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찰나에도 얼마나 많은 꿈을 꿀 수 있나. 대개 순조롭고 희미하게 지나가는 찰나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길고 상세하고 거칠지만 결말은 언제나 아름다운 꿈들. 꿈속에서도 바늘밭을 기워다녀도 종국에는 누군가와 같이 적당히 따뜻한 계절의 볕을 쬐며 누워있는 이야기를 끼워넣기 때문에 그 어떤 고통을 상상해도 고통스러울 수 없는 꿈들.


   오 분만 앉아서 꿈을 꾼다면 수십년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도 뒤로도, 시간축의 어디에도 걸칠 수 있는 수십년 짜리 이야기. 그 내용이라면, 만약에 그때 그랬더라면 지금까지 이랬을텐데와 같은 후회, 혹은 앞으로는 이런 일이 펼쳐질텐데와 같은 예측, 그게 아니라면 복잡한 시간축을 교묘하게 뒤튼 후 그 위에 아무렇게나 드러눕고 굴러다니는 상상들. 미래의 일을 먼저 생각하고 그것을 만든 과거를 상상하다가 다시 현재로 돌아오는 것과 같은 꿈들.


  그게 어떤 꿈들일까. 행복하기 위해 시축을 박살내서 그때 그 장소에서 만날 수 없는 사람과 만나게 하고, 중력을 뒤틀어서 손을 맞잡은 사람을 지축으로부터 하늘로 종종 우주로 날려보내고, 사실을 왜곡하여 변화무쌍한 삶이 어느 순간부터 쭉 평온한 상태로 고정된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이상한 꿈들. 이것들이 영화감독들이나 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상한 짓거리처럼 보일 지라도, 사실은 그 어떤 고통스러운 거짓을 지어내도 아름다운 결말이 앉을 자리를 마련해놓는 우리들이 매일 하는 일이고 영화감독도 그런 우리 중 누군가이다.


  사람의 진지한 생각은 기록되고 계속 인용된다면, 그 생각들이 결코 일어나지 않았고 앞으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해도 위대한 사상으로 남아서 결국 사실이 되곤 한다. 또한 유명한 누군가의 말에 따르면 사실의 총체가 세계라고 하였으니, 세상은 어느 정도는 생각으로 구성된 셈인데, 그렇다면 상상도 어느 정도는 그 역할을 할 수도 있지 않나. 생각이 세계의 사실이라면, 상상이 어떻게 거짓이 될 수 있겠나. 그걸 누가 정하는가. 관객만이 연극을 평가하던가. 연극의 연출자이자 극작가인 배우가 평가할 몫이 있지 않던가. 사고의 일부는 상상이고, 상상의 일부는 생각이다. 다만 생각은 여럿이 양 끝을 잡고 쭉 잡아당긴 덕에 긴 세월을 살아가고, 상상은 상상하는 이가 꾹 압축해 자신의 시간축 어딘가에 쑤셔넣을 뿐이다. 하지만 상상의 그 초라한 처지 덕에 우리는 수천개 수만개의 상상을 살아갈 수 있다. 때로는 같은 상상을 수십번 수백번 돌려보면서. 때로는 여러 가지 상상을 동시에 재생하면서. 그렇게 우리는 영원히 살 수 있지 않나. 돌아보면 짧기만 했던 순간들을 재료로 삼아 이야기를 만들고 또 만들고 하면서, 때로는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면서, 이야기가 끝나는 순간 온 몸을 스미는 암전을 어떻게든 버텨내면서...하지만 그건 상상이 거짓이기 때문은 결코 아니다.




Posted by 시니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