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영이 4대 영법 중 하나라지만 동네 수영장에서는 대접이 하찮다. 강습에서 나머지 영법은 매일 비중은 달라도 조금씩은 하게 되지만 배영은 하지 않고 넘어가는 날이 수두룩하다. 자세교정도 다른 영법보다 대충이다. 다른 영법을 하다가 물을 먹으면 아직도 그러냐고 핀잔을 듣지만, 배영을 하다가 물을 먹으면 그럴 수도 있다는 소리를 듣는다. 남자들은 무게중심이 높아서 더 힘들다는 나름 과학적인 설명과 함께. 이런 일도 있었다. 하루는 상급반 강사가 물어본 적이 있었다. 회원님, 회원님은 어느 영법을 제일 잘 하고 어느 영법을 제일 못 하는 것 같아요? 잠깐 생각해봤는데 역시 답은 하나였다. 배영이요. 강사가 얼굴을 찌푸리고 손을 휘휘 저으며 말한다. 아니, 농담하지 말고 진지하게. 내가 봤을 때는 접영이 제일 낫고 평영이 제일 심각해. 그러면서 내 평영이 어디가 잘못됐는지 이것저것 짚어줬다. 고마운 일이나 내 말이 농담은 아니었다. 그땐 배영이 그나마 낫다고 진지하게 생각을 하긴 했다. 요즘은 아니다. 모든 영법이 심각하다.


  처음 초급반에서 수영을 배울 때 친해진 사람 중 한 명은 배영까지 배우는 게 목표라고 하였다. 왜 배영이에요? 하면 접영까지는 해야죠. 내가 이렇게 물어보니, 그는 친구들과 같이 계곡이나 바다에 놀러갈 때 수영을 못 하는 게 너무 아쉬웠다고 한다. 물에 떠다니면서 놀고 싶어요. 제일 쓸모 있을 거 같은데. 하긴 계곡에서 접영을 할 수는 없겠네요. 배영이 실용적이기는 하죠. 허나 막상 배영은 내가 더 잘했다. 머리를 물밖으로 숨을 쉬면서 갈 수 있는 수영이라는 특성이 무색하게 그 친구는 몇 번이나 자리에 서서 숨을 골랐지만, 나는 입으로 코로 쏟아지는 물을 다시 내 얼굴로 뱉고 또 그걸 삼켜대면서 처절하게 기어갔다. 생각해보면 이걸 배영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배영 비슷한 무언가겠지. 만약 영상으로 찍어 봤더라면 끊임없이 제 얼굴에 침을 뱉어대는 내 모습이 수면에서 물을 위로 뿜어대는 흰수염고래 같았으리라고 위로해본다.


  그 친구는 오래 전에 강습을 관두었고, 나는 공백기가 있긴 했지만 스포츠센터에 등록한 지 1년이 됐다. 아마 만날 일은 없겠지만 다시 만나게 된다면 꼭 해주고 싶은 말은 있다. 배영도 별 쓸 데는 없다고. 중급반 강습 중 배영으로 가다가 앞사람 킥에 후두부를 몇 번 맞고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생각해보면 세상의 어느 계곡이나 바다에서 배영으로 물놀이를 할까. 가본 적은 없지만 오션월드에서 배영으로 다닐 수 없다는 것도 사람반 물반 사진을 보니 확실히 알겠다. 굳이 물에 머리를 내민 채 떠다니고 싶다면 굳이 배영으로 할 필요는 없다. 전방도 후방도 볼 수 없고 직진으로 가는지도 알기 힘든 영법이지 않은가.


  얼마 전에는 일종의 생존영법도 지나가듯이 배웠는데, 수면에 등쪽으로 눕는다는 점을 빼고는 배영과 모든 것이 달랐다. 생존수영은 체력을 최소한으로 사용하여 물에 오래 떠있는 게 목적이었고, 배영은 빨리 가는 게 목적인 영법이다. 하지만 배영으로 아무리 발악을 해보았자 자유형에서 많이 사용하는 크롤 영법보다 빠를 수는 없다. 그렇다면 대체 배영은 왜 있는 것인가? 신체동작의 존재 당위성을 찾는 게 우습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배영이 정말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행동은 아니다. 그리고 배영의 이렇게 애매한 위상은 수영의 인공성에 기인하고 있을 것이다.


  인류가 물과 얼마나 가깝게 살았는지, 또 단순히 수영이라는 행위가 그자체로 얼마나 오래됐는지 생각해보면 수영이 인공적이라는 말이 모순적으로 들릴 것이다. 오래전부터 인류는 물을 생명의 근원으로 보아왔다. 또한 생물학적으로 보면 인간은 태아 때부터 자궁의 양수 속에서 살며, 갓난아기를 수영장에 풀어놓으면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쪼르르 수영을 할 줄 안다는 말도 있다. 역사 이전부터 인류는 수로 생활을 하며 일용할 양식을 구했고, 역사 이후에는 군인들이나 물을 늘 가까이 하던 사람들에게 수영이 필수 소양이었다. 플라톤도 수영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니, 수영이 다른 곳은 몰라도 고대 그리스 자유인의 필요조건은 아닐지라도 미덕 중 하나는 됐을 것이다. 그러니까 수영 자체는 달리기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타고났거나 어렵지 않게 익힐 수 있는 신체 능력일 수는 있다.


  하지만 스포츠로서의 수영은 자연스러움과는 거리가 멀다. 마침 리우 올림픽 개회를 하루 앞두고 있으니, 다른 올림픽 37개 올림픽 종목하고 비교를 해봐도 좋을 것이다. 수영이 기록 스포츠라는 점에서 트랙과 필드, 혹은 역도처럼 가장 원시적인 종목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스포츠 수영은 그 어떤 종목과 비교해봐도 독보적으로 근대적이며 인공적이다. 우선 수영장이라는 공간부터 원시성과는 거리가 멀다. 대부분의 수영 경기는 수영장에서만 열리는데, 수영장은 오직 수영을 목적으로만 지어진 공간이며, 수질을 유지해야 하는등 관리하기도 까다롭다.


  수영장 뿐이겠는가? 스포츠로서 수영의 역사 자체가 근대사만큼이나 짧다. 일단 고대 올림픽 종목에는 수영이 없었다. 그리스인들이 목욕탕은 많이 지었지만, 신성한 목욕탕에서 누가 더 빨리 헤엄치는지 겨룰 생각은 차마 못했나보다. 스포츠로서의 수영은 1830년대 영국에서 시작됐다. 19세기 지구에서는 영국의 부르주아만이 수영장 같은 공간을 감당할 부와 여유가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현재 지구에서 가장 인기있는 종목인 축구와 비교해봤자 고작 30년 차이가 난다. 수영은 군대와 학교의 근대화 바람에 힙입어 교육과 신체 단련이라는 취지 아래 성장한 근대종목 중 하나인데, 그중에서도 역사가 짧은 편이다. 비슷하게 성장했던 펜싱과 체조 모두 18세기에 스포츠로 정착했다.


 영법의 세분화를 고려한다면 그 역사는 더욱 짧아진다. 크롤이 발명된 게 19세기 후반의 일이다. 그전까지는 평영을 많이 사용다고 한다. 하지만 이마저도 현대의 평영과는 다른 것이었다. 당시의 평영은 횡으로 몸을 기울인 채 평영킥을 차는 것이었는데, 이것을 현대의 수영 대회에서 사용했다가는 실격 처리될 것이다. 접영은 아예 태생부터 스포츠였다. 30년대 기존의 평영보다 훨씬 빠른 평영의 변종으로 개발된 후, 20세기 중반에야 개별 종목으로 독립해 나간 것이다. 마지막으로 문제의 배영은 기록조차 부실하다. 그러나 배영이 크롤의 아종이라는 것과 역시 이르게 잡아도 19세기 말에 태어났다는 것은 확실하다.


  이런 영법의 존재 자체도 수영만의 유별난 특징이다. 수영은 특정 동작을 강제하는 거의 유일한 올림픽 스포츠이다. 물론 다른 종목에서도 필수적으로 사용해야 하는 기술이 있다. 높이뛰기에서는 배면뛰기만을 사용하며, 멀리뛰기에서는 공중에서 다리를 젓는 히치킥이라는 기술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기술은 대부분 '더 높이, 더 멀리, 더 빠르게' 주어진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나온 기술들이다. 이러한 기술들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여도 규칙을 위반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수영은 육체가 특정한 동작을 반복하는 것 자체가 필수 규정이며, 이는 위에서 살펴봤다시피 펜싱의 세부종목처럼 역사적 맥락이 있는 것도, 체조의 세부종목처럼 기능성이 있는 것도, 그렇다고 딱히 오락성을 고려한 결과도 아니다. 영법에 따라 종목을 구분하자는 합의가 하늘에서 뚝 떨어졌고, 시간이 지나면서 표준으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크롤만큼 빠르지도, 평영만큼 실용적이지도 못한 배영과 접영은 이렇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유사한 제약을 가진 종목이 올림픽에서 하나 더 있긴 하다. 한쪽 발이 늘 땅에 붙어 있어야 하는 경보다. 하지만 경보가 인공적이고 특이하다는 인상은 흔해도, 수영이 그렇다는 말이 나오지는 않는다. 기본적으로 인기종목이고 수영이라는 행위 자체가 우리에게 익숙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수영은 이렇게 부자연스러운 면모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 됐는지에 대해 정확한 답을 할 수는 없겠지만, 근대에 수영이 일상 속에 정착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건 또 다음 기회에...

Posted by 시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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