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가 베를린 알렉산더광장 역에 도착했다. 배낭을 들쳐메고 역 밖으로 나왔다. 쥐색 하늘이 굵은 빗방울을 뚝뚝 짜냈다. 광장은 안개처럼 흐리다. 건물은 시멘트색, 사람들 옷은 회색, 표정은 흰색. 나는 신호등 앞에 섰다. 개나리색 트램이 다가온다. 사람들이 멈춰선다. 개나리색 트램이 지나간다. 사람들이 움직인다. 나도 섞여서 움직인다. 길을 건너니 크리스마스 마켓이 한창이다. 다들 아직 일하고 있을 시간대여서인지, 아니만 날이 궂은 탓인지 아주 한산하다. 나도 아무일 없다는 듯이 지나쳤다. 곧 또 다른 크리스마스 마켓이 나왔다. 안으로 들어가보니, 기실 도심 속 놀이공원이었다. 롤러코스터나 회전목마 같은 놀이기구가 좁은 광장을 빽빽히 메꿨다. 싸구려 조명이 곳곳에서 번들거렸다. 여자아이가 깔깔 웃으면서 내 앞을 지나갔다. 이어서 남자아이가 기를 쓰고 여자아이를 쫓아갔다. 아이들이 길이 패인 곳을 밟는 바람에 물이 튀어 바지 밑단이 젖었다. 비는 여전히 그치지 않는다. 관람차는 무심히 돌아간다. 놀이기구를 탄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른다. 노점에서 커리부어스트를 하나 사서 먹었다. 케첩이 텁텁했다. 목이 마르고 비는 계속 내렸다. 나는 마켓을 나와 강쪽으로 항했다.
강을 따라 동쪽으로 걸었다. 여느 유럽 도시와 다르게 옛것은 없다. 오래된 도시인 것은 맞다. 그러나 오래된 것이 없을 뿐. 베를린은 이차 대전 때 소련 군에 의해 파괴된 후 모든 걸 다시 지어야 했다. 그러나 나라가 두 개로 나뉜 데 이어 도시가 반으로 쪼개진 초유의 사태에서, 동독과 서독의 재건 철학은 필히 달랐을 것이다. 이어서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에는 검문소와 사이 공동을 채워넣어야 했다. 이렇게 두 번이나 다른 주체에 의해 새로 지은 베를린, 이곳의 어떤 건물도 고딕 시대처럼 신에 닿겠다는 의지로 가득차 있지도 않고, 바로크 시대처럼 온갖 장식을 붙여 과장스럽지도 않다.
예전에는 아니었을 것이다. 먼 옛날에는 분명 브라쇼프의 독일마을마냥 색색의 벽에 색색의 뾰족한 지붕을 얹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기록화로 남아있는 19세기 베를린은 부쿠레슈티의 구시가지와 비슷하다는 느낌도 준다. 지금은 이 모든 건물들이 오와 열을 맞춰 서 있는 성냥갑 같은 건물들로 대체되었다. 그러나 저 건물들이 언제 지은 건물이라고 단정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100년 전에 지어진 건물 같진 않다. 30년 전에 지은 건물이라 하여도 그럴듯해 보이고, 5년 전에 지은 건물이라 하여도 수긍이 간다. 이 거리는 언제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외양을 보고 추측할 수 있는 다른 유럽 도시와는 딴판이다. 옛것을 도저히 용납하지 못하는 우리의 서울과도 다르다. 언제 찾아가든 베를린은 언제나 덤덤한 표정으로, 동시에 나이를 알 수 없는 얼굴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강을 따라 동독으로 향하는 길에는 베를린 장벽이 펼쳐져있다. 한 때는 살벌한 대치의 현장이었다. 그러나 벽이 무너진지 25년, 현재 벽은 여백 하나 없이 꼼꼼하게 그림으로 채워져 있다. 그 분량이야 말할 것도 없고, 분노와 열망을 각각 씨실과 날실로 삼아 그린 벽화들은 단 하나도 여운을 주지 않는 게 없다. 하물며 거기 적힌 글귀들은 어떠랴. 스스로 납득할만한 한 문장을 고르기 전까지 수많은 문장을 걸렀을 것이다. "1963년, 동독이 탈주자들을 막기 위하여 벽을 세우다. 1989년, 탈주자들이 벽을 무너트리다. 도주는 지배를 무너트리는 강력한 방법이다. 산 자와 죽은 자에게 경의를"
벽을 따라 걷는 사이 많은 이들이 스쳐 지나간다. 그들은 관광객일 수도 있고 주민일 수도 있다. 구분을 할 수 없었다. 독일어를 말하는 관광객이 있고, 중국어로 떠드는 주민이 있다. 연신 셔터를 눌러대는 사람이 있고, 주머니에 손을 꼽고 무심히 지나가는 사람이 있다. 무리를 지어 다니는 사람들도 있고, 나처럼 혼자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이들도 이 벽을 단 한 번도 보지 않고 지나가는 사람은 없었다.
벽이 끝났다. 동독 시절에 지어진 건물에 새로운 이들이 들어왔다. 이쪽이 비교적 집세와 물가가 저렴하다고 한다. 그림을 하는 사람,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모였다. 그들은 이 일대를 베를린 장벽의 연장선처럼 만들었다. 딱딱한 동독의 건물벽에 낙서를 했다. 자유와 평화 사랑을 주창했다. 이런 가치를 용납 못하는 사람을 증오했다. 네오나치 출입금지라고 스프레이로 찍찍 그려놓은 가게가 많았다. 하지만 뒤집어보면 네오나치가 그곳에서 존재감을 표출하고 다니기 때문에 저런 걸 굳이 공개적으로 표출하는 것일 게다. 역 근처에는 노숙자들이 몰려있었다. 남녀노소, 다민족 노숙자였다. 바로 옆 노점에서는 소세지를 팔았다. 메뉴판을 보고 있는 내게 후드티를 쓴 남자가 슬쩍 다가오더니 낮고 짙은 목소리로 물었다. 마리화나? 내가 대답했다. 나인, 당케. 그는 아무 말 없이 다른 사람 쪽으로 갔다.
숙소에 도착했다. 얼굴에 문신과 피어싱을 한 남자가 리셉션에 앉아있었다. 그가 체크인을 해주었다. 방에는 나 혼자였다. 목이 말랐다. 로비로 나와 맥주를 주문했다. 어떤 맥주 드릴까요? 그냥 독일 맥주 아무거나요. 여기 있는 거 다 독일 맥주에요. 같이 웃었다. 내가 물었다. 뭐 추천해 주실래요? 그러자 그가 냉장고에서 한 병 꺼냈다. 이거 드세요. 베를린의 시민단체가 만드는 맥주인데, 수익을 지역 발전에 사용하거든요. 그걸 달라고 했다. 목넘김이 쎈 라거였다. 좀 있다가 전철을 타고 알렉산더광장 역으로 돌아갔다. 여전히 온통 회색빛이었다. 뒤를 돌아보니 유명한 TV 송신탑이 있었다. 가까히 다가갔다. 붉은 벽돌을 쌓아 돌린 시청 건물이 보였다. 앞에는 또다른 광장이었다. 이곳에서도 크리스마스 마켓은 열리고 있었고, 한 가운데에서는 또 관람차가 돌아가고 있었다. 바로 앞은 빙판이었다. 아이들이 스케이트를 타고 있었다. 어른들은 사진을 찍었다. 나는 시장을 가로질러 갔다. 노란 전구길이 끝나자 어두운 사거리가 나타났다. 거기서도 사람들은 무표정하게, 아니면 목도리로 표정을 칭칭 감은 채 신호를 기다렸다. 파란 신호가 들어왔다. 암펠만이 걸어간다. 사람들이 따라간다. 여기는 베를린이다.
2014/1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