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적으로 버스보다 기차를 좋아한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군시절 영향도 있는 것 같다. 휴가 나갈 땐 기차를 탔고 복귀할 때는 버스를 타고 다녔으니까. 한 번 처참했던 휴가가 있었는데, 복귀하는 내내 엠피쓰리를 귀에 꼽고 스톤 로지즈 음악만 들었다. 그래서 내가 여태 스톤 로지즈를 잘 안 듣는다. 들을 때마다 자꾸 그때가 생각나서 언짢다 ㅜㅜ

지금은 소피아에서 벨리코 투르노보 가는 길이다. 투르노보가 정확한 표기인 지는 잘 모르겠다. 가서 와이파이 잡고 검색해보든가 해야지. 열차는 좁은 복도가 있고, 마주보고 있는 의자가 있는 여러 개 있는 그런 열차다. 호그와트 특급 열차 같이 생긴 거....역시 이런 것도 처음 타본다. 내일은 야간열차 침실칸인데, 역시 처음 타본다. 열차 안은 어지럽고 더럽다. 화장실 변기는 앉기만 해도 피부병 걸릴 거 같고, 열차 곳곳의 얼룩이며...하지만 그런 거야 그렇다치고 제일 큰 문제는 난방인데, 벽난로 옆에 앉아있는 것만 같다. 열기 때문에 얼굴가죽이 화끈거린다. 나만 그런 건 아닌가보다. 창가에 앉아있던 노인이 결국 창문을 열었다.

그래도 창밖은 봐줄만하다. 다양한 지형이 스쳐지나갔다. 불가리아 들어올 때처럼 평야가 펼쳐지다가 곧 산지에 접어들었다. 날이 맑았다면 아름답단 말이 서슴없이 나왔을 거다. 뭐 기슭마다 스산하게 내리앉은 안개도 제법 운치가 있다. 아까 즈베리노(Zverino) 역 부근이 장관이었다. 왼쪽 창문 밖의 산은 다들 하얗다. 설산이어서 그런 게 아니고 토양이 그렇다. 그런 토양에 뿌리내린 나무들이 끝없이 단풍을 뿌려대고 있었다. 오른쪽은 왼쪽만한 장관은 아니지만, 아담한 마을이 있고 호수가 있고, 실개천이 흐르고....아니면 지금처럼 강이 철길을 따라 흐른다든가....터널을 지나거나 방향을 틀 때마다 풍경은 극적으로 변한다. 지금은 푸른 논인지 밭인지, 이 계절에도 재배하는 거라면 보리인 건지, 내가 모르는 다른 작물인 건지. 불가리아 사람들은 뭘 먹고 사는 건지....또 풍경이 변했다. 내 좌우가 전부 절벽이다. 열차가 절벽 사이를 달리고 있다. 이 문단을 마치면 절벽 사이는 빠져나올 것이다. 예상대로다.

사진으로 남길 수가 없다. 훅훅 지나가서 제대로 찍히지가 않는다. 그래서 평온한 구간에서 비디오를 좀 찍었다. 역시 군데군데 풍경에 녹아든 집들이 제일 신기하다. 어떻게 살까? 이런 동네는 정말 눈이 오면 고립되는 거 아닌가? 한국이야 좁기라도 하지 여긴 정말 어떻게 지내는지. 비교대상을 굳이 찾아면 80년대 한국 농촌....이라고 생각을 해봐도 내가 80년대 한국 농촌이 어떠하였는지 모르는데 비교가 될리가 있나.

대도시야 어딜 가든 파악하기 쉽다. 역 앞에서는 여행자들을 등쳐먹으려는 택시기사, 삐끼들, 사기꾼들이 있다. 지도를 따라 제일 유명한 번화가로 나가면 명품샵이 넘친다. 관심도 없고, 관심이 있어봤자 돈이 없어서 살 수도 없는 그런 물건들...길 좀 잃고 걷다보면 주택가 나오고, 으슥한 골몰은 피해야 하고...사실 소피아가 그랬다. 밥 먹고 지내기야 괜찮다. 물가가 싸니까. 것 빼곤 뭐 크게 즐겁진 않았다. 비도 오고, 전전날 과음 때문에 음식도 몸에 안 받고...불가리아 음식들 생김새는 하나 같이 맛 없어 보이고. 그래서 마지막 날 저녁에는 으슥한 골목에 있는 중식당을 찾았다. 중식이야 어딜 가든 익숙하니까. 의외로 불가리아 아저씨가 주인이었다. 불가리아 사람이 요리하는 중국요리인가요? 내가 물어봤더니 아저씨가 그게 아니고, 요리는 저 안에서 중국인들이 하고 자기는 접객하는 거란다.

파인애플이 들어간 소스와 돼지고기...라는 메뉴가 있는데, 탕수육일 것 같아서 주문하였다. 그때 아저씨가 내 국적을 물어봤다. 한국인데요. 아저씨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말했다. 아 코레아, 잇츠 탕수육. 정말 듣고나서 내 귀를 의심했다. 아저씨가 말해주길 한국 손님이 꽤 자주 들린단다. 그래서 간단한 한국어 표현이나 메뉴명을 적어놨다면서 내게 쪽지를 보여주었으나, 키릴 문자로 되어있어서 단 하나도 읽을 수 없었다. 하지만 아저씨가 자꾸 한국어를 사용하는 걸 보면 분명 맞을 것이다. 안녕하세요, 젓가락, 맛있었나요, 안녕히 가세요 등...

숙소도 문제였다. 침대는 깨끗했고, 온수도 잘 나왔고, 스태프도 친절했지만...룸메이트가 크나큰 문제였다. 로버트라는 미국인 장기투숙객이었다. 루마니아 여자와 결혼하여 루마니아에 살면서 동유럽 이곳저곳에서 부동산 사업을 한단다....라지만 언급하는 돈의 액수나 택시타고 다닐 돈이 없다고 징징거리는 걸 봐선 사업이 썩 성공적인 것 같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지금 추진하고 있는 투자가 성공하면 내년 쯤에는 오십만 유로를 거머쥘 것이라고 자신만만해 하였다. 그러든가 말든가. 그는 내가 전혀 궁금하지 않은 것에 대해 하루종일 떠들었다. 자기 와이프가 얼마나 멍청하며, 자기 와이프의 전남편은 마피아인데 그 놈을 깜빵에 보낼 것이고, 와이프도 좀 문제가 있어서 친딸(로버트의 의붓딸이 된다)에게 손찌검을 했고, 와이프를 정신병원에 보내버릴 생각이고, 또 와이프가 떼먹은 돈이 있는 것 같고, 그걸 추적해야 하고, 일단 당장 정신병원에 보낼 순 없으니 오늘 밤은 와이프에게 전화해서 서로에게 충직하자고 말할 생각이고, 와이프가 종교를 깊이 믿으니 성경구절을 인용할 계획이란 것까지 밝혔다. 그리고는 정말 실천했다. 새벽 5시에....하루만 머무른다 하니 참았지 이틀밤이었으면 로비로 내려가 따졌을 거다.

아침 일찍 체크아웃했는데, 스태프들이 웃는 낯으로 물어봤다. 편안하게 보내셨나요? 네...정말 괜찮았는데 로버트만 없었으면 더 좋았을 거에요. 스태프들이 빵 터지길래 한 마디 더 했다. 당신들이 같은 방에 집어넣었잖아요. 이번에는 스태프들이 미안한지 좀 수줍게 웃었다.


2014/11/16

Posted by 시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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