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아르헨티나에서 중년의 여성들이 대통령궁이 있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오월 광장을 점령하고 가두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오월 광장의 어머니회'라고 소속을 밝혔다. 어느나라 '어버이 연합'처럼 관념적 부모는 아니었고, 여느 부모처럼 아들 혹은 딸을 낳고 기른 어머니들이었다. 다만 그 자식들이 '사라졌다'는 것이 유일한 차이점이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죽었다면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살았다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도저히 알 방법이 없었다. 사라진 이들 대부분은 학생들이었으나, 종종 갓난아기도 사라졌다고 한다. 실종자들이 어떻게 됐는 지는 소문만 요란했다. 고문하고 사지를 잘라 이곳저곳에 뿌렸다, 혹은 묶어서 바다에 버렸다 등. 어머니회는 궁 앞에서 진실을 요구했다. 비델라 대통령의 군부독재정권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머니들이 계속 항의했다. 대통령은 여전히 침묵했으나, 어머니회에 자식이 '사라진' 어머니들이 계속 들어왔다는 것, 그리고 몇몇 어머니들이 자식들처럼 '사라졌다'는 것을 보면 군부정권이 반공의 기치 아래 침묵만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순 있다.


아르헨티나의 군부독재는 1983년 끝난다. 비델라는 징역을 살고 사면받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2013년 감옥에서 사망한다. '어머니회'의 행진은 2006년 종료된다. 그들은 독재정권의 치부를 덮기 위해 상정된 '화해법'이 같은 해 대법원에서 위헌판결을 받았음으로 마침내 모든 것이 마무리됐다고 밝혔다. 첫번째 시위부터 29년만의 일이다.


2016년 4월 13일 대한민국 총선, 서울 은평구에서 박주민 후보가 당선됐다. 세월호 변호사로 유명했던 그는 '세월호'라는 단어를 내세우면 선거에 불리할 수도 있다는 것을 뻔히 알았겠지만, 굳이 숨기지 않았다. 요 몇 년간 생활을 내려놓고 사람들을 도운 그를 위해 이번에는 다른 사람들이 발벗고 나섰다. 그중에는 사고 희생자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있었다. 이들도 세월호가 선거에 불리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인형탈을 쓰고 춤을 추거나, 사무실 청소를 하거나, 유권자에게 전화를 했다. 세월호 사건 때문에 분노하여 모인 같은 자원봉사들도 그들이 설마 그 부모들일 것이라곤 생각 못했다고 한다. 선거가 끝난 후, 유족들과 실종자 부모들은 박주민 당선자에게 노란 리본 목걸이를 걸어줬다. 배가 가라앉은 지 2년만의 일이다.




Posted by 시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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