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년에 정말 뿌듯하고 의미있게 보내는 날이 얼마나 될 지 모르겠다. 중간고사와 기말고사가 다가올 때 일의 효율이 좋아지는 것을 제외할 때 말이다. 대부분은 초조해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거나 안한 채 보낸다. 기억에 남는 날이라고 꼭 좋은 날일리가 없다. 그런 날은 술과 함께 흘려보내고, 숙취에 시달리며 다음 하루까지 더 날아간다. 한 해에 정말 괜찮고, 사진으로 박아둘 만한 날을 모아두면 음력으로도 한 달을 못 채울까봐 두렵다.

  그런데 그 사진으로 박아둔 순간 중 몇 개는 정말 평생 기억할 만한 것이다. 여행이 바로 그런 순간 아니던가. 여행을 갔다오면 남는 것은 사진 뿐이라던가. 굳이 앞으로 가라앉을 태평양의 섬들을 떠돌지 않아도, 그 장소도 변할 것이고, 기억도 점점 시들테고, 같이 갔던 사람과의 관계도 변할 것이니, 정녕 사진으로 박은 그 찰나는 그 사진으로 추억하는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내게 뉴욕 쌍둥이 빌딩 사이를 횡단한 곡예사의 이야기, <맨 온 와이어>는 화려한 여행기처럼 들린다. 정말 두 번은 못할 여행이다. 3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는데, 쌍둥이 빌딩은 그라운드 제로가 되었고, 우정은 이제 흔적기관처럼 자리잡고 있으니까. 사람이 추억을 먹고 산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평생 배불리 먹고 남을만한 추억이다.

  1974년 8월 7일 아침, 뉴욕 쌍둥이 빌딩 근처를 지나가는 사람들은 단 한 명의 게릴라를 목격했을 것이다. 고개를 치켜드니 411 미터 위에서(서울 남산이 265.2 미터라고 한다.) 남자 하나가 공중에서 걸어다니고 있었겠다. 아마 그 정도 거리면 줄은 거의 보이지도 않았을 테니. 옆에는 자신만큼 입을 벌리고 있는 사람들이 한 무리 있었을 것이다. 눈치는 못챘겠지만, 그 중에는 이 사건의 공범들도 섞여 있었다. 경찰들마저 팔짱을 끼거나 손을 허리에 대고 두 번은 없을 여행을 지켜보고 있었다. 줄이 걸쳐있는 두 건물의 옥상에는 역시 공범들과, 경찰들이 있었고, 게릴라는 경찰을 살짝살짝 골려가며 기묘한 대치를 하고 있었다.

  <더 문>에서 두 명의 복제인간들이 보여주었듯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추억은 사실 우리들 만의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비슷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대부분의 기억은 매채가 만들어주고, 여행지의 추억은 여행사가 정한다. 모든 것은 모두가 알 수 있도록 기획된다. 놀라움마저 기획의 대상이다. 게릴라 콘서트가 어디 게릴라스럽던가? 방송사의 자막으로도 광고를 하는 게릴라 콘서트는 결국에는 스타를 비춘다. 게릴라 콘서트는 관객에게 놀라움을 주지는 못한다. 오히려 놀라는 것은 스타다. 예쁘게 포장된 게릴라 콘서트는 안방까지 훌륭하게 배송된다. 모든 기획에는 의도가 숨어있고, 그 유인은 대개 돈이다. 이제 게릴라는 문자 그대로의 게릴라 밖에 남지 않았고, 정말 우리를 놀라게 할 만한 일은 좋지 않을 일 뿐이다. 쌍둥이 빌딩에 대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끔찍한 9/11이 되었다.

  그래서 곡예사 피에르 페티의 '테러'는 더욱 특별하다. 피에르 페티가 체포되자 기자들은 그에게 질문공세를 퍼부었다. 같은 질문이었다. "왜 그랬습니까?" 영상에서 그는 간단하게 답한다.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 나이를 먹은 그는 넉살 좋게 투덜거렸다. "미국인들은 늘 이유를 캐물어요. 이유가 뭐가 중요해요?" 이 모든 것은 인기가 없던 쌍둥이 빌딩 광고를 위한 노이즈 마케팅도 아니었고(결과적으로 마케팅에 조금 도움이 되긴 했다.), 펜타곤의 음모도 아니고(30년 후에 펜타곤은 음모설에 휘말리게 된다.), 환경보호단체의 시위도 아니며(종종 과격하게 나가는 일이 있지 않은가.), 설 자리를 잃은 주정뱅이의 소란도 아니다.(술 마시고 했으면 딛는 순간 떨어졌을 것이다.) 이 위대한 줄타기는 해프닝에 가깝다. 페티의 말대로 이렇게 엄청나고 신비한 일인데 왜 기획의도 따위를 따지는가? 이것은 합당하게 사리를 따지는 것과는 다르다. 방금 본 것이 안전장치 하나 없는 날것 그대로의 무한도전이니까. 이 평생 기억할 만한 찬란한 사건은, 우리네 인생 최고의 여행처럼 스틸컷으로만 남아있다.

  하지만 다큐멘터리는 그대로 '땡'하고 끝나지 않았다. 9/11을 보여주지는 않지만, 위대한 범죄에 함께했던 친구들은 그 순간만을 추억으로 간직한 채 헤어지고 말았다. 비행기를 타며 고국으로 돌아가는 와중에, 페티는 침을 튀기며 다음 계획을 설명하려 했지만, 친구들은 모두 지쳐버렸던 것이다. 필리페 페티는 도전정신이 넘치는 남자였고, 과거에 파묻혀 살지도 않았지만, 그날의 도전 비슷한 것을 다시는 할 수 없었다. 판사가 그를 감옥에 내던지지 않고, 불우아동 앞에서 공연하는 조건으로 풀어준 그 날부터 그는 합법적인 유명인이었다. 영화에는 나오지 않지만, 그는 이후 나이아가라에서 강을 건넜고, 에펠탑에서도 쇼를 했다. 다만 다시는 몰래 숨어들어가서, 몰래 장비를 설치하여 공연을 할 수는 없었다. 그때부터는 타의라도 기획의도가 당연 생기기 마련이다. 페티 본인에게 물어봐도 쌍둥이 빌딩에서의 곡예가 가장 아름다웠다고 인정할 것이다. 하지만 그 해후가 씁쓸하다고 이 이야기가 동화가 아닌 성인극화가 될 필요는 없다. 어차피 누구에게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날은 하루 뿐이다.
Posted by 시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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