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하다는 착각

마이클 샌델 지음, 함규진 옮김

와이즈베리 (2020)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고 처음 읽는 샌델의 책. 샌델이 대안으로 제시한 방법은 죄다 사고실험에 가까운 것들이었다. 구체성, 현실성 모두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재미는 있지만 인상 깊진 않았다(이 글 처음 쓰고 나서 한참 후에 왓차 리뷰 읽다 알았는데 샌델이 제시한 대학입학 추첨제를 네덜란드에서 정말 하고 있다고 한다 덜덜...).

다만 문제제기 그 자체에는 공감하는 바가 많았다. ‘일의 존엄성’을 회복시키자는 것. 내가 경제학은 잘 모른다. 자본이나 토지가 노동보다 더 많은 가치를 창출하며 사회를 지탱하고 사람들을 더 많이 먹여살린다는 주장이 옳을 지도 모른다. 반대로 노동의 가치가 저평가되었다는 주장이 옳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경제학적으로 어느 주장이 옳든 그르든, 인간의 존엄은 ‘일의 존엄성’이 존중받지 않는 한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이고, 인간의 존엄이 이뤄지지 않는 한 사회는 분노로 조각날 것이라는 게 샌델의 주장이라 읽어도 되겠다. 인간이 존엄하다 하여도 그게 말만으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인간이 일생 대부분을 일을 하면서 보내니, 그 업을 존중하는 일이 곧 인간의 존엄을 실현하는 길이다. 결국 네 업이 하찮다고 하는 건 그 사람이 하찮다고 하는 것이요, 인간이 그런 존재를 부정하는 말을 듣고 어떻게 허허 맞는 말씀이지요 하며 넘길것인가.

 

요즘처럼 노동의 수익성이 떨어진 시대에 어려운 과제이긴 하다. 자본주의 세상에서 임금만큼 그 직업의 가치를 표면적으로 잘 드러내주는 것이 없으니. 그게 안 되면 임금 외 부분이라도 존중해주라는 게 샌델의 말이다. 읽다보니 요 몇 년 불거졌던 공공영역에서의 비정규직 문제가 많이 생각났다. 전부 정규직으로 바꿔줘야 한다, 연봉을 늘려줘야 한다, 동일노동 동일임금과 같은 구체적인 주장을 하려는 건 아니다. 샌델이 능력주의를 비판하면서 시험 합격/불합격이 모든 논의의 중심이 되는 것을 경계하면서, 시험 합불이 그 사람의 노력의 대가만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였다. 우리나라의 공공영역 비정규직 논쟁의 근간도 시험 합격자를 어떻게 대우할 것이니, 샌델의 지적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샌델과 별개로 나도 한 가지 지적을 더 하고 싶다. 채용은 시험 합격의 대가일지 몰라도, 고용이나 임금과 같은 처우는 (원칙적으론) 노동이나 생산성의 대가라는 점이다. 시험결과에 대한 대가를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원칙적으로는 노동의 대가는 노동의 자격이 아닌, 노동의 제공에 대한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오늘날 공무원, 공기업 채용이 단순히 국가기능을 위해 인재를 채용하는 기능보다는 일자리 제공을 통한 선별적 복지제도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다고 본다. 그렇게 본다면 위의 갈등이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긴 하다. 요컨대 요즘 대한민국에서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의 처우개선을 반대한다는 것은, 나의 노력이 복지의 대상이라는 주장으로 볼 여지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서로의 자격을 두고 까내리는 것이 이해는 간다. 다만 논의 과정에서 상대방의 업 자체를 하찮은 것으로 매도하는 것은 첨예한 갈등의 시대가 낳은 참담한 풍경이다. 그런 노가다는 아무나 다 할 수 있다는 식의 말들 말이다. 앞서 적었듯이 인간의 존엄성을 부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말들이다. 논의과정, 아니 서로를 물어뜯게 되는 작금의 갈등과정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타인의 업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은 잊지 않길 바란다.

Posted by 시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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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포로원정대

펠리페 베누치 지음, 윤석영 옮김

박하 (2015)

 

 

인터넷에서 돌아다니는 짤을 보고 흥미가 생겨 책까지 읽게 됐다. 책소개만 읽어도 훌륭한 책이란 게 뻔했다. 2차대전 기간 아프리카에서 이탈리아인 포로 셋이 포로수용소를 탈출해서 온갖 위험을 무릎쓰고 케냐산 정상 근처까지 갔다가 다시 수용소로 돌아오는 이야기가 훌륭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인터넷 짤도 그렇고 번역된 타이틀명인 '미친 포로원정대'도 그렇고, 세 명의 이탈리아인들이 얼마나 황당한 인간들인지에 중점을 두는데, 당연하지만 이들이 단순히 미친 사람들은 아니었다. 특히 그 모험심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포로생활이 준 자유에 대한 갈망에서 나왔다는 것을 고려하면 더욱 그러하였다.

포로수용소를 탈출해서 험난한 산 정상에 오른 후에 하필 수용소로 돌아오는 선택을 했기 때문에, 이들의 여정이 유독 똘끼넘치는 이탈리아인들이 마실이라도 갔다온 것처럼 묘사되는데, 엄밀히 말하자면 자유에 대한 갈망이 넘치는 인간들이 현실적인 한계를 고려한 모험을 한 것이라고 봐야한다.

이들이라고 완전한 자유를 바라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전쟁이 언제 끝날지는 도저히 모르겠고(실제로 케냐산 등반 이후에도 4년 정도 포로생활을 더 하였다), 남의 대륙에서 포로로 억류된 이방인이 영국군의 추격을  완벽히 뿌리치고 탈출할 자신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자유를 느낄 수 있는, 즉 타인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신의 운명을 자신이 지배한다는 그 단순한 감각을 잠시나마 느끼기 위한 그들의 현실적인 한계가 포로수용소 창살을 통해 바라볼 수 있었던 케냐산 정상이었던 것이다. 케냐산 정상을 한계점으로 삼은 것도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충분히 미친 짓이었던 것이고. 요컨대 '미친 포로원정대'는 일탈을 즐기는 괴짜들이 아니라, 자유를 맛보기 위해 한계에 도전하는 위대한 모험가들이었던 것이다.

책을 읽어보니 내용도 내용이지만 글솜씨에 감탄했다. 계획을 짜고 등반과정에서도 선봉에 섰던 펠리체 베누치가 책을 썼다. 종종 문학을 인용하는 것만 봐도 독서량도 상당하고 글을 많이 써본 사람 같다. 문장의 호흡을 길게 가져가다가 갑자기 짧게 끊는다든가, 단순히 시간순으로 사건을 나열하는 게 아니라 종종 서순을 바꿔 더 흥미롭게 구성하는 식으로 이야기를 쫀득하게 써낼 줄 안다. 위대한 작가들의 필수소양인 뛰어난 유머감각도 갖추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훌륭한 건 삶의 고통을 대하는 그의 태도이다. 이 기막힌 모험담은 이 책의 대부분이면서, 동시에 6년의 포로수용소 생활이라는 나락과 공허의 일부분일 뿐이다. 반대로, 수용소에서 보낸 나머지 고통스러운 시간은 이 책의 일부이지만, 포로수용소 생활의 대부분이다. 그런데도 이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펠리체는 정면으로 응시하고 어떻게든 이 위대한 모험담과 엮어내어 삶의 한 부분으로, 너무나도 고통스러웠지만 어쨌든 인간 펠리체를 발전하게 만든 요소로서 구성하려고 노력한다. 정말이지 곧고 강인한 인간의 모습이다.

Posted by 시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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