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마니아 도시 하나를 건너띄고 바로 부다페스트로 왔다. 두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먼저 루마니아에 있는 내내 비가 내렸고 그 다음주도 내내 내린다고 하니 도저히 버틸 자신이 없었다. 짜증이 많이 났다. 마침 일기예보를 보니 부다페스트는 날씨가 괜찮은데다가 주변의 많은 이가 부다페스트가 정말 좋다고, 또 여행하다 만난 사람들도 부다페스트는 좋았다며 다을 입을 모아 말하니 비 오는 루마니아보다는 훨씬 구미가 당겼다. 두번째 이유는...사실 이게 결정적이었는데, 지난 토요일 대 아스날 대 맨유 경기가 있었다. 그렇다. 이걸 보려고 아예 여행 일정을 바꿨다. 원래 일정대로 하면 경기 시간 때 열차 안이고....그렇다고 루마니아에서 하루 더 머물자니 시골마을에서 경기를 볼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겠고, 경기보느라 굳이 일정이 늦춰지는 것도 싫었다. 그래서 결정을 내린 그날 야간열차를 타고 루마니아를 떴다. 사실 빅매치라서 챙겨봐야겠다는 마음보다는...촉이 정말 좋았다. 이번에는 맨유 잡겠다, 모든 지표와 상황이 우리에게 유리하게 보였는데 그래서 나름 과감하게 움직인 건데.......이 글을 야간열차 13시간 타고 온 후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경기를 본 내게 패배를 안겨준 아스날 썅넘들에게 바친다.


첫날은 에어비엔비에서 찾은 어느 아주머니의 집에서 머물렀고, 둘째날부터는 쭉 한인민박에 있었다. 한국어로 대화를 한 지가 오래 돼서, 아침밥 주는 데좀 가보려고 등등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어떤 이유보다도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었으니...라면이 먹고 싶었다. 정말 그게 다였다. 그리하여 인터넷에서 대충 민박 몇 곳을 찾은 후, 부다민박이라는 곳을 찾아갔으나 문이 잠겨있었다. 사장님에게 카톡을 보냈다. 오늘밤 1인 예약 되나요? 됩니다. 언지 도착하세요? 내가 대답했다. 지금 문 앞인데요....라고 하니 화들짝 놀라시며 일단 벨을 눌러 안으로 들어가란다. 바로 찾아가서 체크인을 해주겠다며. 하지만 들어간 후 한참을 기다려도 사장님은 오지 않았다. 조급할 것도 없었기에 거실에 앉아 느긋하게 사진정리를 하는데, 사장님 카톡이 왔다. 어디 계세요? 저 지금 가게인데...화들짝 놀라 직원에게 민박집 이름을 물어봤다. 여기는 최고집이에요. 부다민박 아닌데요...화들짝 놀라 확인해보니 내가 여러 민박집 지도를 다운받아 보다가 헷갈린 것이었다. 부리나케 부다민박으로 뛰어갔다. 멀진 않았다.


나중에 부다민박 사장님이 말씀하시길 이런 적이 처음은 아니란다. 딱 한 번 있었다고....그러니까 내가 두 번째였다.


민박에서 4일을 더 있었는데, 매일이 즐거웠다. 당연히 라면도 먹었고...막상 가보니 다른 무엇보다도 긴장이 풀어져서 편했다. 여럿이 다니니 늦게 다녀도 주위를 두리번거릴 필요도 없었고, 호스텔에서 외국인들과 대화할 때처럼 신경을 곤두세우며 영어를 들을 필요도 없고, 코스 짜는 것도 얼추 많이 간다 싶으면 끼면 되고! 처음 2일은 비수기답지 않게 사람도 꽉 차서 놀기도 좋았다. 부다페스트는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야경이 압권인데, 이것도 다같이 택시를 불러가면 금방이었다. 다른 숙소에 머무르는 분들도 어찌 듣고 찾아왔는지 세 분이 참여하셨다.

그 중 정말 인상 깊은 분이 있었다. 갤레르트 언덕 초입에서 다들 어디로 가야하는지 헤매고 있자, 그냥 저쪽으로 가면 된다고 간단하게 교통정리를 하셨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아냐고 여쭤보니, 이번이 7번째 방문이란다. 이젠 눈 감고도 다니시겠네요, 라고 일행이 물어보니 딱히 부정하지는 않았다. 12년 전에 처음 온 이후로 시간이 날 때마다 가끔 들린다고, 사진은 예전에 많이 찍었다면서 카메라도 안 들고 오셨다. 제가 영화 글루미 선데이를 정말 재밌게 봤거든요. 글루미 선데이의 배경이 부다페스트에요.


몰려다니는 것도 나름 재미가 있었다. 언덕 올라가는 길에 단체사진을 찍는데, 역시 관광객으로 보이는 다른 외국인 무리들이 껴들어서 같이 찍는다든지... 서로 이런저런 포즈 취하면서 사진 찍고 노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혼자 다닐 땐 거의 안 일어나는 일이다. 술이 아닌 식사를 다 같이 한 것도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IHB 나온 이후로는 처음이니. 식사가 끝나고 계산을 하려고 하는데, 7번째 부다페스트에 오셨다는 형님께서 아까 계산 하셨단다. 그리고는 커피를 마시러 갔는데, 이것도 계산하시고는 홀연히 본인의 숙소로 들어가셨다. 저도 학생 때는 많이 얻어먹었어요, 라고 이유를 대면서. 헤어지기 전에 카톡 아이디를 교환했는데, 카톡 아이디에도 부다페스트가 들어가있었다. 부다페스트를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구나....모든 걸 쏘고 신기루처럼 사라진 그 분을 우리는 부다페스트의 앤젤이라고 불렀다.


여행 온 이후 가장 관광객처럼 보낸 3일이었다. 몰려다니면서 사진 찍고, 다 같이 온천가서 놀고, 숙소로 돌아오면 라면 끓여먹고, 다 같이 시장 가서 (아이)쇼핑하고 밥 먹고, 다 같이 공연보러 가고, 다 같이 또 야경보러 가고, 오는 길에는 술 사와서 다 같이 마시고....서로 어떤 여행을 했는지 앞으로 할 건지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내 입장에서 듣다가 재밌었던 건,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가 거의 코스처럼 정해져있다 보니 그 열명 남짓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다른 도시에서 마주친 이들이 꽤 있었다는 것이다. 나도 짧게짧게 동행이 가끔 있었으면 좋겠는데...예를 들어 지금처럼 기차만 7시간 타고 있을 때가 그러하다. 자그레프는 왜 이리 뭔지.


하도 즐거웠다보니 후폭풍이 두려웠다. 예상은 적중했다. 민박에서 보낸 며칠 동안에는 93일도 왠지 짧은 것만 같아서 아쉬웠다. 반 년이라면 더 재밌을텐데. 어제는 시오포크에서 혼자 밤을 지샛다. 그때는 93일이 대장정이었다. 이런 밤을 또 몇 번이나 보내야 이 짓이 끝나는지 갑갑했다. 이런 아무 일 없는 도시는 그중 몇 곳일지.

애초에 시오포크는 자그레프 가는 중간에 있는 도시라 잠깐 머물기로 한 것이다. 시오포크는 헝가리 중심에 있는 발라톤 호수를 끼고 있는 휴양도시인데, 여름에 사람들이 잔뜩 몰려들다가 계절이 바뀌면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사람이 없는 건 괜찮다. 어차피 금방 뜰 건데. 하지만 그게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는 걸 자그레프로 떠나야했던 오늘 아침에 발견했다. 여기서 자그레프로 가는 열차가 없단다. 원래는 있는데 요 몇 달간 운행하지 않는단다. 그래서 또 모르는 소도시로 버스 타고 가서 환승을 하든, 아니면 부다페스트로 돌아가서 자그레프 가는 열차를 타든 하란다. 고민하다 후자를 택했다. 돌아온 부다페스트는 흐리고 싸늘했다. 다뉴브 강은 무심하게 흘렀다. 강 건너 부다 왕궁은 바람에 흔들리지도 추위에 얼지도 않았다. 사람들은 사진을 찍었다. 강변을 한참 걷다가 돌아왔다. 다시 한 번 93일이 사소해졌다.


2014/11/28

Posted by 시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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