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인터넷에서 상식이라며 도는, 고인을 명복을 빌기 위해 마침표를 찍지 않는다는 발상은 제법 세련됐다. 마침표를 찍지 않음으로써 사후세계를 인정하게 된다고 하니, '명복'이라는 단어와 어우러져 남아있는 사람들의 말인 조사에 품격을 더해준다. 시적인 냄새도 난다. 이 경우 죽은 사람이 생전에 사후세계를 인정했는지는 크게 중요치 않다. 어차피 장례는 산 사람이 치르니까. 다만 문제라면 이것이 상식처럼 도는 것이라서, 구두점을 찍게 되는 경우 소소한 타박을 듣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누군가 인터넷 커뮤니티에 이 상식을 올리면, 대개 댓글을 다는 회원의 9할 5푼이 놀라워하며 자신의 무지를 탓한다.
사람들은 죽음에 관한 일에 엄격해지고, 장례식장에서의 무지는 결례가 된다. 그래서 다들 이것을 모른다는 것을 바다표범이 펭귄의 천적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보다는 부끄럽게 여긴다. 그러나 사람이 무지하려면, 무지한 대상이 실재해야 한다. 정말 마침표를 찍는 것은 금기시 되어왔을까? 사실 2009년 이전에는 이런 상식을 인터넷에서 본 적이 없다. 물론 모든 상식이 언제나 인터넷에 유행하여 만인의 포스트 상단을 차지할리는 없으니, 내가 모른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전통이라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정말 전통이었다면, 최소한 한글에 구두점이 생긴 이후의 전통일 것이다. 어쩌면 구두점과 같이 수입된 전통일지도 모르겠다.
최소한 국립국어원은 이를 인정하고 있지 않았다. 평소에는 예외로 뒤덮여 있는 한글 맞춤법에는 관련 조항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도 한글 맞춤법에서는 조의금 봉투에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고 적는 것은 허락해주었다. 표제어니까. 마찬가지로 조의금 봉투에 '압록강은 흐른다'라고 적고 마침표를 붙이지 않는 것도 허용되었다. 역시 표제어니까. 물론 조의금 봉투에 '압록강은 흐른다'는 말을 적어놓은 조문객은 스스로 결과를 책임져야 할 것이다. 사실 한글 맞춤법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에 대한 규정을 따로 정해놓지 않음으로써 치명적인 사태를 하나 막았다. 마침표를 찍지 안아 글이 어지러지는 일이다. 고인의 명복을 빌고 글을 시작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덧붙여 글의 마지막에 고인의 명복을 빌고 또 빌면 어떨까?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고인은 XX도 OO시에서 태어나…(중략)…이후 고인은 핍박받는 민중을 위해 경제발전에 힘쓰셨으며…(중략)…그리고 위협받는 국가안보를 위해 그 한 몸을 불사르셨고…(중략)…그 빛을 받은 제자들이 사회 각계에서…(중략)…그런고로 다시 한 번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흐르는 눈물이 멈추지 않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만약 고인의 명복을 비는데 마침표를 강제한다면, 고인의 명복을 처음에 빌어도 이상하게 되고, 나중에 여러차례 강조하는 것도 산만하게 만들 것이다. 생각해보니 고인의 명복을 처음에 비는 것과 여러차례 비는 데에 대한 예의는 아직 보지 못했다.
극단적인 예이기는 하지만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 있다. 먼저 그 실재여부조차 불확실한 규범으로 사람들을 제약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에 대한 논의는 기원전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지만, 독재자의 제삿날이 아닌 이상 제삿상을 걷어차는 행위는 사람들의 제지를 받는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이 존재를 몰랐던, 그래서 마침표를 쓴다고 해서 아무도 무례라고 생각치 않았던 행위를, 결국은 그 자체로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는 행위를 규제할 수는 없다. 이미 자연스레 쓰고 있는 맞춤법하고 충돌하면 더욱 더 그렇다.
이는 정치적 올바름으로 원래 쓰던 단어를 고치는 행위하고는 분명히 다르다. 'Policeman을 Police Officer'로 바꾸는 것이 정치적 올바름이다. 정치적 올바름은 충돌을 피하고, 원래의 단어가 배제한 대상을 포함하기 위해 언어를 바꾼다. 여기에는 동시에 시대에 따라 변한 사회의 모습이 깃든다. 반면 마침표를 빼는 행위는, 동양미술의 비움과는 전혀 다르게 오히려 의미를 제약시킨다. 여성에게 'Policeman'이라는 표현이 적합한지 물어볼 수 있지만, 시체에게 마침표를 빼는 것이 적합한지는 물어볼 수 없다.
아마 마침표가 없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는 말 쓰기 좋아하는 사람이 고안한 표현이 아닌가 싶다. 오래 전에, 혹은 얼마 전에 시인 기질이 있는 사람 혹은 정말 시인이 아끼는 사람이 떠나가자 '이렇게 하자!'라고 한 것이 퍼지고 퍼져 굳어졌을 지도 모른다. 만약 정말 그랬다면, 취지는 좋았고 유족들은 약간 울먹였을 수도 있겠다. 세상에는 시적 허용이라는 것도 있으니까. 다만 모든 시가 같은 표현을 사용할 필요가 없을 뿐이다. 결국 고인의 명복을 비는데 마침표를 붙이든가 말든가, 느낌표를 붙이든가 물음표를 붙이든가는 조문 쓰는 사람의 재량이다. 마침표를 열렬히 빼고 싶다면 최소한 죽은 사람을 추억해보자. 그 사람이 사후세계를 믿었던가?
사람들은 죽음에 관한 일에 엄격해지고, 장례식장에서의 무지는 결례가 된다. 그래서 다들 이것을 모른다는 것을 바다표범이 펭귄의 천적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보다는 부끄럽게 여긴다. 그러나 사람이 무지하려면, 무지한 대상이 실재해야 한다. 정말 마침표를 찍는 것은 금기시 되어왔을까? 사실 2009년 이전에는 이런 상식을 인터넷에서 본 적이 없다. 물론 모든 상식이 언제나 인터넷에 유행하여 만인의 포스트 상단을 차지할리는 없으니, 내가 모른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전통이라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정말 전통이었다면, 최소한 한글에 구두점이 생긴 이후의 전통일 것이다. 어쩌면 구두점과 같이 수입된 전통일지도 모르겠다.
최소한 국립국어원은 이를 인정하고 있지 않았다. 평소에는 예외로 뒤덮여 있는 한글 맞춤법에는 관련 조항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도 한글 맞춤법에서는 조의금 봉투에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고 적는 것은 허락해주었다. 표제어니까. 마찬가지로 조의금 봉투에 '압록강은 흐른다'라고 적고 마침표를 붙이지 않는 것도 허용되었다. 역시 표제어니까. 물론 조의금 봉투에 '압록강은 흐른다'는 말을 적어놓은 조문객은 스스로 결과를 책임져야 할 것이다. 사실 한글 맞춤법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에 대한 규정을 따로 정해놓지 않음으로써 치명적인 사태를 하나 막았다. 마침표를 찍지 안아 글이 어지러지는 일이다. 고인의 명복을 빌고 글을 시작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덧붙여 글의 마지막에 고인의 명복을 빌고 또 빌면 어떨까?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고인은 XX도 OO시에서 태어나…(중략)…이후 고인은 핍박받는 민중을 위해 경제발전에 힘쓰셨으며…(중략)…그리고 위협받는 국가안보를 위해 그 한 몸을 불사르셨고…(중략)…그 빛을 받은 제자들이 사회 각계에서…(중략)…그런고로 다시 한 번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흐르는 눈물이 멈추지 않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만약 고인의 명복을 비는데 마침표를 강제한다면, 고인의 명복을 처음에 빌어도 이상하게 되고, 나중에 여러차례 강조하는 것도 산만하게 만들 것이다. 생각해보니 고인의 명복을 처음에 비는 것과 여러차례 비는 데에 대한 예의는 아직 보지 못했다.
극단적인 예이기는 하지만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 있다. 먼저 그 실재여부조차 불확실한 규범으로 사람들을 제약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에 대한 논의는 기원전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지만, 독재자의 제삿날이 아닌 이상 제삿상을 걷어차는 행위는 사람들의 제지를 받는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이 존재를 몰랐던, 그래서 마침표를 쓴다고 해서 아무도 무례라고 생각치 않았던 행위를, 결국은 그 자체로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는 행위를 규제할 수는 없다. 이미 자연스레 쓰고 있는 맞춤법하고 충돌하면 더욱 더 그렇다.
이는 정치적 올바름으로 원래 쓰던 단어를 고치는 행위하고는 분명히 다르다. 'Policeman을 Police Officer'로 바꾸는 것이 정치적 올바름이다. 정치적 올바름은 충돌을 피하고, 원래의 단어가 배제한 대상을 포함하기 위해 언어를 바꾼다. 여기에는 동시에 시대에 따라 변한 사회의 모습이 깃든다. 반면 마침표를 빼는 행위는, 동양미술의 비움과는 전혀 다르게 오히려 의미를 제약시킨다. 여성에게 'Policeman'이라는 표현이 적합한지 물어볼 수 있지만, 시체에게 마침표를 빼는 것이 적합한지는 물어볼 수 없다.
아마 마침표가 없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는 말 쓰기 좋아하는 사람이 고안한 표현이 아닌가 싶다. 오래 전에, 혹은 얼마 전에 시인 기질이 있는 사람 혹은 정말 시인이 아끼는 사람이 떠나가자 '이렇게 하자!'라고 한 것이 퍼지고 퍼져 굳어졌을 지도 모른다. 만약 정말 그랬다면, 취지는 좋았고 유족들은 약간 울먹였을 수도 있겠다. 세상에는 시적 허용이라는 것도 있으니까. 다만 모든 시가 같은 표현을 사용할 필요가 없을 뿐이다. 결국 고인의 명복을 비는데 마침표를 붙이든가 말든가, 느낌표를 붙이든가 물음표를 붙이든가는 조문 쓰는 사람의 재량이다. 마침표를 열렬히 빼고 싶다면 최소한 죽은 사람을 추억해보자. 그 사람이 사후세계를 믿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