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늦게 자그레브에 도착했다. 목요일이었다. 역시나 비가 내렸다. 이젠 해를 보는 것도 바라지 않고, 그냥 비나 안 내렸으면 좋겠다. 역하고 호스텔이 가까우니 망정이지 좀 멀었으면 매우 괴로웠을 것이다. 호스텔 가는 길에 쓱 둘러본 자그레브는...동유럽 수도 중에서도 유달리 활기가 없는 편이었다. 역도 조그마하고, 거리도 어둡고, 벽에는 그라피티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수준낮은 낙서. 우중충한 표정의 꺽다리들이 회색 혹은 검은색 자켓을 걸치고 좁은 골목을 누볐다.

다음날 시내 관광을 하진 않고, 새벽에 일어나서 버스를 타고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으로 향했다. 부다 민박에서 만난 형이랑 크로아티아에서 일정이 겹치길래, 같이 플리트비체를 돌기로 약속했다. 형이 묵는 숙소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자그레브에서 출발한 건 다섯시 반, 플리트비체에 도착한 건 8시 갓 넘어서. 버스는 1번 출구에 내려줬는데, 형의 숙소는 2번 출구 근방에 있단다. GPS만 믿고 무작정 도로변을 따라 2번 출구로 향했다. 중간에 너무 멀다 싶어서 소심하게 히치하이킹에 도전했으나 승용차 승합차 트럭 등 차종을 가리지 않고 쌩쌩 지나갔다. 나는 다시 걸었다. 종종 뛰었다. 좌측에는 차도, 우측에는 절벽...절벽 아래에는 물안개가 짙게 깔려있었고, 산 봉우리 몇 개가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었다. 정말 다행인 건....해가 떴다. 아주 맑게 개인 날은 아니었지만, 사진은 그럭저럭 잘 나올만한 날씨였다.

도착한 건 9시. 숙소에서 형이 나를 맞았다. 무려 아파트 한 채였는데 싸게 구했단다. 요리도 할 수 있고 빨래도 할 수 있고. 역시 뭐든 찾다보면 나오는가보다. 준비를 마치고(형은 카메라만 두 대를 챙겼다 ㄷㄷ) 아파트를 나섰다. 두브로브니크에는 여러 코스가 있는데, 그 중 K코스라고 그 넓은 공원 전체를 도는 코스가 있다. 그걸 같이 하잔다. 나는 별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알았다고 했다. 하지만 만약 나 혼자 왔더라면 공원 전체를 돌겠다는 생각은 안 했을 거다.

공원 매표소에서 한국인 단체 관광객을 만났는데, 별로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쟤들은 중국인인가보다, 라고 우릭가 바로 옆을 지나가는데 아저씨 하나가 말했다. 딱히 인종차별적인 뉘앙스가 있던 것도 아닌데 괜히 기분이 상했는데 마침 형이 아닌데요, 라고 대꾸했다. 그러자 아저씨가 내 쪽을 가리키며 저 친군 중국인처럼 생겼는데...라고 말하는 걸 듣자니 울화가 치민다. 여행 와서 30일 동안 인종 혹은 국적 이야기가지고 화가 난 적이 처음인데, 그 처음이 한국인 아저씨 때문일 것이라곤 생각도 못했다.

그것과 별개로 공원 안에 한국인이 많긴 했다. 단체만 최소 서너그룹 본 것 같다. 그 다음으로 많았던 건 중국인. 그 다음은 일본인. 도리어 서양인은 거의 못 봤다. 인구구성비만 놓고 보면 명동하고 별반 차이가 없었다. 거기도 한국인이 제일 많고 중국인 일본인이 그 다음 아닌가. 그래서 나는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에게 새로운 별명을 지어줬다. 크로아티아의 명동이라고...

여정에 대해서 중간까지는 별로 할 말은 없다. 내가 원래 자연경관에 굉장히 무덤덤한 편인데, 살면서 풀이 자라고 봉우리가 솟고 물이 흐르고 돌이 깎이는 따위의 풍경에 감탄한 몇 안 되는 순간 중 하나였다. 또 공원이 워낙 넓다보니 풍경이 다채롭다 어느데는 햇볕이 잘 들고 어디는 깜깜하고, 또 어디는 폭포가 요동치고 어디는 바닥 깊이 조용하고...자라는 풀들도 부분부분마다 다른 것 같다. 이미 페이스북에 사진을 업로드했는데, 그걸 보는 편이 나을 것이다. 업로드하니 해상도가 조금 떨어지는 게 아쉽지만...나 같이 평소에 사진 전혀 안 찍는 인간이 막 찍어도 어느 정도 그림이 나온다.

플리트비체에서 제일 유명한 폭포를 보고 가파른 돌계단을 올라가는데 범죄현장에다 쳐놓는 것과 유사한 노란 테이프가 길을 막고 있었다. 아마 들어가지 말라는 것 같은데...우리는 나중에 크로아티아말 몰라서 들어갔다고 변명하기로 결정하고 테이프를 넘었다. 그야말로 절경이 펼쳐졌다. 끊임없이 끓어오르는 물안개, 안개보다 높이 솟은 산봉우리...폭포가 없는 쪽 절벽 아래로 고개를 내밀고 바라보면, 평온한 호수가 이 압도적인 풍경을 거울처럼 비치고 있었다. 그 다음부턴 줄곧 내리막이다보니 쉬웠다. 다 내려오니 마치 해변 같은 호숫가가 있었고, 일본인 단체 관광객이 호수 반대편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매점에서 간식을 사먹었다. 치즈버거를 시키면 햄버거와 슬라이스 치즈를 따로 주는....뭐 그런 곳이었다.

식사를 해치우고...거리상으로 봤을 때 대충 2/3 정도 돌았으니 이제 좀만 돌면 되겠다, 힘내자! 하고 50m 정도 가니 길이 끊겨있었다. 원래는 있던 길 같으나 물이 불면서 사라진 것 같았다. 형 그냥 돌아가서 배 타죠...라는 말이 입 안에서 나올랑말랑 하는데, 형이 먼저 말했다. 산 타자. 정말 길이 침수된 거면, 좀만 타고 내려오면 다시 길이 있을 거야. 뭐...그러죠. 한참 헉헉대며 올라가서 가파른 낙엽길을 사근사근 내려오니 길이 있기는 했다. 고생길이었다.


정말 사람의 흔적이 뜸한 곳이었다. 일단 우리가 지나가는 동안에는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 길 자체도 관리가 안 되는 것 같았다. 질척이는 길은 기본이요, 중간중간 거대한 나무가 쓰러져서 길을 막는 건 예사고, 표지판은 다 박살났으며, 길이 끊겨서 다시 산을 타야 할 때도 많았다. 낙엽은 또 어찌나 많이 내렸는지 골짜기 전체가 붉은 수수밭 같았다. 밟고 지나갈라 하면 발목까지 푹푹 빠졌다. 압권은 골짜기마다 제 무게를 못 이기고 뿌리까지 뽑혀 쓰러진 고목들이었다. 한 두 그루가 아니었다. 숲이 거꾸로 자라는 것만 같은 초현실적인 풍경이었다.

정말 아찔했던 적이 한 번 있었다. 이번에도 길이 없어서 또 산을 타는데, 바로 뒤로 통나무가 후두둑 굴러오더니 절벽 밑으로 떨어졌다. 5초만 늦었으면 같이 굴러갔을 거다. 그걸 보고 형이 이야...하면서 감탄을 했다. 나는 형에게 말했다. 형 빨리 나가요...잘못하면 우리 죽어요 ㅜㅜ 어쨌든 국립공원에서 죽을 운명은 아니었는지 무사히 빠져나왔다. 그곳을 벗어나니 다시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곳도 아름다웠더. 폭포들이 호수와 호수를 잇고 있었다. 좀 여유롭게 걷다 보니 코스가 끝났다. 5시간 반 걸렸다. 안내문에서 6시간이라고 했으니 얼추 비슷하다.

형하고 라면을 끓여먹고 헤어졌다. 깜깜한 도로에서 버스 정류장을 찾으려니 그것도 난감한 일이었는데, 반대편에서 오던 다른 배낭여행객이 쭉 따라가면 나온다고 알려주었다. 버스정류장 같은 곳에 도착하니 한국인 신혼부부가 나처럼 자그레브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단다. 같이 버스를 타고 왔다. 자그레브 정류장에 돌아오니 7시였다. 정신 없지만 알찬 하루였다. 아직도 젖어 있는 신발을 신고 터덜터덜 숙소로 걸어갔다. 내일은 정말 신발을 사야겠다고 결심했다.

전날밤엔 4인실을 혼자 썼는데....9시쯤 되니 사람이 하나 새로 들어왔다. 살짝 아쉬운 마음을 숨기고 통성명하고 대화를 나눴다. 이름은 댄, 영국인이고, 어학연수 온 학생들을 가르친단다. 여행 5주차에 3주 남았다고...그가 나보고 내일 뭐 할 거냐고 물었다. 그냥 자그레브 시내 돌건데요. 그러자 그가 내게 다시 물었다. 나도 별 계획이 없는데 같이 다녀도 돼요? 그냥 걸어다니는 거 좋아하니까 아무데나 가도 상관 없어요. 뭐...그래요 같이 다녀요.

저 대화가 4일전인데 여태 같이 다니고 있다.


2014/12/03

Posted by 시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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