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VID ROCASTLE(1967-2001 ARSENAL PLAYER IN 1983-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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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9년 5월 26일, 데이비드 로캐슬의 22번째 생일을 맞고 23일 후의 일이다. 이 날은 잉글랜드 1부 리그의 마지막 경기가 있는 날이다. 리버풀 대 아스날, 아스날은 2점차 이상으로 이겨야만 챔피언을 거머쥘 수 있는 상황이었고 리버풀은 홈에서 2골 이상 먹혀본지가 기분상 한 백만년은 된 듯 싶었다. 어쨌거나 그만큼 수비력이 막강한 팀이라는 뜻이다.

  경기는 도저히 아스날이 이길것 같지만은 않았다. 알란 스미스가 어찌해서 한 골을 넣긴 했지만 리버풀 선수들은 베테랑들답게 별 동요가 없었다. 반면 아스날의 로캐슬을 위시한 아담스, 딕슨, 머슨, 윈터번, 토마스 같은 선수들은 다 햇병아리였을 뿐이고 백전노장 오리어리 혼자 분전하고 있었다.

  수비력이 강한 아스날이 상황이 상황인 만큼 공격에 총력을 기울였다. 데이비드 로캐슬이 돌파를 한다. 로캐슬은 알란 핸슨을 앞에 두고 이리저리 살피다가 한 쪽으로 치고 나갈 듯, 무게중심을 실어주고 한슨은 그 동작에 깜빡 속는다. 그러자 로캐슬은 그 틈을 바로 파고 든다. 다 재쳤다고 생각하는 순간 아직 포기하지 않은 한슨이 뒤에서 태클을 걸어버렸다. 말 그대로 선수 생명을 아작낼수 있을 정도로 더티한 태클이었지만, 로캐슬은 별로 흥분하지 않고 핸슨의 사과를 받아들인다. 그는 선수생활 내내 대개 그랬다.

  경기는 후반 추가시간 끝날떄쯤 터진 마이클 토마스의 기적같은 골로 아스날이 2:0으로 승리한다. 마이클 토마스가 온몸을 던져 텀블링을 하는 순간 로캐슬은 토마스가 착지할 곳에서 이미 그를 기다리며 제일 먼저 축하할 준비를 했다.
 
인상적인 꼬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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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슬링턴의 아스날 팬들에게 가장 빨리 사랑받는 법은 무엇일까?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같은 북런던에 있는 라이벌 토튼햄을 상대로 골을 넣으면 된다. 그러면 저번 경기에서 역전골을 넣을 수 있었던 결정적인 찬스를 놓쳐도, 나이트클럽에서 남의 여자친구의 엉덩이를 더듬어도, 혹은 알고보니 웨스트햄의 열렬한 팬이었다는게 타블로이드를 타고 퍼져도 그 하나로 어느정도는 용서받을수 있을 것이다. 하물며 데이비드 로캐슬은 저런 나쁜짓을 한 번도 저지르지 않았으니 더욱더 사랑받았겠다.

  그를 아스날의 홈구장, 하이버리 역사상 최고의 스타중 하나에 올린 것도 토튼햄전 득점이었다. 1987년 리틀우즈컵(지금의 칼링컵) 준결승전 재경기에서 로캐슬은 연장전이 다 끝나가던 무렵 페널티 스팟 근처에서 공을 받더니 번개처럼 몸을 돌려 키퍼의 가랑이 사이로 흘려넣었다. 이후 리버풀과의 결승전에도 골은 없었지만 준수한 활약을 펼치며 아스날의 우승을 이끌었다.

  사실 로캐슬은 이미 10대 때부터 스타였다. 지금의 파브레가스처럼 20살이 되기 전부터 세계를 휘어잡거나 그러진 않았지만 벌써 수년 빛나는 트로피를 들어보지 못한 아스날, 그 팀의 유스진의 황금세대의 일원이었다. 이 어린 선수들이 아스날의 미래를 이끌꺼라고 기대되었는데, 그중 로캐슬과 아담스는 특히 빛나는 재능이었다. 로캐슬은 이미 1985-86시즌, 18살때 뉴캐슬전을 필두로 1군 경기를 22경기나 뛰면서 화려한 데뷔를 하였다.

만능 미드필더

  현대 축구에서 미드필더들에게 가장 중요시 되는 덕목이라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다재다능'을 빼놓기는 힘들 것이다. 여기서 다재다능함이란 한 선수가 여러 자리에서 그 자리에 맞는 역할을 수행하는 '멀티플레이어'스러운게 아니라 한 선수가 한 자리에서 그 자리에서 필요한 역할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역할과 다채로운 움직임을 보여주는 그런 '다재다능'을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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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선수들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선수가 프랑스 출신의 전 아스날 왼쪽 미드필더 로베르 피레스일 것이다. 우연의 일치인지, 로캐슬과 똑같은 7번 셔츠를 입고 뛴 로베르 피레스, 단순히 킥, 패스, 스피드, 개인기 등 이런 능력을 모두 골고루 갖추고 있었을뿐만 아니라 움직임마저도 기존의 측면 미드필더들과의 차이가 심했다.

  로캐슬도 그런 선수였다고 한다. 단순히 오른쪽 윙이라고 묘사하기 힘들 정도의 폭넓은 움직임과, 그것이 단순히 활동량으로 그치지않고 효율적으로 이어진다는 점과 박스안에서의 좋은 움직임. 조지 그레이엄 감독이 지휘했던 아스날의 단순한 뻥축구에 기름칠을 해준 선수가 바로 그였다고 할수 있다.

  사실 단점이 없을수가 있으랴. 만능 미드필더 치고는 골 결정력이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다. 물론 수비적이었던 아스날에서 많은 골을 넣는 것 자체가 무리였긴 하지만. 그러나 골수가 적어도 그는 팬들에게 그의 유려한 테크닉을 보여주며 기쁨을 주었다. 양발을 자유자재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더욱 위협적이었다고 한다. 당대 최고의 테크니션이라 봐도 무리가 없다. 지네딘 지단이 사용해서 유명해진 '마르세유 턴'이라는 기술은 사실 로캐슬이 제일 먼저 사용한 기술이라고 한다.

   그를 본 아스날 팬들은 마치 브라질 선수를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고 떠들곤 한다. 그를 사랑한 팬들은 그에게 '록키'라는 별명을 붙였다.

영광에서 이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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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록키' 로캐슬이 인기 있었던 다른 이유는 하나는 그가 정말 신사적이었다는 것이다. 평생 동안 거의 카드를 받지 않았고, 거친 잉글랜드 축구 선수들이 아무리 쎄게 차고, 발을 걸고, 손으로 밀어도 흥분하지 않고, 그렇다고 무서워 하지도 않고 씩 웃으면서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세요.', 이렇게 말할 것만 같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사생활로 문제를 일으킨 적이 한 번도 없고 성격도 시원시원해서 라커룸에서 그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팬들을 만나면 늘 웃어주고, 골을 넣고서도 수줍은 웃음을 짓는다. 토튼햄 팬이 아닌 이상 미워하기 힘든 선수였다.

  하지만 특이한 것은 그는 자신을 치는 태클에는 관대해도, 팀 동료가 당하는 것은 절대 못봤다. 브라이언 맥클레어가 앤더스 림파를 치자 그는 그랑 맞서며 정면으로 대들었고, 역시 팀동료를 공격한 노만 화이트헤드의 머리를 발로 차기까지 하였다. 그는 술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술에 취하면 으레 팬들에게 팀 동료들을 "My blood brothers"라고 말했다고 한다.

  스물 초입에 아스날의 핵심 선수가 된 로캐슬, 화려한 테크닉의 로캐슬, 신사 로캐슬, 의리있는 로캐슬에게 딱 하나 별로 따라오지 않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운이다. 1990 월드컵 때, 비록 아스날이 리그 우승은 하지 못 했지만 로캐슬은 절정을 달렸었던 그 시절, 보비 롭슨은 그를 뽑지 않았다.

  아스날이 2년만에 우승컵을 거머쥔 1990-91 시즌, 이 때부터 로캐슬의 불운은 시작되었다. 부상 행진의 시작이었다. 그가 태클이 들어와도 계속 페어플레으를 하는 것을 아는 잉글랜드 선수들은 그를 가면 갈수록 거칠게 대했고, 특히 그의 평균을 훨씬 웃도는 속도와 눈으로 따라잡기 힘든 발놀림을 막기 위해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나보다. 록키는 아스날의 경기를 대부분 TV와 벤치에서 지켜만 봤다. 아스날이 코벤트리를 6-1로 쳐부수면서 우승을 자축할때도 그는 경기 내내 고개를 떨구고 벤치에 앉아있었을 수밖에 없었다.

  1부 리그의 마지막, 1991-92 시즌. 1부 리그는 그 다음 해부터 거대 자본을 끌어들여 프리미어리그로 개칭한다. 그 시즌 우승팀은 리즈였고, 리즈는 우승하자마자 아스날에서 입지가 사라진 로캐슬을 데려온다.

대책이 없다

  로캐슬은 진심으로 아스날을 떠나기 싫어했다. 구단에서 그를 팔려고 하자 조지 그레이엄의 품에서 눈물을 흘리며 가기 싫다고 말했을 정도엿다. 그러나 결국 떠날수밖에 없었다.

  아스날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데이비드 로캐슬과 그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아스날 팬들 모두가 실망한 망한 이적 후, 로캐슬은 또 실망스러운 활약을 펼치고 있었다. 애버딘과 맨유에서 준수한 활약을 펼치고 리즈에서 늙어가던 고든 스트라챈의 대체자로 들어왔는데, 문제는 스트라챈이 아직 너무 건재했다. 로캐슬은 결국 부상으로 고생만 하다가 맨체스터 시티로, 다시 첼시로 옮기고 첼시에서는 3부 리그의 헐시티로 임대가는 등 갖은 고생을 다한다. 그 와중 이탈리아의 명문팀 피오렌티나에서 제의가 들어오기도 하나 이미 그에게 야망은 사그러들고 있었다.

  임대로 전전하던 끝에 결국 그는 첼시 2군에서 1998년 친정팀 아스날의 우승을 지켜봤다. 그리고 그는 말레이시아로 간다. 그는 반년 정도를 뛰고 결국 불행한 막판 6년간의 축구생활을 청산하고 은퇴한다. 축구계를 떴으니 불행은 끝났을까? 아니다. 가족들과 행복하게 살고 있던 로캐슬은 비호지킨 림프종이라는 일종의 암에 걸린다.

  그는 2001년 3월 31일 가족과 친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숨을 거둔다.

그 다음날과 이듬해와 다음 세대

  3월 31일, 바로 그날이었다. 하이버리에서 아스날과 토튼햄의 경기가 열렸다. 전반전까지 솔 캠벨의 활약으로 토튼햄 수비가 버티고 있었는데, 후반전이 되자 앙리가 골을 넣고, 피레스가 쐐기를 박았다. 특히 피레스의 골은 자주 회자될만한 멋진 골이었다. 아스날 선수들이 죽은 록키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었다.

  로캐슬에게는 제롬 앤더슨이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는 로캐슬의 가족과 아스날 구단의 협조 아래 로캐슬 재단을 만들어서 불우이웃을 돕고 있다. 아스날 구단은 옛 전설에 대한 예우로 하이버리 스타디움 철거 당시 의자를 판 돈을 모두 로캐슬 재단에 기부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자체 검사중 의자에서 소량의 카드뮴이 검출되자 아스날 구단은 판매액을 전부 환불하고 의자를 모두 없앤 후, 약속했던 돈을 판매액 대신 모두 구단 자금으로 기부하였다.

  아스날 팬들은 그가 팀에서 떠난지 10년이 넘었는데도 그를 잊지 않았다.  2006년 5월 7일, 아스날과 위건의 프리미어리그 최종장이자 하이버리 경기장과의 이별을 맞는 날이기도 하였다. 그날 응원가중 하나는, 바로 이 로캐슬의 응원가였다. 로캐슬은 팬들 마음 속에 살아있었다.



  다시 옛날 이야기를 하자. 로캐슬이 죽은 그날, 아스날이 토튼햄을 잡은 그날을 아스날에서 2001년까지 뛰었던 브라질 선수 실비뉴가 더듬더듬 추억했다.

  "외국인 선수들은 그 팀의 역사에 대해서 잘 모를거라고 생각하더군요. 공중파 TV에서 그 사람들 보는만큼 경기를 본다는 것을 모르나봐요! 데이비드 로캐슬의 이름은 80년대 리그 우승 당시 아스날과 동의어나 마찬가지었어요. 이 하이버리의 전설이 누군지 잘 알고, 얼마나 전 동료들이 슬퍼했는지 보면 다 알 수 있었어요. 모두 그가 죽을거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런 젊은 사람이 죽는 것은 안타깝지요. 매우 안타깝니요. 토튼햄전 시작 1분전의 묵념은 그를 위한 것이었죠. 기침 소리 하나도 안 들리더군요. 얼마나 아스날 팬들이 그를 사랑햇는지 알 수 있어요. 경기 끝나고 잉글랜드 출신 선수들이 피레스가 7번 유니폼 입고 골을 넣었다고 너무나도 좋아하더군요. 토니 아담스가 웃으며 말했지요. '로베르, 록키도 네가 7번 셔츠를 입고 토튼햄을 상대로 골을 넣은 것을 좋아할거야. 최고의 작별선물이었어.'"

Posted by 시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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