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날이었다. 나는 카드 광고 모델들과 별 다를 것 없이 소비를 하면 늘 즐거웠다. 지갑이 얇은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 보면, 아무래도 마르크스가 말한 자본주의의 붕괴는 영원히 오지 않을것 같다. 그래서 팝콘과 콜라를 사고 이스트우드의 마지막 연기를 보러 들어갔다. 이스트우드의 모습은 내가 다른 평범한 날에 소비를 하면서 본 이스트우드의 영화들의 모습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80이 된 할아버지의 완력은 줄어보였지만, 그것이 그가 온화해졌다는 소리는 아니다. 마당에서 난동부리는 양아치들에게 총구를 들이대는 할아버지가 손녀에게 동화책을 읽어줄것 같지는 않다.

  시대는 빠르게 변하고 변화는 중요하다. 수많은 처세서가 변화를 강조했지만, 이 변화는 돈을 벌거나 명예를 얻기 위한 변화는 아니다. 흔히 '철새 정치인'이라고 부르는 무리들과는 거릴를 둬야 한다. 우리가 알고 있던 진실과 인과관계가 더 이상 옳은 것이 아니게 되는 시간이 너무 짧다. 물질적인 변화가 이를 뒷받침한다. 오래전에 당대의 지성들은 노예가 사람인지 가축인지를 두고 오랜 토론을 했다고 하는데 그들의 결론은 가축쪽으로 좀 더 기울어졌다고 한다. 한 200년전쯤에 서울에서 부산까지 하루면, 바다를 보고 광어회를 먹고 해변에서 불놀이를 하다가 해지는 것을 바라보고 집에 돌아올 수 있다고 하면 그 말은 거짓이 된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수많은 지식인들의 생각을 영원히 뒤집어놨다고 한다. 그 지식인들이 직접 한 얘기니 믿어도 된다.

  그래서 변하지 않는 꼰대는 재수없다. 지만원같이 말이다. 70년대의 찬란한 영광과 30년대의 놀라운 발전을 늘 칭송하고 다니지 않는가. 저 의견이 한때는 정말 칭송받았는지 모른다. IMF때 다시 박정희를 들먹이며 그리워하듯이. 이 사람들은 달리 드러난 진실을 인정할 일이 없다.

  반면 꼰대인데 멋지기만 한 사람도 있다. 바로 이 영화, 「그랜 토리노」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분한 월트 코왈스키가 그럴 것이다. 한국전의 용사들은 머리까진 이탈리아놈을 빼곤 다들 어디 가고, 주변에 아시아의 잡놈들과 함께 살아남을수 있다는것을 보여주는 것이 그의 선택이다. 일단 그들이 중국인이 아니라 몽족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 자체가 늙은 그에게는 달에서의 한 발자국과 맞먹는 업적이다.

  코왈스키, 혹은 이스트우드의 변화는 힙합을 듣고, 머리를 염색하는 할아버지와 같은 변화일까? 하지만 그런 변화는 너무 쿨하고 극적이다. 이스트우드가 꼰대를 탈피하는 것은 슬픈 일이다. 평생 고려청자의 푸른 색을 재현하기 위해 애쓴 장인에게 이제 현대식 방식에 맞춰서 도기를 생산하라고 하는 일은 보통 슬픈 일이라고 생각하잖아? 그것은 보통 전통의 몰락으로 여겨지지,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아름다운 선택은 아니라고 한다. 일단 뒷모습이 무지하게 쓸쓸할거 같다.

  변화가 필요하다 해도, 변화를 강요하는 것은 때로 폭력이 될 수 있다. 패러다임의 변화로 오는 문제는 아니지만, 동성애자에게 이성애자가 되라고 하는 것은 아주 유명한 예일 것이다. 잭 블랙에게 철 좀 들어라라고 할 수는 없다. 잭 블랙은 초등학교에서 기타를 쳐야 하고, 수도원에서 레슬링을 연습해야 하며, 비디오 대여점에 민폐를 끼쳐야 한다. 만약 잭 블랙이 필름이 끝나갈 무렵마다 매번 사회의 쓴맛을 보고, 반성을 한 후 평범하게 살게 된다면 그것은 끝없는 변화가 아니라 끝없는 좌절이다. 오히려 이는 처세술을 닮은 면이 있다. 요컨대 기존의 생각에 그대로 맞춰 따라가는 것 아닌가?

  그것은 이스트우드에게도 마찬가지다. 시대는 변했고 인종 구성도 그만큼 달라졌지만, 은막위를 흘러가는 몽족의 전통 의식을 코왈스키는 끝까지 완벽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코왈스키가 이들을 교화하는 입장인 것도 아니다. 그들이 양아치로부터 자신들을 구해준 코왈스키를 존경하는 그들의 방식은 참 전통적이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이 이민족들이 내 자식들보다 나를 더 잘 알고 있군."하고 탄식하는 것밖에 없다.

  그의 의식 가장 아래에 깔려있는 선과 악에 대한 가장 단순하고 명쾌한 구분만이 남아, 포스터에 써 있는 그대로 '위대한 선택'을 낳는다. 이 일종의 구원은 이것은 한때 바다를 건너온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의 생각이고, 무엇이 변하든 그가 꾸준히 지켜온 바이기도 하다. 결국 아무런 사고방식도 바꾸지 않고, 남을 간섭하지 않고 저런 것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아주 가벼운 이해만 한 채 마침내 상대를 구원하면서 스스로를 상대에게 이해시키는 그 모습은 너무 간단하게 이루어져 비열하지만, 소통을 시도하고 자신의 가치까지 지켰기에 거룩하다. 세상에, 이리 절묘한 방법이 있을줄이야! 몽족 소년 타오를 지하실에 가두고 양아치들에게 못 가게 한 그 장면부터 훌쩍이던 내 주위 모든 관객들이 증거라면 증거다. 그리고 나는 휴지통에 쓰레기를 던지고, 분리수거를 하듯 내가 생각하는 가치를 차근차근 정리해보기 시작했다.
Posted by 시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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