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P.

라디오 위의 텔레비전 2021. 9. 17. 00:49

 

수년 전 웹툰으로 나왔을 때 유료결제 하면서 챙겨봤다. 언젠간 영상화가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고, 나 말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예상했었고, 실제로 그렇게 됐다. 웹툰도 참 답답했는데, 드라마는 답답한 것을 넘어 독하다. 영화든 드라마든 한국의 영상 제작자들이 가장 잘 하는 종류의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의 짙은 어둠 속을 직시하고 약간의 코메디를 담아 장르적으로 풀어내는 작업 말이다. 당연히 사회에 짙은 어둠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내가 군생활 할 땐 10만원 정도를 받았다. 나는 헌병이어서 주말근무를 뛰었고 특급 격오지에 있단 이유로 1~2만원 정도 더 받은 것 같다. 내가 2011년에 입대했으니, 옛날 일은 맞지만 그렇다고 아주 옛날 일은 아니다. 문제는 내가 군생활을 한 특급 격오지가 울릉도였다는 것이다. 휴가를 나가려면 배를 타야 했다. 부대에서 뱃값을 주긴 했는데, 연가가 껴야 뱃값을 줬던가, 외박을 껴야 뱃값을 줬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하여간 둘 중 하나였다. 어쨌든 뱃값을 안줄 때가 있었다. 집이 수원이었으니 가는데 10만원, 오는데 10만원. 가끔은 휴가를 나가야 하는데 교통비도 못 대서 집에서 용돈을 받아야 할 때가 있었다.

 

이 얘기를 하면 다들 대한민국 군대가 너무한다 했지만, 이게 내가 군대에서 겪은 각종 문제 중에 가장 사소한 것이었고, 사실 아무것도 아닌 문제였다. 그냥 좀 불편한 문제였을 뿐이다. 택배를 샀는데 잘못 배송이 가든가 택시를 탔는데 이상한 길로 돌아간다든가 하는, 그냥 불편하고 짜증나는 일 말이다. 나머지는 불편한 수준의 문제가 아니었고, 너무나 말하고 싶으면서도 절대 말하고 싶지 않다.

 

되게 찌질한 심정 정도는 풀 수 있다. 휴가 나오면 듣는 흔한 말이 있다. 네가 나라 지켜줘서 발 뻗고 잔다. 그말 들으면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을까. 그말마저 화가 났다. 내가 거기서 당하는 게 네가 발 뻗고 자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냐고. 전역을 하니 가족들이 말했다. 군대 건강히 잘 갔다왔구나. 감동의 순간이어야 했는데 그말마저 화가 났다. 건강히 온 적이 없다. 그때 총을 매던 어깨가 지난 8년 365일 24시간 단 1초의 예외도 없이 뻐근하다. 잘 갔다온 적도 없다. 그냥 갔다가 2년이 지나서 집에 왔다. 아빠가 남자답게 "필승" 한 번 해보라고 했다. 난 거절했다.

 

요 몇 년 복무개월수가 짧아지고 월급이 오르고 핸드폰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나라를 지키는 군인들은 대우를 받아야 하고 세상은 나아져야 하고 핸드폰을 쓰면 부조리가 줄어드니 합리적으로 이성적으로 찬성했다. 그게 맞지 세상이 좋아져야지. 말로는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하고 다닌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는 앞으론 아무도 이걸 모르게 된다고? 나는 계속 억울해 하라고? 이런 불만이 한구석에서 내 양심과 이성을 상대로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아귀힘이 제법 쏐다.

대우가 좋아지는 거 다 좋은 일이고 당연히 되어야 일인데, 사실 대우보다는 현역과 군필자들의 근원적인 분노나 억울함은 그와 한 차원이 다른 문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보통 돈으로 대우를 하는 게 맞긴 한데, 징병은 돈의 문제가 아니다. 그건 자유와 선택의 문제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긴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내 20대의 희생이 잊히는 건 아무렇지도 않다. 그런데 그때 느낀 박탈감, 모멸감, 고독함, 분노가 잊히는 건 못 참겠다. 태어났다는 이유로 사는 것처럼 스무살이 됐다는 이유로 자유를 뺏기는데 그에 걸맞는 대우같은 게 세상에 있을까하는 시니컬한 생각이 앞선다. 누가 군대 가서 사람 되어서 나온다고 했던가, 지난 10년간 난 내가 어딘가 한쪽 구석은 망가진 사람이 되어서 나왔다고 생각했다. 군대 건강히 잘 갔다와서 고맙다는 부모님 말에도 화가 날 정도면 어딘가 망가진 게 분명하다고 늘 생각했다.

 

D.P는 훌륭한 사회고발 드라마이면서도 저런 감정의 디테일까지 담아낸 정말 잘 만든 드라마였다. 그걸 잘하는 바람에, 오랜 기간 잊고 있던 트라우마가 되살아났다. 옛날 기억을 한참을 곱씹어보게 되었다. 동시에 묘한 위로도 됐다는 게 참 아이러니하다. 극중 조석봉이 말했다. "인간은 희생 없인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 맞는 말이다.

 

그렇다면 뭐가 위로가 됐다는 것인가...첫번째, 나보다 훨씬 힘든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는 점. "너보다 힘든 사람 많아." 위로가 안 되는 멘트라는 의견도 있지만, 혼자 버텨내야 할 땐 제법 도움이 되는 멘트이기도 하다. 드라마의 사례들이 내가 겪은 것보다 수십배는 끔찍하고, 대부분 실화를 기반으로 한 것 같다. 한두가지가 아니라 정말 많은 사례들을 기반으로.

 

두번째, 이 끔찍한 이야기가 넷플릭스에 길이길이 남을 거라는 점. 대한의 아들들에게는 유독 고개가 뻣뻣한 국방부는 물론, 태양의 후예 같은 건줄 알고 드라마를 시청한 외국인들까지 불쾌하게 느낄 이야기가 오랜 시간 가장 거대한 OTP 플랫폼에 남아서, 대한민국에서 징병이 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증언할 것이다. 지난 세월 고맙다 수고했다 장하다 멋있다 자랑스럽다 뭐했다 저렇다 단 한 마디도 위로가 되는 말이 없었는데, 이 드라마가 사람들을 계속 불편하게 만들 거란 건 너무나도 위로가 된다. 아주 만약에 매우 낮은 확률로 한국 사회의 군대 문제가 해결되더라도, 이 드라마가 남아 있기 때문에 기쁜 마음으로 한국 사회의 진보를 맞이할 수 있을 거 같다. 제작진에게 고맙다..

Posted by 시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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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가 어때서

양동신 지음

사이드웨이 (2020)

 

 

도시계획 및 사회기반시설 건설에 대해 옹호하기 위에 쓰인 책이다. 댐에 관한 꼭지 하나, 지하철에 관한 꼭지 하나, 도로에 관한 꼭지 하나, 아파트에 관한 꼭지 하나, 이런 식으로 특정 시설과 관련된 여러 꼭지로 되어 있다. 일단 재밌게 읽긴 했다. 특히 역사적 사건이나 작가 본인 경험담 중 흥미로운 게 많았다.

주로 개발반대론자들에게 반박하기 위해 쓴 책 같다만, 그들이 굳이 이 책을 찾아 읽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딱히 개발반대론자도 아닌 나 같이 서울 사는 직장인에게도 좀 근거가 약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이 많았다. 나도 서울시에 민간주도로 주택공급이 확충되고 서울시 지하철이 128호선까지 깔렸으면 하는 사람인데 말이다. 하지만 근거로 든 통계들은 문제가 좀 있어보인다. 숫자를 잘 아는 것은 아니다만, 예를 들면 아파트 건축사들이 수익을 별로 못 내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순이익률을 그 근거로 드는 것은 것은 좀 이상하지 않은가. 숫자 자체가 틀린 경우는 없을 것 같은데, 그 숫자를 근거로 드는 게 맞는지는 모를 부분은 꽤 있었다. 책 전반적으로 그렇다.

문제가 하나 더 있다. 전반적인 꼭지의 구성이 "특정 시설이나 구조물의 필요성 -> 예상되는 반박 소개(주로 환경문제) -> 재반박"으로 되어 있는데, 재반박 부분이 특히 약하다. 주로 반박부분에 대해 새로 시행되는 정책으로 해결될 것이라고 반박하는데, 이를 두고 재반박이라 하려면 그러한 정책의 효과나 현실성을 제대로 검토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아니고선 정책홍보물 팜플렛하고 다를 게 없다. 이 책이 논문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쉬운 부분이다.

사회적인 측면을 다루는 태도는 굉장히 아쉽다. 기본적으로 개발된 곳이 생활이 편리하고 녹지비율이 높기 때문에 사회적인 측면에서도 낫다는 논지다. 그런데 내가 평생 주택가나 원룸촌에서 살아왔다. 아파트에서 안 살아봐서 아파트에 대해선 왈가왈부 못 하겠지만, 그래도 주택가가 그렇게까지 불편하다고 느낀 적이 없다. 집 바로 앞에 녹지 비율이 낮은 것은 단점이라 볼 수도 있겠지만 한반도에 산이 몇 개인데 그렇게 산책로가 아쉬울 것도 없고. 마트가 조금 멀어도, 특히 요즘같이 인터넷 배송이 잘 된 시기에는 좀 덜 아쉽고. 또 특히 계획된 신도시에서는 발생하기 어려운 social mix는...이건 사람마다 의견이 많이 다르겠지만 내 입장에선 장점이라 본다.

환경보호론자의 주장을 너무 단순화한다는 생각도 든다. 이건 이 책만의 문제는 아니고 사회 전반에 퍼진 분위기 같다. 사실 환경보호론자들이 상대 진영을 대하는 태도도 마찬가지고. 도시개발에도 우선순위를 두고 다투듯이, 환경보호론의 많은 의제들도 서로 상충하는 관계에 있다. 예를 들면 반핵주의자들은 원자력의 위험성과 핵폐기물처리문제를 지구온난화와 대기질문제보다 중시하는 것인데, 반대파들은 그들이 지구온난화와 대기질문제에 무지한 사람들이라고 상정하고 간다. 이러니 서로 대화가 될리가 없다.

그래도 환경문제의 대안으로서의 인프라 확충을 제시한 꼭지들은 꽤 설득력이 있었다.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어떤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부분 말고, 그 자체가 해결책이라고 주장하는 부분들 말이다. 도시계획하시는 분들이 환경문제를 굉장히 섬세하게 고려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산을 뚫고 지나가는 터널이 산을 돌아가는 도로보다는 소음, 매연문제가 오히려 적기 때문에 야생동물들에게 스트레스를 덜 준다는 주장 말이다. 정말 그런지는 따져봐야겠지만 직관적으로는 와닿았다.

Posted by 시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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