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예전에 지브리 스튜디오의 다카하타 이사오(반딧불의 묘,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는 3D 애니메이션과 2D 애니메이션을 비교하면서 이렇게 주장했다. 3D 애니메이션은 실사와 같은 리얼리티를 보여주는 데 강점이 있고 2D 애니메이션은 드라마를 보여주는 데 강점이 있다고. 은근슬쩍 2D 애니메이션만이 진정한 감성이 있다고 자랑한 셈이다. 결과적으로 이 주장은 틀렸다. 2000년대 애니메이션의 대세라면 역시 3D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픽사'인데, 그들이 2000년대 후반 들어 내놓은 <라따뚜이>, <월E>, <업>, <토이 스토리 3> 같은 작품들은 모두 리얼리티하고는 딴판인 영상으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품을 수 있는 따스한 감성과 뛰어난 스토리텔링을 자랑했다. 같은 시기에 지브리에서 내놓은 작품은 <게드 전기>, <벼랑 위의 포뇨>, <마루 밑의 아리에티>인데 이 정도면 픽사에게 완패했다고 봐야 한다. '드라마'라는 부분에서도 3D 애니메이션을 꺾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뒤집어보면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먼저 2D와 3D는 단순한 기술적 차이라는 게 입증된 셈이다. 인간이 2D 애니메이션이라는 이유로 더 쉽게 감응한다면 그건 그거대로 슬픈 일이다. 결국 사람을 감동시키는 데 겨우 시각적인 요소로 충분했다는 것이니. 오히려 3D 애니메이션의 승리는 정성을 기울이고, 하고 싶은 말을 하되,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파악하고, 잘 만들면, 기술이야 어떻든 타인의 마음을 잡아끌 수 있다는 걸 보여준 것이다. 이 말은 동시에 2D 애니메이션의 시대가 끝나지 않았다는 말도 된다. 2D 애니메이션도 픽사가 했던 것과 같은 것을 하면 된다. 정성을 기울이고, 하고 싶은 말을 하되,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파악하고, 잘 만들기. 이런 일을 하는데 2D라는 조건은 불리하지 않다. 오히려 실제 3차원 세계와 전혀 다른 2차원이라는 건, 이야기 외에도 시각적으로도 여러가지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3D 애니메이션으로는 어떤 짓을 해도 평면적인 느낌을 주기가 힘든데, 2차원 화면에서는 가만히만 있어도 평면이 되고 이질적인 느낌을 준다. 현재 일본에서 이걸 유일하게 하고 있는 감독은 바로 <늑대아이>의 감독, 호소다 마모루다. 전작인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좋은 청춘 드라마였고, <썸머워즈>도 괜찮은 오락물이었지만, <늑대 아이>는 영상의 깔끔함과 이야기의 깊이가 다르다.


  <늑대아이>는 아름다운 장면들로 가득찬 애니메이션이다. 영화를 본지 꽤 된 지금에도 눈에 선한 장면들이 몇몇 있다. 하나의 '그이'가 그녀 앞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장면, 하나와 아이들이 깔깔 웃으며 눈밭에서 구르는 장면, 후반부의 폭풍우치는 교정, 그리고 결국 늑대로 살아가기로 결심한 아메가 당찬 뜀박질로 산을 타는 장면까지. 호소다 마모루 감독은 바람의 느낌을 살리고 싶었다고 한다. 그 흔적이 영화 곳곳에서 보인다. 흔들리는 갈대, 머리카락, 나뭇가지, 물결 등등. 정적인 풍경도 스크린 위에 그려진 그림 이상의 인상을 남긴다. 이야기에도 별 헛점이 없고, 많은 관람객들이 무난하게 '어머니의 사랑'이라는 메세지를 받아들였다. 애니메이션 팬이 아닌 가족관객들도 많이 왔고, 일본에서는 900만 명 이상의 관객들이 모였다고 한다. 다 아는 걸 왜 또 말하냐, 라는 반응이 별로 없는 걸 보면 확실히 깔끔하게 잘 만든 모양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은 부분은 하나가 처음 밭농사를 배우는 부분이었다. 평생 도시에서 살던 여자가 저렇게 힘든 농사를 어떻게 혼자서 하냐, 그리고 대체 왜 하나는 늙지를 않는가 피부가 스테인리스강인가, 하는 지적은 일단 영화의 진행을 위해 제껴두자. 그러면 감독의 통찰이 제 모습을 드러낸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보면, 하나가 밭을 갈고 있는데, 농사를 가르쳐주는 니라사키 할아버지가 시비를 건다. 밭을 더 넓게 갈라고. 그러자 착한 하나는 웃으면서 "괜찮습니다. 저희 식구 셋만 먹을 건데요." 답하지만 할아버지는 그냥 갈라고 일갈하고, 하나는 기가 눌려 따른다. 알고보니 이게 나라사키의 배려였다. 수확이 끝나고 남은 작물을 감사한 이웃들에게 갔다주니, 젊은 여자가 고생한다며 더 큰 걸로 돌려주는 것이다. 이게 바로 농촌에서 사는 법이다. 품앗이, 두레, 계 등등...


  하나가 농촌의 삶을 몰랐던 것도 맞지만, 하나가 계속 도시에 남아서 취직을 했더라면 사실 이런 걸 알 필요도 없다. 아파트에서는 월급봉투를 타서 옆집 사람에게 준다고 하여도 더 큰 월급봉투로 돌아오는 것도 아니다. 도시사회에서 은행 외의 장소에 월급봉투를 맡기는 것은 위험한 행동이다. 반면 농촌에서는 작물을 건네주면 반드시 무언가 돌아온다. 도리어 돌려주지 않으면 농촌에서 살아남기 어렵다. 물론 노인들 입장에서 젊은 처자가 고생하는 게 안타깝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누가 더 착하거나 정이 많거나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은 환경의 영향력을 결코 떨쳐낼 수 없다. 대개는 환경에 맞는 생존법을 따라한다. 하나도 작물을 더 큰 은혜로 돌려받는 순간 이 점을 깨닫는다.


  하나는 아이들이 삶을 선택할 권한을 주기 위해 스스로 농촌으로 옮겼고, 어쩔 수 없이 적응을 해야 했지만, 다행히도 그 삶이 본인에게 맞고 행복했다. 아이들인 아메와 유키의 경우는 굉장히 다르다. 아메와 유키에게는 농촌과 도시따위는 비교도 안 되는 거대한 갈림길이 있었다. 인간 아니면 동물. 유키는 인간을 택했고, 그 중에서도 전형적으로 활달한 여자아이가 되는 길을 택했다. 예쁜 옷을 입고, 악세사리를 하고, 남녀 가리지 않고 챙길줄도 알고, 때때로 조신하고. 정말 인간답게 사는데, 현명한 선택이라고 본다. 유키가 보름달이 뜬다고 늑대로 변하는 것도 아니고 조심만 하면 완벽히 인간처럼 살 수 있으니.

 

  다만 아메의 선택은 감독의 의도부터 의문스럽다. 아메는 동네 뒷산을 수호하던 여우의 죽음이 임박하고 장마로 인해 생태계가 파괴되자, 스스로 뒤를 잇기 위해 늑대가 된다. 동네 뒷산의 수호자가 된 것이다. 하나는 당당하게 산으로 향하는, 이제 완전히 늑대가 된 아들의 뒷모습을 보며 응원한다. 그러나 실제 동네뒷산의 생태계는 지브리 애니메이션보다는 내셔널 지오그래픽에 가깝다. 여우가 늑대로 바뀐다고 해서 동네 뒷산의 토끼, 사슴, 뱀 등은 왕정이 무너지지 않았다며 좋아할까? 제 갈길을 택한 아들의 당당한 모습과, 그걸 응원하는 어머니의 담담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감독이 생태계를 조작한 셈이다. 동네 뒷산의 맹주가 된다면, 비록 생물학적 길은 갈렸지만 아들이 의미있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니. 하지만 실제 늑대의 삶은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생태계의 수호자하고는 굉장히 거리가 먼데, 만약 작품이 생태계를 제대로 묘사했다면, 그래서 아들이 다른 짐승을 잡아먹고 본인이 잡아먹힐 것 같으면 필사적으로 도망쳐야 되는 삶을 살겠다고 하여도, 하나는 엄마라는 이름으로 응원할 수 있을까?


  몇 가지 의문점이 남긴 하지만 늑대아이는 보기 드물 정도로 좋은 애니메이션이다. 헛점이 별로 없는 성실한 이야기, 작화도 안정적인 미려한 영상, 배우들의 좋은 연기. 그러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보고 감동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호소다 마모루 감독은 앞으로 <늑대아이>보다 더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전작까지는 이야기가 '엣지'가 있었다면, 이제 그는 깊은 이야기까지 할 수 있게된 것이다. 흥행감독이 하고싶은 말까지 제대로 할 수 있는 경우는 본인의 문제든 외부의 영향이든 무척 드문데, 호소다 마모루는 <늑대아이>를 기점으로 눈치 볼 것 없이 하고 싶은 얘기만 해도 성공적인 감독이 된 것이다.

Posted by 시니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