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건물은 인민궁전입니다. 단면적으로 치면 전세계에서 펜타곤 다음으로 넓은 건물이죠. 높기도 좀 높아요. 몇 미터일까요? 맞춰봐요. 다들, 어서! 워킹투어 가이드가 두리번거렸다. 내가 총대를 매고(?) 말했다. 40미터 정도...가이드는 고개를 저었다. 비슷하긴 한데 조금 아쉽네요. 80미터입니다. 대체 뭐가 비슷한 건지...차라리 그냥 틀렸다고 했으면 덜 무안했을 거다. 가이드는 건물에 대한 설명을 이어 설명했다. 루마니아의 독재자 챠우세스크가 북한에 들린 적이 있는데, 그때 북한의 거대한 건축물에 감명을 받아 비슷한 걸 만들겠다고 결심했단다. 하지만 챠우세스크의 폭정이 끝날 때까지 건물을 완성시키지 못했고, 그 이후에도 계속 공사를 했으나 공정률은 영원히 99.98%에 머물러 있는 상태고...여기까지는 아는 이야기. 그 뒤에는 재미난 이야기.

93년도의 일이란다. 유명한 팝스타가 1993년, 그러니까 혁명 4년 후에 부쿠레슈티를 들린 적이 있습니다. 누굴까요? 맞춰봐요. 다들 아는 사람이에요. 어서, 어서. 아 다들 용기를 내요...라지만 이번에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 한 번 가이드가 정적을 깼다. 바로 마이클 잭슨입니다. 다들 아시죠? 마이클 잭슨이 어디 올라갈 장소를 물색했는데, 당시에 정말 마땅한 곳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저기 인민궁전 발코니에 올라갔어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죠. 마이클 잭슨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내자 사람들이 우레와 같은 환호성을 질렀어요. 마이클 잭슨도 손을 흔들며 화답했죠. 그리고 부쿠레슈티의 관중들을 보며 목청껏 소리쳤죠. 헬로! 부다페스트!

부쿠레슈티의 가장 유명한 건물에서 있었던 일이란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건물 타이틀이야 거창하다만, 그걸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블랙코미디 같지 않은가. 마이클 잭슨의 헬로 부다페스트부터 시작해서, 챠우세스크라는 잔인하나 우스꽝스러운 독재자의 그림자, 영원히 끝나지 않는 공사, 허술한 인프라, 공실율 70%, 이럴 바엔 아예 쇼핑몰로 돌려버리자라는 국회의원의 발언(하지만 쇼핑몰이라고 다 찰까?)...부쿠레슈티 사람에게 부쿠레슈티를 대표하는 건물이 이거냐고 물어보면, 자랑스럽게 그렇노라고 대답이 돌아올 거 같진 않다.

3일 전에는 부쿠레슈티를 떠나 브라쇼프를 갔다. 여행 가이드 앱의 설명에 따르면 루마니아에 가면 브라쇼프를 반드시 가야한다는 말이 있다고 하는데...글쎄, 여행 전에는 그 존재조차 몰랐다. 사실 브라쇼프에 갈 예정도 아니었다. 원래는 크라이오바와 티미소아라를 거쳐 헝가리로 갈 예정이었는데, 교통편이 브라쇼프라 좀 더 편하다는 게 이유의 전부였다. 예상 밖의 소득이었다. 이틀 머무는 내내 비가 왔다는 건 아쉬웠지만, 뭐 부쿠레슈티에서도 내내 비가 내렸고...구시가지는 멋졌고, 밥이 루마니아에서 머무는 동안 먹은 것 중 가장 맛있었고, 사진도 예쁘게 잘 나왔다. 박물관 2층 현관에서 알록달록 파스텔 톤의 건물들에 둘러쌓인 광장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중세인의 미적감각일까, 관광객 유치에 사활을 건 공무원들의 승부수일까.

브라쇼프의 가장 유명한 건물은 보통 흑교회라고 불리는 카사 바그너였다. 지금까지 들린 거의 모든 도시의 대표 건물이 오래된 교회이기는 하지만, 지금까지 가본 개신교 교회 중에서는 가장 위엄이 있었다. 내부에는 거대한 파이프 오르간이 설치되어 있는데, 마침 누군가 연주를 하고 있었다. 살면서 파이프 오르간 연주를 들어본 적이 처음이었는데, 제법 위압감이 있다. 모자이크 사이로 쏟아지는 색색의 빛도 멋있고. 실내 촬영이 금지된 게 아쉬울 따름이다. 여기가 터키였다면 이미 옛저녁에 건물의 절반은 박물관이 되었을 틴데...하여튼 카사 바그너 정도라면 제법 자부심을 가져도 되겠다. 적어도 브라쇼프 사람들은 충분히 그럴 거 같다. 브라쇼프라는 마을의 정체성을 이 건물만큼 잘 보여주는 데가 또 어디 있겠나. 카사 바그너라는 이름부터 그렇다. 바그너는 독일 이름이다. 독일이 대체 루마니아의 도시하고 무슨 관계가 있나 싶겠지만, 사실 브라쇼프는 원래 독일인들의 마을이었다. 광장에 있던 알록달록한 건물들도 다 독일식으로 지어진 건물들이었고. 심지어 관광지 내 안내문에도 독일어가 루마니아 어보다 먼저 써진 경우가 있다.

카사 바그너는 브라쇼프의 역사 자체다. 독일인이 건너와 성당을 세우고, 독일인들이 옹기종기 모여 예배를 올리고, 루터가 종교혁명을 일으키자 그를 따라서 성당에서 교회가 되고, 대화재로 많은 부분이 소실된 적도 있고, 그걸 정성들여 복구시키고...얼마나 자랑스럽겠나. 게다가 아직도 그 역할이 끝나지 않았다. 지금도 복음주의 교회로, 독일계 루마니아인들의 성지로 제몫을 하고 있으니. 브라쇼프 사람들은 도시를 대표하는 얼굴로 카사 바그너를 꼽는 걸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로마의 후예를 자처하는 부쿠레슈티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말든. 이러는 부쿠레슈티도 사실 20세기 초에 지어진 프랑스식 건물로 가득차있다. 나머지는 공산주의의 유물.

도시의 명소를 보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냐는 질문은 사실 중학교 수학여행 때부터 던졌다. 조상의 얼이 있나, 뭐가 있나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는 걸. 먹고 마실 걸 비싸게 파는 동네일 뿐. 외국에 나가서도 마찬가지였는데, 오사카에서 오사카 성을 보고 처음으로 한 생각이, 아 사진하고 똑같구나....였다. 내가 그낭 뭘 보는 데 무덤덤한 인간인 탓도 있을 거고...아는만큼 보인다고, 내가 역사 건축 미술에 좀 더 흥미가 있었으면 다를까 싶어도, 사실 유래나 전설을 알고 찾아간 곳도 감흥이 크진 않긴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일종의 확인 작업에 가까웠다. 아 정말 석상에 혀가 없네! 이것도 사진하고 똑같구나! 부다페스트에 도착해서 몇 군데 둘러본 지금도 태도가 크게 다르진 않은데(그래도 야경은 정말 멋있다. 강추!), 그래도 흑교회가 가르쳐준 것이 하나 있으니...도시의 명소는 결국 그곳의 사람들이 남에게 가장 보여주고 싶고 자랑하고 싶은 예쁜 얼굴이라는 것이다. 특히 도시의 중심인 광장에서 이러한 점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광장은 오직 보여주기 위한 장소다. 무언가를 감추기 위해 광장에 가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그래서 브라쇼브는 카사 바그너가 있는 독일식 광장을 자랑하고, 부다페스트는 헝가리의 역사를 이끌어나간 영웅들을 기리는 영웅 광장을 거창하게 만들어놨다. 물론 이 도시들도 몇 블록만 옆으로 빠지면 다른 얼굴들이 많다. 브라쇼브는 구시가지를 벗어나 기차역까지 가는 길에 공산주의 시절의 아파트가 우중충한 장벽을 이루고 있었다. 부다페스트에서는 캐리어 한 대만 끌고 다니는 집 없는 노인들을 수도 없이 목격했다. 도시 홍보영상에는 결코 넣지 않을 우울한 풍경들이다. 하지만 인간이 다들 잘나고 못난 점이 있듯이, 도시가 못난 얼굴이 있다 하여도 그게 결코 잘난 부분을 거짓으로 만들진 않는다. 더불어 우리가 멋있고 예쁘게 보이고 싶어하듯이, 도시도 그러할 것이라고 의심치 않는다. 도시에 오는 손님들에게, 우리는 누구라거 말하는 대신 유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을 사랑해달라고...

그렇게 돌이켜보면 부쿠레슈티도 제법 멋진 곳이 하나 있었다. 인민 궁전은 아니다. 거긴 없애기에도 너무 거대한 건물이다. 내가 부쿠레슈티 시민이라면 분명 혁명광장은 자랑스러울 것 같다. 이름 그대로 1989년의 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광장이다. 비록 당시에만 천명이 넘는 사람이 죽고, 지금도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건 아니지만, 역사는 천천히 전진하고 있고, 그 흐름을 바로 시민들이 만들었다고...인민 광장을 바라보며 시작한 워킹투어는 그 혁명 광장에서 끝났다. 가이드는 마지막으로 혁명 광장 옆의 어느 극장을 가리켰다. 이 극장은 혁명 이후에 시민들의 모금으로 만들어진 곳이죠.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여기만큼 부쿠레슈티다운 곳은 없을 거예요. 1989년처럼 부쿠레슈티의 시민들이 한 마음을 모아 지은 건물이니까요. 투어는 여기서 마무리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4/11/25

Posted by 시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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