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돌이 쉽게 이길 거라는 예측은 믿지도 않았다. 그 예측하던 사람들 중에 바둑이랑 인공지능 두 가지를 제대로 다 아는 사람이 대체 몇이나 됐을까? 딥마인드 사람들도 블러핑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자신들도 알파고의 기력을 정확히 모르겠다고 말한 바 있고, 어제 대국과 인터뷰를 보니 이세돌도 인공지능에 대해 거의 몰랐던 눈치였다. 인공지능은 의외의 수에 약할 것이라는 누구나 할 수 있는 발상 정도로 처음에 상대했던 것 같다. 이제는 이세돌이 누구보다 잘 알겠지만.

어쨌든 이세돌이 이기기를 바랐고, 남은 세 판도 어떻게 내리 잡아줬으면 좋겠는데, 아직은 인간이 이겼으면 좋겠다는 이유는 아니었다. 단순히 이세돌이라는 사람에게 호감이 있었서였다.

내가 바둑을 전혀 모르니 그가 돌을 두는 걸 봐도 공격인지 수비인지 해설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알 수도 없지만, 들은 말로는 아무래도 이세돌이 창의적이고 공격적이라고 하니, 원래 그런 사람에게 호감이 가기도 하거니와...사실 반상에서의 스타일만큼이나 거침없는 직업적 행보 때문이었다.

알파고가 자체 훈련에 사용한 기보들이 좋은 기보는 아니라고 한다. 대부분의 기보는 기원에서 저작권을 가지고 있는데, 이 기보들은 저작권을 얻을 수가 없어서 포기했다고 한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기원이 바둑을 창시한 것도 아니고, 기사들의 대결의 결과인 바둑기보의 저작권을 가지고 있다는 게 딱 봐도 불합리해 보인다. 바로 여기에 한국바둑사상 최초로 반기를 든 사람이 이세돌이라고 한다.

당시의 이세돌은 모두가 우러러보는 세계 바둑의 최강자였지만, 막상 반란을 일으키니 그런 위상은 온데간데 없고 철저한 혼자였다. 대중들의 반응이야 평소에 적을 많이 만든 탓도 있긴 있었지만...그래도 동료기사들은 이세돌이 총대 맨 걸 알고 있지 않은가? 도와줘야 하지 않는가? 하지만 이창호는 침묵하고 조훈현은 꾸짖었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제 기능을 해줘야 할 언론이야...예를 들어 바둑 참 좋아하는 신문들은 평소에 바둑기사들 신선처럼 떠받들어도 노동문제가 나오면 본래의 보수적 스타일로 대처하기 마련이다. 어린 노무 새키가!, 이게 아니라면 서로 잘못했다는 양비론으로. 결국 이세돌이 굽히는 모양새로 사태가 마무리된 걸로 알고 있지만, 어쨌든 반상 위에서만큼이나 직업인으로서도 매우 용감한 사람이란 건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용감하고 진취적인 인간이니 기계와 상대하는 인류 대표로서 더욱 적합하다고도 생각한다.

그것과 별개로 알파고도 상당히 흥미로웠다. 누가 이기든 인류의 승리라는 구글 회장 말이 멋있기는 하지만 전혀 동의는 못하겠고...알파고가 대체 무슨 바둑을 둔 건지는 공강과 수업시간 내내 바둑만 봤음에도 전혀 모르겠지만, 해설자들의 리액션을 보니 기존 바둑에서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것은 잘 알겠다. 앞으로 많은 분야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다. 기계가 생각지도 못한 답을 찾아주는 일. 인류의 미래는 그 답을 공유를 하느냐 마느냐에 달리지 않났나 싶다. 어쨌든 이세돌이 사실상 졌다는 소리 들은 이후부터는 맥이 좀 빠지긴 했지만 재밌게 보긴 했다.

(그리고 후배 이세돌이 인류 대표로 기계가 맞짱을 뜨고 있는 이 시점에 선배 조훈현이 모 당 비례 공천신청 했다는 소식 들으니 기분이 묘하다)

Posted by 시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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