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케일이 1973년 발표한 앨범인 Paris 1919는 록 음악 역사상 가장 훌륭한 앨범 중 하나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을 하긴 하다만, 실제 위상은 그와 거리가 멀다. 지금도 언급조차 뜨문뜨문 되는 앨범이기 때문에, 몇십 년 더 지나면 구해서 듣는 것조차 힘든 앨범이 되는 게 아닌가 걱정도 된다. 사실 발매 당시나 지금이나 평가가 좋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각종 리뷰를 찾아봐도 찬사만 받았지 악평은 하나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럼에도 이런 미미한 위상으로 밀려난 것은 당시 존 케일의 미미한 대중적 인지도와 판매량 탓도 있겠지만, 그 무엇보다 70년대에 나온 게 가장 큰 문제가 아니었을까 싶다.

Paris 1919는 유럽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변 바로 알아보겠지만, 1919년 파리 강화조약을 일컫는 것이다. 1차대전 종결 이후 패전국의 처우, 식민지 문제, 국제기구 창설 등을 논의하기 위해 승전국들 주도로 열린 회의였다. 결과는 다들 잘 알다시피 승전국들이 독일에게 과도한 추징금을 물림으로써 세계 2차대전의 단초를 제공하였다. 그 외에도 패전국의 식민지는 해체하고 승전국의 식민지는 유지하기로 하였고, 이 때문에 동아줄 잡는 심정으로 왔던 임시정부의 특사들이 소득 없이 돌아갔으며, 국제연맹이라는 있으나 마나한 국제기구가 탄생은 했다. 임시정부의 외교관으로 파견됐던 김규식은 미국의 외교관에게 "일본은 국제연맹이 제어할 것이다."라는 대답을 들었다고 하는데, 알다시피 일본을 제어하지는커녕 방조한 덕에 수천만의 한국인과 죽거나 착취당한 것은 물론이고, 그때 내린 결정의 여파 덕에 20세기를 지나 21세기까지 혼란이 그치질 않는다. 아프리카의 수직선과 수평선으로 그인 국경선, 같은 곳에서 독재자를 죽인 장군들이 다시 독재자가 되는 피의 통치사, 남한과 북한 혹은 한국과 일본, 토끼몰이꾼 이스라엘과 사냥감 팔레스타인, 이슬람국가와 유럽의 난민문제 등. 모든 것이 합리적으로 통제가능하다고 믿었던 당시 유럽의 지도자들이 이렇게 한 치 앞도 너무 멀어서 못 보는 인간들이었다.

"끔찍한 일을 가장 멋진 방식으로 다뤄보자."라는 게 존 케일이 이 음반을 만들면서 세운 목표였다고 한다. 끔찍한 일이야 당연히 70년대에 지금보다 더 생생하게 여파를 느낄 수 있었던 파리 강화조약이다. 그렇다면 멋진 방식이란 무엇이었을까? 존 케일의 생각은 피아노와오케스트라 편곡이었다. 사실 식상한 발상이기는 하다. 유럽 클래식 음악의 유구한 전통이고 대중음악에도 도입된 지 꽤 되었다. 하지만 이게 존 케일의 발상이라는 점은 특이하다. 존 케일은 록 음악계에서 정말 보기 드문 비올리스트였고 클래식 교육까지 받은 뮤지션이었지만, 이 앨범 이전에도 이후에도 오케스트라 편곡을 사용한 적은 없다시피 하였다. 벨벳 언더그라운드에서 활동하던 시절 만들었던 Heroin 같은 곡이 존 케일이 기존에 현악을 록음악에 사용하는 방식이었다. 막상 이 앨범에서도 오케스트라 편곡이 전면에 나오는 곡은 동명의 타이틀곡인 Paris 1919 한 곡 뿐이다. 아마 이게 가장 끔찍한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오케스트라 편곡 자체도 60년대의 비틀즈나 비치 보이즈의 방식하고는 꽤 다르다. 벨벳 언더그라운드가 비틀즈를 경멸하고 다른 길을 갔듯이, 벨벳 언더그라운드를 나온 존 케일도 여전히 비틀즈와는 다른 길을 걷고 있던 것이다. 마치 미니멀리즘 음악에서 그러듯이 바이올린 파트를 드론으로 활용하고(마치 Heroin에서 비올라가 그러했듯이!) 시시때때로 첼로가 웅장한 존재감을 내세우며 등장한다. 예나 지금이나 록음악에서 현악이 선율을 보조하는 방식으로만, 즉 예쁜 화음 만드는데 사용되는 것과는 딴판이다. 존 케일 본인도 이런 식의 편곡이 마음에 들었는지, 이후의 음반에서 음악을 어떻게 만들든, 라이브에서는 현악으로 재편곡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앨범에서 Paris 1919를 제외하고 직접적으로 양차 대전을 언급하는 곡은 2차대전 독일 병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Half Past France 하나 뿐이다. 하지만 나머지 곡들도 20세기의 유럽 이야기이다. 웨일즈나 안달루시아처럼 직접적으로 지명이 등장하는 곡도 있다. 흥미로운 점은 웨일즈 사람이었던 존 케일이 이 앨범을 프랑스에서는커녕, 유럽하고는 물리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멀던 캘리포니아에 살던 시절 녹음하였다는 것이다. 외부의 시점에서 보기 위한 고의는 아니고, 당시 케일이 캘리포니아에 있던 음반사에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별 도리가 없었다. 케일은 그래서 이 앨범에 유럽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담겨있다고 하였다. 합리성, 오만함, 폭력으로 20세기 세계 역사를 뒤틀어놓은 유럽, 그래도 그리운 고향 유럽이 이 앨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이어지는 두 가지 주제다.

그러니 1970년대에 이런 대기획이 나오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국가간에는 냉전으로 인한 갈등이 첨예했고, 국가 안에서는 전쟁을 치른 세대와 그 이후에 태어난 젊은 세대 간의 갈등이 폭발하기 시작했던 게 1970년대였다. 하지만 바로 그때문에 이 앨범이 세대를 대표하는 음악이 될 수 없었기도 하였다. 1970년대는 대중음악계의 가장 찬란한 시기였다. 워낙 날고 기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그때를 대표하는 명반이라 함은, 보통 음악적으로 혁신적이며, 비주얼적으로 전위적이며, 내적으로 깊고, 대중들의 뜨거운 반응까지 이끌어내고, 그중에서도 젊은이들의 마음에 불을 지르는, 이 어려운 조건들을 모두 만족시키는 앨범을을 일컫는다. 당장 같은 해 발매된 앨범이 핑크 플로이드의 다크 사이드 오브 더 문, 친구였던 루 리드의 베를린, 데이빗 보위의 알라딘 세인 같은 음반들이다. 이 와중에 수트를 차려입고 피아노를 연주하던 존 케일과 세기말의 독일어권 소설 같았던 Paris 1919가 시대를 대표할 수는 없었다.

아쉬운 일이지만 나는 Paris 1919가 그저 시대를 못 탔을뿐, 앨범도 곡도 듣기도 편하고 지금까지도 스타일이나 수준이나 비슷한 경지의 곡이 별로 없을 정도로 좋은 음악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들을 때마다 학교에서 배웠던 아우스터리츠 같은 소설도 생각나고. 똑같이 웨일즈도 나오고 유럽사도 나오고. 어쨌든 이런 음악이 잊히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구구절절 글도 쓴 것이다. 혹시 듣다가 곡이 좋다 싶으면, 다른 사람을이 좋은 노래 뭐 있냐고 물어볼 때 이 곡 이름을 대주면 참 좋겠다.



Posted by 시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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