역인 선수들을 제대로 스타 대우를 해주어 팀에 묶어놓았다. 잘하는 선수를 잘 대하는 게 당연하지 않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당시에는 구단이 비시즌 기간에 선수들이 할만한 아르바이트를 소개해주던 시대였다. 톱플레이어들이 신흥귀족처럼 살게 된 오늘날의 관점으로 보면 웃기는 일이다.

허버트 채프먼이 구상했던 것 중 이루지 못한 것이 딱 하나 있었다. 언젠가 야간에 축구를 할 것이라고 예상하여 조명을 설치하려 하였으나 시대가 좋지 않았다. 대공황으로 에너지 수급이 좋지 않아 결국 이루지 못했다. 축구가 세계 최대의 엔터테인먼트 산업 중 하나가 된 작금에 돌아보면, 그의 혜안이 참 놀랍다. 생각대로 되지 않은 게 없다.

지금 경기장은 채프먼이 개조한 하이버리 스타디움은 아니다. 하이버리는 1913년 개장하여 2006년에 폐장하였고, 지금은 개조하여 고급 아파트 단지로 사용하고 있다. 현재 아스날은 2006년에 개장한 에미레이츠 스타디움을 홈구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전자는 애거서 크리스티 소설에 나올 것만 같은 집들 사이에도 전혀 위화감이 없는 고풍스러운 건축물이고, 후자는 6만석의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는 현대건축의 산물이다. 겉으로는 이렇게 다른 두 구장에게는 묘한 공통점이 하나 있다. 둘 다 주택가 한 가운데 있다는 것이다. 물론 경기장 바로 옆에 주택이 붙어있는 하이버리가 심하다면 더 심하겠지만.

런던에 있는 동안 에미레이츠 스타디움에만 세 번을 가게 됐다. 첫번째는 일정을 마치고 저녁에 잠깐 들렸고, 두번째는 십몇파운드짜리 경기장 투어, 세번째는 아스톤 빌라와의 리그 23R 경기였다. 앞의 두 번은 정말 조용한 주택가였는데, 세번째는 오일장이 열리듯 시끄러웠다. 런던은 물론이고 전세계에서 구름처럼 몰려든 6만 명의 관중들이 거리를 꾸역꾸역 메웠고, 거리에는 노점과 잡상인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나도 배가 고파서 경기장 앞에서만 15년 장사를 했다는 아저씨에게 더블 스테이크 버거를 사먹었는데, 영국요리의 명성에 부합하는 요리였다. 골판지를 씹는 것 같은 식감이었다. 케첩을 뿌리지 않았더라면 당장 쓰레기통에 쑤셔박았을 것이다. 이런 요리로 15년동안 안 망하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다.

킥오프 한 시간 전부터 경기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 바람이 세게 불어서 발이 시렸다. 자리를 찾아 앉았는데, 경기장이 잘 보이기는 했다만 생각보다 멀어서 실망스러웠다. 경기장 투어에서는 VIP석에 앉아볼 수 있는데...역시 괜히 VIP석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도 나름 55파운드나 줬는데 이럴 줄이야. 내가 구할 수 있는 티켓 중에서는 가장 비싼 티켓이었다. 더 싼 티켓이 없던 건 아니었는데, 그래도 굳이 가장 비싼 티켓을 골라야만 했다. 그 전주에 술집에서 같이 축구를 볼 때 댄이 물어봤다. 왜 그렇게 비싼 티켓을 사냐고. 내가 말했다. 십여년 전에 처음 경기볼 때부터 떠들었거든요. 언젠간 꼭 직접 가서 경기볼 거라고요. 그땐 이렇게 오래걸릴 줄 몰랐어요. 반대로 한 5년 전엔 이렇게 금방 이뤄질 줄 몰랐어요. 결국 못 갈 줄 알았거든요...어쨌거나 여기까지 오는데 10년이 걸렸잖아요. 다음엔 언제 올지 몰라요. 가장 좋은 자리여야만 해요. 댄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튼 저런 비장한 각오로 온 것 치곤 실망스럽긴 했다. 10~20 파운드를 더 내고 좋은 자리로 갈 수 있었다면 분명 그렇게 했을 것이다. 혼자 쪼그려 앉아서 한 시간 동안 매치 프로그램 책자를 뒤적거리거나, 선수들 훈련하는 것을 구경하면서 보냈다. 슬슬 경기가 시작할 참이 되니 내 옆자리도 찼다. 양 옆으로 부부 두 쌍이 앉았다.

경기흐름은 너무 간단했다. 아스날이 압도했고 아스톤 빌라는 무기력했다. 스코어는 5:0...산체스가 나오지 않았다만 최근 페이스가 좋은 카솔라와 복귀한 외질을 중심을 상대편을 갈갈이 찢어놓았다. 내 인생 첫 직관경기로는 더할나위 없이 아름다운 결과였다. 하지만 딱 하나 불만스러운 게 있었는데...후반 30분쯤, 이미 승리가 확실한 상황이 되니 홈관중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대패 중인 원정팬도 안 나가는데 말이다. 물론 원정팬은 나간다 하여도 딱히 집에 갈 방법도 없지만...약간 울화가 터졌다. 표값만 해도 얼만데 이걸 그냥 나가다니. 본인 자유이기는 하다만. 나갈 때 몰리는 인파가 성가실 수도 있고, 빨리 가야하는 사정이 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십 년을 기다려서 단 일 분도 놓치기도 아깝구만. 그래서 더욱이 늦은 시간의 추가골이 터지길 바랐다. 경기 종료 다가와서 한 골이라도 터져야 미리 나간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아쉽지 않겠는가...다행히 뜻대로 되었다. 주전 드뷔시의 부상으로 출전하게 된 오른쪽 수비 유망주 벨레린이 본인의 프로경기 첫 슈팅을 골로 연결시킨 것이다.

경기가 끝나고 한참을 스타디움에서 서성였다. 괜히 좋은 자리에도 앉아보고, 전광판에서 틀어주는 하일라이트도 감상했다. 매점에서 맛도 없는 커피도 사먹었다. 우수에 잠겨서 뻔한 생각을 했다. 선수들은 전력을 다해 뛰는 90분이 참 짧구나. 언제쯤 돌아올 수 있을까. 다음에 붙는 상대는 누구일까. 그저 10년보다는 덜 걸리기를 바란다. 간절하다. 생각해보면 내 삶에서 일어난 많은 일들이, 내가 아스날 경기를 봤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아마 내가 아스날 경기를 보지 않았더라면 유럽여행을 올 수도 없었을 지도 모른다. 아스날을 보고 싶어서 유럽에 왔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것보단 훨씬 실질적인 의미다.

나와서는 매장에 갔다. 매장의 이름은 아머리인데, 말장난이다. 아스날이 영어로 병기고를 의미하고, 아머리도 병기고를 의미한다. 그 아머리 안에는 사람들이 꽉꽉 들어차있었다. 나 같이 멀리서 온 팬들이나 와서 물건을 살 줄 알았는데...다들 대승의 분위기에 취한 것이다. 계산대 앞에 줄선 사람만 세어도 수십 명은 거뜬했다. 개중에는 수십 년은 경기 보러 다녔을 것만 같은 할아버지들도 승기에 취해서 지갑을 거침없이 열어, 이미 몇 벌은 가지고 있을 듯한 유니폼을 또 구매했다. 역시 남녀노소 축구팬은 거기서 거기다. 하지만 난 그들과 다르게 차가운 이성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념품만 좀 샀다. 무리하지 않고 딱 표값 정도만 샀다. 표값이 얼마였냐면...


2015/2/7

Posted by 시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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