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가자는 생각은 군대에서부터 했다. 그러니까 3년은 넘은 생각이다. 초소의 밤은 길고 지루해서, 그런 생각들이 답답한 마음에 위로가 된다. 아는 것도 쥐뿔 없으면서 코스도 나름 짜고, 상상속에선 짧은 로맨스도 있고 특이한 인연도 있고 그렇다. 런던에서 시작해서 마지막이 이스탄불 보스포러스 해협이여야 한다는 것도 그때 정했다. 당시에는 이스탄불에 해협이 있다는 것만 알았지 그게 보스포러스라는 이름이 있는 지도 몰랐다. 여행 플랜이라기보단 플롯에 가까웠다. 실체라곤 전역일만큼 멀리 떨어져있던...그럼에도 난 내가 당연히 여행을 갈 거라고 생각했다. 원래 군인들은 말년이 다가올 수록 몸은 사리고 생각은 무모해진다. 나도 그랬다. 텔레비전의 여행 프로들, 라디오의 상담 코너들이 입을 모아 나보고 떠나라고 떠나라고 자꾸 부추겼다. 후임들도 모두 좋은 계획이라 하였다. 나쁜 계획이라고 할 리가 없지 ㅋㅋㅋㅋ 엄마한텐 말 안 했다. 반대할 거 같아서. 결과적으로 내 계획을 아는 모든 이가 나를 지지했다. 전 우주가 내 편이었다. 


하지만 전역 3개월만에 이게 쉽지 않은 일인 걸 깨달았다. 세상은 예비역에게 결코 관대하지 않았다. 난 콜센터에서 상조를 팔고 있었다. 밤에는 과외를 했다. 소개팅으로 사귀고 보니 양다리였다. 돈도 없었다. 사람을 거의 못 만났다. 삶이 바닥이었다....아니지, 군대보단 낫지....아니지, 전역까지 했는데 이러고 있다는 게 문제지....어렴풋 결국 이루지 못할 목표라고 느꼈다. 일단 돈이 안 모이니, 결국 말만으로 끝나거나 한 보름으로 끝날 거라는 비관적인 예측을 했다. 그로부터 일 년 반이 또 지났고, 기가 막힌 반전이 일어났다. 난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살짝 큰 규모로 당장 내일 떠난다. 플롯이 정말 플랜이 되었다. 보스포러스를 먼저 들리고 런던에서 여정을 끝내는 것 빼곤 크게 다를 것도 없다. 요즘따라 내가 참 운이 따르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이 과정도 참 길었는데, 나중에 얘기를 풀어야겠다. 


문제는 여기부터였다. 여행계획이란 걸 짜기 시작했다. 처음에 던진 질문은 이것이었다. 어떤 여행을 가야하나. 소박하고, 뭔가 현지인스럽고...하지만 그게 될리가! 도시마다 길어봤자 고작 나흘일 것인데, 얼어죽을 현지인. 소박하기야 할 거다. 예산이 빠듯하니. 결국 난 어딜 가든 여행객이다. 좀 더 여행객의 입장에서 현실적인 질문을 던졌다. 가서 뭐하지? 유적지를 보고 박물관을 돌고 시장에서 사고...하지만 나는 유적지에 감명을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인데. 경복궁을 보고 비애든 경탄이든 느껴본 적도 없고, 오사카 천수각을 보곤 사진하고 똑같이 생겼구나 허탈해했던 것이 유일한 기억이다. 물론 하기아 소피아가 그 압도적인 스케일로 날 찍어 누를 지도 모르는 일이다. 공부를 하고 간다면 프라하 어느 거리의 아름다운 건물들이 저마다 절절한 사연으로 내 가슴을 저리게 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이걸 위해서 정말 수 년을 기다린 건가 정말? 저번 주부터는 새로운 질문 때문에 머리가 복잡하다. 애초에 내가 이걸 왜 하려고 한 거지? 친구가 전화했을 때도 그렇게 물어봤다. 미친 놈아, 라고 수화기 반대편에서 성질을 냈다. 그렇게 오늘까지 대답을 못하고 있다가, 방금 전에 군시절의 감각이 떠올랐다. 질문이 대답을 했다기보단 그때 내 심정을 기억해낸 셈인데....


그땐 정말 사는 게 질리고 지루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어디 가고 싶기보단 여기 있기가 싫었던 거다. 


생각해내니 허탈감이 들었다. 목표만 빼곤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때의 절박함이 나를 여기까지 끌고왔다. 멀쩡한 삶이 뭔지도 모르지만 멀쩡한 삶이 간절했다. 그런데 저 다음엔 어쩔려고 했던 건지 기억이 안 난다. 갔다오면 기분전환 되어 말짱해질 거라 생각했는지 아니면 돌아다니면서 내가 있을 장소를 물색할 생각이었는지 머릿속이 하얗다. 


하지만 그때 나와 지금 난 다른 인간이다. 저 절박함을 잊고 있었다니 나름 즐겁게 시간을 보낸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아주 쓸모가 없진 않음을 알게 됐기도 하다. 그러니 다른 결론이 나올 거라고 기대한다. 의미는 결국 사후에 생기는 것이라고 믿는다. 추억이 삶을 살찌게 한다고도 믿는다. 어떤 여행을 하든 그리 되리라 믿는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좋은 것을 보고 좋은 것을 먹을 거다. 자주 추억할 거다. 나답지 않게 사진도 많이 찍을 거다. 그런데 절박함은 어디에 있을까. 그 험한 자갈길에서 내 손목을 쥐고 여기까지 질질끌고 온 그 어둡고 밝은 마음은. 나 혼자 비행기 타고 가게 냅둘 거냐. 너 없으면 난 그냥 뜨내기 관광객일 수도 있는데.


2014/11/3

Posted by 시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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