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툰을 보다보니 옛날이야기가 생각났다. 삼국지보다도 수백 년 더 앞선 이야기다. 중국 전국시대 진나라에 백기라는 장군이 있었다. 백기는 중국사의 수많은 무장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명장인데, 원체 사람 목숨이 벌레 목숨보다 못한 시대이니, 그 시대에 명장이라 함은 사람을 많이 죽였다는 얘기다...사실 많이 죽인 정도가 아니다. 백기는 학살자다. 조나라 장평에서 백기가 이끄는 진나라 군은 조괄이 이끄는 조나라의 대군을 보급로를 끊고 말려 죽이는 전술로 대파하고, 결국 조괄이 죽자 조나라의 병사 삼십만 명은 진나라에게 항복한다. 하지만 백기는 진나라 군이 가진 군량으로 포로들을 먹여 살릴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렇다고 포로를 풀어주면 다시 조나라의 전력이 될까봐 두려워한 그는 역사에 길이 남을 엽기적인 결정을 하게 된다. 포로 삼십만 명을 전부 생매장해버린 것이다. 이것 말고도 그는 수십만 명을 더 죽였고, 사서에 따르면 도합 백오십 만을 죽였단다. 적벽대전 때 죽었다는 조조의 백만 군사보다 많다. 중국식 과장을 감안하더라도 어마어마한 수치다.


전장의 도살자 백기도 사람이라 결국 죽는데, 전장에서 전사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모함을 당해 왕으로부터 자살을 명받는다. 고대 중국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사형 중에서는 그나마 곱게 보내주는 형일 것이다. 어쨌든 자결하기 직전에 백기가 유언을 남기는데, 이게 참 인상 깊고 어떻게 보면 황당하다. 그에게 정말 최소한의 윤리의식은 있었던 것이다. “내가 하늘에 무슨 죄가 있어 이렇게 죽어야 하는 것인가? 아니다. 나는 죽어 마땅하다. 장평 전투에서 조나라 병사 수십 만 명을 구덩이에 파묻어 버리지 않았던가?” 세계사에 훌륭한 장군은 많지만 그들 중 그 누구도 죽으면서 저런 종류의 말을 한 적은 없다. (물론 그 대부분이 모함을 받아 죽게 된 상황에 처하지 않긴 했다.) 특히 중국 고대사 무장들은 실패할 때마다 대개 하늘과 운명 탓을 한다. 그런데 수천년 중국사 그 어느 때보다 사람 잘 죽이는 게 미덕이었던 시대에서조차 그 누구보다도 사람을 많이 죽였던 자였던 백기의 입에서 운명론을 부인하면서 진솔한 반성이 나올 줄이야.


왜 뜬금없이 백기와 윤리의식이냐면...삼국지에서 유일하게 적군을 죽였다고 반성하는 인물이 만화의 주인공인 제갈량이기 때문이다. 그는 호로곡에서 올돌골이 이끄는 등갑군 오만 명을 태워 죽이는데, 그 광경을 보면서 이렇게 끔찍한 짓을 저질렀으니 자신은 제 명에 살지 못할 것이라고 눈물을 흘린다. 물론 연의에만 있는 이야기이니 허구이기는 하다만, 어쨌든 그 누구도 죽은 병사에게 사과하지 않고 그것을 비난하지도 않는 삼국지연의에서, 전반적으로 가볍게 묘사되는 남만원정에서, 하필 주인공격인 제갈량이 이런 태도를 보인다는 게 작품 전체적으로 보면 이질적이다.


삼국지에서 용감하고 능력 좋은 사람은 참 많다. 정말 많다. 이토록 짧은 시기에 이렇게 대단한 인물이 많이 나올 수 있나 싶다. 요즘 사업가들과 정치인들은 끽해야 감옥이지만, 삼국지 인물들은 기본적으로 목숨을 건다. 도매금으로 묶여서 무시당하는 간옹, 손건, 미축만 개별적으로 뜯어봐도 대단한 인물들이다. 언제 망할지 모르는 유비 밑에서 죽을 위기를 수십 번 넘기며 종군한 간옹이 그나마 가장 덜 대단한 사람이다. 객장으로 떠돌던 유비에게 전재산을 투자하고 따라다닌 갑부 미축은 어떻고, 또 그 빈털털이 유비를 위해 몇 번이나 국경을 넘나들며 군벌들과 목숨을 걸고 협상을 벌인 손건도 참 대단하다. 주역급 인물들은 말할 것도 없다. 많은 명장들이 전공을 위해 수만의 병사를 들여 남을 공격하는 것을 보면 징용된 병사들의 목숨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 같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자신들이 목숨을 안 거는 것도 아니다. 그중에서도 유별나게 튀는 인물이 있다. 수만의 백성을 끌고 후퇴하느라 스스로도 죽을 뻔한 유비가 백성을 아끼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백기와 반대로 너무 많은 포로를 먹여 살리는 바람에 위기에 처한 관우가 악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힘들 것이다. 그런데 저 뛰어난 인물들이 뭘 위해 저렇게 목숨을 걸고 활약했는지는 정말 모르겠다. 전쟁을 종식시켜 평화를 찾겠다면 차라리 다들 평화 합의를 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천하통일이라는 대의 때문일 것일까? 아니면 대의라는 이름의 상승욕구였을까? 주군에 대한 충성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지금 우리의 시점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의식구조가 있었던 것일까?


중국고전이나 철학서 같은 건 거의 다 처세술과 그 중에서도 리더십의 관점으로 읽히고, 삼국지도 그런 경향이 큰데, 특히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들이 중국 얘기하면 정말 이런 관점으로만 얘기한다. 난세의 헐겁디 헐거운 윤리 기준으로도 비판을 많이 받은 조조를 리더로서 재평가해야 한다는 흐름도 저런 관점에 힘입은 것이다. 앞서 나온 백기만 해도 그렇다. 방금 전에 백기를 구글에 쳐봤는데, 깜짝 놀란 게 교훈이라고 적힌 게 백기에게 당한 조괄 같이 책만 파고 실전경험이 없는 사람을 쓰면 안 된다는 글이 거의 다였다. 실제 역사가 아닌 사실을 굳이 껴 넣어서 제갈량에게 반성을 시킨 나관중만한 의식조차 없다.


이 만화가 흥미로운 게 바로 이 지점인데, 유일하게 윤리적인 틈을 보이는 제갈량과, 순욱 곽가 가후와 같은 모사들을 여자로 만들어 그들을 더 난감한 위치에 던져놓았다. 작중에서 책사들이 여자로서 겪는 어려움은 현대사회를 삼국시대로 단순히 치환한 것에 불과하고 대부분은 능글맞게 넘어간다. 오히려 그들이 누군가를 죽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 결정을 할 때가 흥미롭다. 책략 자체는 어차피 삼국지에서 보던 것이라 새로울 것은 없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표출되는 고민들은 새롭다. 가령 과격한 성대결을 지향하는 곽가와 점진적인 성향의 순욱이 맞부딪히는 장면, 강직한 관우와 찍어누르려는 곽가... 같은 건 기존 삼국지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장면들이다.






Posted by 시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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