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에 올라가면 많이들 한 번쯤 해보는 과외선생을 나도 물론 해봤다. 그 대학생들끼리 모여 이야기를 하면 대개 결론은 하나다. 절대 자기 자식은 대학생 과외를 시키지 않을 것이란다. 내 의견도 비슷하다. 나는 또래에 비해 비교적 더 잘 가르치는 편이라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그런 의견에는 변함이 없다.

  생각해보면 과외는 인질극과 비슷한 면모가 있다. 인질극은 돈을 주는 사람이 을이다. 대개의 직장에서는 돈을 주는 사람이 갑이요, 돈을 받는 사람이 을인데, 마치 인질극처럼 과외에서는 이 관계가 역전된다. 학생의 어머니는 (일반적인) 과외선생의 노동량의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돈을 지불하면서 부탁을 한다. 우리 아이가 대학에 꼭 가게 해주세요. 대개의 대학생 과외선생님의 태도를 생각하면, 만약 신이 있다면 차라리 절이나 교회에 정기적으로 헌금을 하며 비는 편이 낫겠다. 나는 저런 형편 없는 과외선생인 편이지만, 사실 나를 가르친 과외선생님들이 이러지는 않았다. 그 중 한 분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당시는 IMF의 여파가 진한 때였고, 어머니는 나를 가르치는데 열성적이었다. 교육이 한국 사회에서 계급이동을 이루는 수단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당시 좀 영악하면서 어리숙하고, 동시에 조금 어른스런 꼬맹이였는데, 왠지 내 계급도 알 것 같고 교육이 계급이동을 이루는 수단이라는 것도 (TV와 신문에서 하도 강조하니까) 알 것 같았다. 그래서 뭘 시키면 열심히 했다. 그래서 나는 영어학원을 다니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과외를 시작했다. 또래의 친구 둘 정도와 함께 했을 것이다. 그 첫 선생님의 이름은 아직도 기억나지만 적지 않겠다. 오랜기간을 함께했고, 함께 못하게 되었을 때 나는 눈물을 보일 만큼 정이 들었다. 남자 선생님이었고, 당시 이십대 후반 정도였다. 내 기억이 영 못 믿을 것이긴 해서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아마 선생님은 캐나다에서 치대를 다녔을 것이다.

  뭘 시키면 열심히 했다지만, 나는 대개 끈기가 부족했다. 대부분의 결심이 작심삼일로 끝났다. 그래서 그건 선생님이 시켜도 마찬가지다. 단어를 외우라고 시켰지만 잘 외우지는 않았다. 그러면 굳이 단어를 외우게 하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독해를 했다. 나는 양심에 걸려 선생님에게 미안해지면 단어를 외웠다. 우리가 아무리 정서 불안적인 면모를 보여도 결코 화를 내는 법이 없어서 나는 선생님을 무척 좋아했다. 보통 과외는 선생님의 집 혹은 친구의 집에서 이루어졌다. 두 집은 같은 아파트 단지였고 우리집은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주택이었다. 저녁에 선생님의 집에 가면 부드러운 불빛이 방안을 안았다. 거실에는 액자도 여러 장 걸려있었고, 모피로 만든 듯한 장식도 있었으며, 선생님의 부모님이 쇼파에 앉아 계셨다. 종종 우리들을 위해 간식을 준비해 주셨다.

  하지만 어느날부터 선생님의 집에는 그림도 사라졌고, 모피 장식들도 사라졌으며, 텔레비젼도 같이 사라졌고, 결정적으로 선생님의 부모님도 사라져 집이 휑해졌다. 남은 것은 장식을 뗀 쇼파 뿐이었다. 다행히 선생님은 남아 있었고 성품은 변한 것이 없었지만, 수업시간에 새로운 주의사항이 생겼다. 누가 와서 문을 두드리거나 초인종을 눌러도 결코 응대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 판도라에게 상자를 처음 줄 때도 열지 말라고만 했지 굳이 이유를 알려주지는 않았으니까.

  나는 늘 그렇듯이 시키는 것은 잘 따랐다. 문제는 거실에서 자습 안 하고 놀고 있던 활발하게 놀고 있던 내 친구였다. 초인종 소리가 들리자 맹랑하게 문을 연 것이다. 선생님은 나보고 방을 나가지 말라고 하고 혼자 나가 그 사람을 상대했다. 나는 문틈으로 내다보지도 않고 가만히 듣고 있었다. 남자가 소리를 질렀다. 선생님은 죄송하다고 했다. 남자는 죄송한 건 별로 상관없는지 계속 소리를 질렀다. 나는 어린 마음에도 그 남자의 생김새를 머릿속에서 그림으로 그려보았다. 검은 양복을 입은 돼지 같은 놈일 것이라고. 그리고 동시에 친구가 원망스러웠다. 위에 적었다시피 난 조금 조숙한 꼬맹이였으니까.

  그날 선생님은 처음으로 화를 냈다. 절대 문을 열지 말라고. 여전히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그 이후로 문을 여는 일은 없었다. 뭐 이후는…평소랑 비슷했다. 보통 공부를 하다가 하기 싫어지면 놀기도 했다. 다만 딱 하루 다른 날이 있었던 것 같다. 다른 친구들은 거실에 있었다. 나는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하고 있었고 선생님은 바닥에 누워있었을 것이다. 선생님은 나에게 말을 하고 있었다. 나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무슨 말을 했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난다. 중간에 나왔던 한 단어와 마지막에 말했던 한 문장만 기억이 난다. "빚"이라는 단어가 중간중간에 쓰였고, 그 연설의 마지막은 "너는 아직 이게 무슨 뜻인지 잘 모를 거야."였다. 하지만 다양한 영상매체 덕에 제법 조숙한 꼬맹이였던 나는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캐나다에서 치의대를 졸업한 젊은이는 부모님도 숨을 만큼 거대한 가계빚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아무것도 못 알아들으리라고 지레짐작하고 답답한 신세를 담담하게 토로하고 있던 것이다.

  내가 과외를 끊은 것은 선생님의 사정 때문이었다. 선생님은 더 이상 가르칠 수 없고 떠나야 한다고 말을 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검은 양복, 그리고 빚과 관련이 있을 지도 모른다. 우리는 다시 보지 못했다. 나는 그 후에 영어학원을 다녔다. 몇 년 후 어머니가 그가 다시 그 동네로 돌아와 과외를 한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한다. 그 후에 또 한참이 흘러 2010년이 되었는데, 그는 치과를 차렸을까, 아니면 계속 빚에 시달렸을까? 아마 지금은 마흔에 가까운 나이일 것이다.

  사실 머리 속에 남아있는 잔상이 아직 하나 더 있다. 이 잔상이 답을 줄 것도 같다. 어느날 내가 집에 가는데 선생님이 배웅을 멀리까지 나오신 적이 있다. 그는 그 사이에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물었다. 난 무언가 대답했겠지만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그 착한 선생님의 훈수는 기억이 난다. 치대를 들어가서 치과를 하라고. 치과 선생님은 돈을 많이 번다고. 나는 치과하고는 이백오십만 광년 거리를 둔 삶을 살고 있어서 별 상관이 없는 조언이 되어버렸지만, 오히려 이 조언에서 그의 모습을 투영하고 싶다. 왜 치대를 다닌 그는 돈 많이 번다는 치과를 차리지 못하고, 큰 돈 안 되는 꼬맹이들을 가르치며 알아듣지 못하는 꼬맹이한테 저런 조언을 했을까?

  IMF, 빚, 검은 양복, 도망간 부모님. 아무래도 짚이는 단어가 너무 많다. 모두 의연함으로만 대처하기는 버거운 것들이다.
Posted by 시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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