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고 지난 밤에 꾼 꿈을 생각해보자. 사실 점심에 일어나고 지난 낮에 꾼 꿈이라도 크게 상관은 없다. 꿈 속에 있었던 일은 있을법한 이야기일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꿈을 꾸면서 이것이 꿈인지 인지를 하는 사람도 있을수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내가 꾸는 꿈은 보통 전혀 있을 법한 이야기가 아니고, 나는 꿈을 꾸면서 단 한 번도 이것이 꿈이라고 의심해 본적이 없다. 예컨대 어린 시절 나는 꿈 속에서 죠리퐁 봉지를 열었고, 봉투 속은 텅 비어 있었다. 마침 핵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뭐 아주 장대한 꿈이었는데, 그것을 보며 내 친구는 진지하게 "방사능의 영향이야."라고 말했고, 나도 역시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래서 핵이란 무서운 것이구나. 일년이 지나고서야 핵이 터진다고 죠리퐁 내용물이 날라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말았다. 그렇게 되면 죠리퐁 공장이 날라가는 것이다.

  2006년, 죠리퐁을 먹어본 적이 없을 것 같은 맨체스터의 경감(DCI) 샘 타일러도 비슷한 문제를 앓게 되었다. 그는 그 젊은 나이에 초고속으로 승진했고, 그렇다고 그 사이에 딱히 손을 더럽히지도 않고 아직 정의감과 경찰의 사명감으로 똘똘 뭉친데다가 정치적으로도 올바른 인물이다. 다만 절차와 증거에 쫓겨 왕성한 열혈 경찰의 모습은 전혀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심증은 확실하나 물증이 없는 살인마를 쫓아 역시 경찰인 그의 여자친구는 명령까지 어겨가며 범인을 쫓아가다 역으로 납치당하고, 샘은 울음이 복받쳐 아이팟에 데이빗 보위의 'Life on Mars?'를 틀어놓고 운전을 하다가 잠시 숨을 고르려고 차에서 내린다. 그 때 뺑소니 차량은 그를 치고 지나가고, 샘이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보니 여전히 음악은 나오고 있었는데 다만 카세트 테이프에서 나오고 있었을 뿐이다. 그렇다. 이곳은 1973년 맨체스터다. 그는 여전히 형사고, 다만 계급이 경위(DI)로 내려갔으며, 런던 하이드에서 맨체스터로 온 것으로 되어있고, 맨체스터 경찰은 오직 직감만 따르는 권위적이고 난폭한 경감 진 헌트가 지휘하고 있었다.

  그러나 단순히 시간을 거슬러왔다고 보기에는 영 수상한 점이 많다. 아하 그렇구나, 나는 차에 치였고 1973년으로 타임 슬립했구나, 하고 만족스럽게 납득하기에는 이 1973년은 좀 이상한 냄새가 난다. 간혹 그에게는 목소리가 들린다. 주로 텔레비전이나 전화기를 통해서 2006년의 목소리가 들리거나 환영이 보이는 것이다. 절대 포기하지 말라느니, 혈압이 떨어지고 있다느니, 약을 잘못 먹였다
느니. 간혹 90년대 브릿팝 밴드였던 '펄프'의 음악이 들리기도 하고, 심지어는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음악이 환청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는 이 모든 것이 환상이라 확신하며 옥상에서 뛰어내리면 잠에서 깨겠지 싶었지만, 그 순간 그새 생긴 동료 경관 애니가 자기 손바닥의 모래를 보라고, 이렇게 디테일이 뛰어난 꿈이 어디있냐며 그를 만류한다. 샘은 꿈 속에서 핵폭탄이 터져 죠리퐁 내용물이 사라졌다고 단순히 믿는 나보다 훨씬 논리적이고 직감이 뛰어나지만 그도 이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헷갈려한다. 게다가 간혹 보이는 노골적인 현실과의 연결고리가 그를 더 미치게 하는 것이다. 옛 상사라든지, 2006년에 붙잡았던 범인을 만나기도 하고, 심지어는 자신의 가족을 보기도 한다. 저녁 황금 시간대 BBC에서 드라마가 시작하고, 가련한 샘 타일러가 매번 꿈 속으로 걸어들어가면서 하는 독백이 있다. "내 이름은 샘 타일러다. 나는 사고를 당했고, 일어나 보니 1973년이었다. 내가 미친 것일까, 혹은 혼수상태에 빠진 것일까, 아니면 정말 시간을 거슬러 올라 간 것인가? 무엇이 진실이든가, 마치 내가 다른 행성에 착륙한 것만 같다. 만약 내가 이유를 알아낸다면, 집에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데이빗 보위(David Bowie)

  네이버 웹툰 「야심작 정열맨」보다 더 야심작 냄새를 풀풀 풍기는 이 드라마는 BBC에서 방영된 「라이프 온 마스」다. 분명 상당한 돈을 쏟았을 걸로 보이는 1970년대를 완벽히 재현한 세트장과, 칙칙한 색감, 다양한 카메라 앵글과 뛰어난 연출, 배우들의 완벽한 연기가 어우러진 이 드라마를 보고 <씨네 21>의 김도훈 기자는 '21세기 영국 TV가 낳은 최고 걸작'이라고 평했다. 이 드라마의 제목은 데이빗 보위가 1971년에 발표한 곡인 'Life on Mars?'에서 따온 것이다. 데이빗 보위는 70년대에는 스스로를 '지기 스타더스트'라는 이름의 외계인을 자처했다. '지기 스타더스트'는 지구 멸망까지 5년이 남은 시점에서 인류를 음악으로 구하기 위해 내려온 외계인이라고 한다. 그러기에 그 이전에 발표된 'Life on Mars?'라는 곡의 제목도 참 우주적으로 들릴지 몰라도, 오히려 'Life on Mars?'는 세계에 대한 굉장히 시니컬한 우화다. 선원들은 댄스장에서 싸우고 있고, 경찰관은 엉뚱한 사람을 패고 있고, 쥐떼들이 몰려가고 있고 미국의 상징인 미키 마우스가 황소처럼 커진 상황에서, 우리 지구는 뭐 이렇게 개떡같은 상황에 봉착해 있는데 화성은 어떤가요, 하고 묻는 노래다. 70년대 청년 보위의 오드아이에 비친 상당히 개떡같은 세상만큼 샘 타일러도 눈을 떠보니 1973년이라는 개떡같은 상황에 봉착한다. 그래, 그의 말대로 마치 다른 행성에 착륙한 것 같다는 것이다.

  샘이 보는 1973년은 야만적이다. 그 야만성은 진 헌트라는 인물로 대표된다. 1973년 맨체스터 경찰서는 담배연기가 자욱했고, 회색빛으로 칙칙하다. 진 헌트는 용의자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정해진 절차를 무시하며, 실수이기는 하지만 억울한 사람을 감옥에 넣기도 하며, 여성 앞에서도 성적인 언사를 서슴치 않고, 동성애자들을 무척 싫어하며, 때때로 뒷돈을 받아 챙기는 경우도 있다. 이를 보고 경악한 샘이 1973년 경찰서에 나가자마자 한 일이 증언을 녹음하고 사건 현장을 철저히 보존하도록 지시한 것이다.

진 헌트와 샘 타일러

  이런 식으로 샘은 사사건건 진 헌트와 대립한다. 그러나 샘이 변화를 가져오는 것은 이런 방법론일 뿐이지, 결코 맨체스터 경찰의 근본을 바꾸지는 못한다. 그 이유의 첫째는 진 헌트가 악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과격하고 거친 마초이지만, 그는 누구보다 부하를 아끼고 범죄에 대한 증오로 넘친다. 그것이 비록 정의감에서 나온 것은 아닐지라도 말이다. 샘의 수사방식을 따르는 부하 경찰 크리스 스켈튼이나, 샘에게 노골적으로 반발하는 레이 칼링 모두 진 헌트가 없으면 아무도 따를수 없다고 말할 정도다. 라이프 온 마스에서 웃음을 주는 컷들은 보통 이런 진 헌트의 1973년과 샘 타일러의 2006년의 문화적, 역사적 차이를 이용한 것들이지만 동시에 이것이 더 큰 가치관의 충돌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조직 내의 실수를 그대로 덮을 것인지 아니면 그것을 밝힐 것인지, 범죄자를 잡기 위해 다른 범죄자를 미끼로 사용한다든지, 혹은 이민자들이 받는 처우와 그들이 저지르는 범죄에 대한 태도에 대해서 그들의 반응은 무척 다르다. 샘은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로 이런 문제를 깨끗히 다루려고 하고, 진은 마이 웨이를 달린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이런 논의는 현대에도 계속되고 있다. 다만 이것을 극적으로 충돌시키기 위해 샘이 1973년에 있는 것이다. 마치 심리학에서 말하는 '그림자'가 시각화되어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문제를 보여주는 것만 같다.

  카메라는 단 한 번도 샘이 없는 장소를 찍지 않는다. 딱 한 번 샘이 없는 장소를 보는 것도, 샘의 몸이 병원의 약물 과다 투여로 인해 극도록 민감해져 있을때 환영처럼 TV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인다. 요컨대 샘이 느끼지 못하는 것은 우리도 보고 듣지 못하는 것이다. 텔레비전과 무전기, 전화기를 통해 간혹 오는 이상한 화면과 소리까지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이라도 보고 듣지 못하고, 샘이 이를 의아하게 여겨 물어보아도 그들이 오히려 샘일 이상하게 취급한다. 이것이 내가 샘의 1973년이, 샘이 스스로 제시한 세가지 가설 중 '혼수상태'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다. 샘 스스로도 간혹 의구심을 느낄 정도의 이상한 작위성이 곳곳에 넘쳐 흐른다. 2006년과의 수많은 접점 말이다. 어릴 때 일을 하러 멀리 떠

이런 표지판이 있을리가 없다.

났다는 아버지를 다시 만나게 되는데, 그 아버지는 알고보니 악랄한 범죄자였다. 구해준 여자는 미래의 여자친구의 어머니였고.

  그러면 패기를 잊은 2006년의 경찰이 혼수상태가 만들어놓은 환상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아이러니컬하게도 살기 위해 사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과제다. 혼수상태 속의 삶은 마치 게임같다. 오후 2시에 2006년 어머니의 목소리가 생명 유지 장치를 뽑을 것이라고 하고, 지금 인질극을 벌이고 있는 범인이 오후 2시에 사람을 죽일 것이라고 외친다. 기댈 것이 별로 없는 절박한 샘은 그 한가닥 우연의 일치에 기대어, 2시에 인질극을 아무 사상자도 없이 무사히 종결시키고 마침 어머니의 목소리가 샘이 살짝 움직였다며 생명 유지 장치를 뽑지 않겠다고 말한다. 이렇게 그는 여러번 살아남아, 계속 살 수 있는 유예기간을 얻어가고, 현재로 돌아가는 실마리를 찾아가며 과거의 비밀을 알아간다.

  몸에 직접 전해지는 충격은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기에 가장 충분한 요건이다.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확인할 때, 보통 볼을 꼬집지 않는가? 이 드라마에서도 비슷하게, 격하지만 활동적인 진을 위시한 팀은 샘에게 저런 살아있다는 감정을 더해주는 요소이다. 꿈에서 깨기 위한 과제가 이렇게 삶의 냄새로 넘친다면 이제 이것이 꿈이든가 말든가 무슨 상관이랴! 「블레이드 러너」같은 영화가 인간이 아닌 존재들의 인간적인 모습을 통해 인간의 조건을 물어봤다면 이제「라이프 온 마스」는 현실같은 환상을 통해 현실의 조건을 묻고 있는 것이다. 샘이 1973년에 자주 가는 술집의 바텐더 넬슨은 고민하고 있는 샘에게 이렇게 말해준다. 느낄수 있다면 살아 있는 것이라고. 그는 1973년에서 훨씬 직접적인 관계를 구축하는 것은 물론, 심지어는 2006년 자신 주위의 인물과의 접점을 훨씬 많이 찾아낸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환상에 빠져 사는 것에 대한 옹호가 아니다. 방속에 틀어박혀 게임 캐릭터는 배신하지 않는다면서 아키하바라 한복판에서 칼을 휘둘러 사람을 죽인 젊은이에 대한 변호는 되지 않는 드라마다. 맞는 말이다. 게임 캐릭터는 결코 배신을 하지 않을 것이다.

  1970년대 10대였고 섹스 피스톨즈와 클래쉬를 들을 수 있었던 젊은이들이 나이를 먹고 구상했기에 이 드라마는 1973년이 배경이었고, 또 그 시대에 대한 향수가 들어가 있는 것은 맞다. 그러나 게임 속의, 원하면 마음대로 해주는 캐릭터들과 달리 진 헌트는 츤데레가 아니라 말 그대로 폭력 반장이고, 마을은 추억이 물든 아름다운 곳이라고 보기보다는 공업도시의 매연이 둥둥 떠다니는 곳이다. 그리고 샘의 아버지는 결국 샘을 배신했던 것이고, 다른 여러 진실도 이만큼이나 추악하다. 똑같지 하얗지만 담배 연기가 눈처럼 추억을 불러일으키지는 않는다. 이것이 아름다운 환상인지 아닌지는 간단하게 이런 질문을 스스로 해보면 된다. 내가 저 시대로 가서 살 수 있을까? 일단 인터넷 중독자인 나는 제외된다.

  그러나 이런 곳에서 결국 샘은 마침내 스스로 결정하고 사람들과 신뢰를 쌓을 수 있는 조건을 만난 것이다. 1973년에 그는 런던 하이드에서 온 것으로 되어 있지만, 그는 하이드에 대해서는 하나도 모른다. 그가 알게 되는 것은 맨체스터 경찰 뿐이다. 그는 환상 속에서 자신의 뿌리와 타인을 인지하고 이해한다. 2006년에는 취조실의 감시카메라가 그를 비추고 있었고, 이제 그는 그의 눈으로 진 헌트가 사람을 패든, 용의자가 대답을 하든 보게 되는 것이다.

  카메라는 늘 우리를 속인다. 단순한 색감의 조정만으로도 의도적으로 아름답게 꾸며진 최신 도시와 70년대의 황량함이 그대로 비치는 매연 속 거리 중 후자를 아름답게 보이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배우들이 더욱 더 열띤 연기를 선보이기에 후자는 더 멋져보인다. 귀를 쓸어 내리는듯한 타이어의 소리, 70년대 최고의 스타들이 불러대는 노래들! 라이프 온 마스는 꽃과 음악으로 70년대를 보냈던 젊음들이, 이제 나이를 먹고 자신들의 격렬했던 청춘에 보내던 찬가로 보일지도 모른다.

  허나 그런 향수만 있을까? 샘의 동료는 여러 비리와 분투하는 샘을 보고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세상을 바꿀수 없어요. 살아가는 법을 배울 뿐이죠." 그녀의 말은 틀렸다. 샘은 정말 최후의 순간에 세계를 바꾼다. 드라마가 1973년 방식과 2006년 방식에 모두 보여주는 공정함은 이 긴 서사가 결코 '옛날이 좋았지.'라고 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결국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주체로서 격렬히 흔들릴때 생의 감각도 마침내 같이 흔들릴 것이다. 펑크가 하나의 거대의 쇼였다고 하더라도, 꽃과 음악으로 전쟁을 막을수 있었다고 생각한 70년대 젊은이들의 마음은 진실이듯 말이다.

그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Posted by 시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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