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초반이었다. 앞으로의 여행 계획이 대화의 주제였다. 상대가 누구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벨기에에 가면 브뤼주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브뤼주는 브뤼셀보다 위에 있는데, 중세시대 흔적이 많이 남아있는 예쁜 도시래요. 암스테르담처럼 운하마을에어서 배 타고 관광하는 것도 가능하다는데요. 상대가 신기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요? 브뤼헤도 예쁘대요. 거기도 운하가 있고 건물들이 예쁘다고 하던데. 그렇구나...하고 넘기려니 그런 유명하고 비슷한 관광지가 벨기에 북부에 두 개나 있다는 게 선뜻 믿기지는 않아서 얘기를 좀 더 해보니, 역시나 같은 도시였다. 이후에도 종종 다른 이들과 벨기에 얘기를 할 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브뤼주라고 말했다가 다들 어리둥절해보이면 브뤼헤로 정정하곤 했다. 브뤼헤가 훨씬 일반적인 표기인 듯 하다. 벨기에는 네덜란드어와 프랑스어를 둘 다 사용하는데, 아마 그 차이가 아닐까 싶다. 아님 말고.

하지만 내가 이 도시를 처음 알았을 때는 분명 브뤼주였다. 감명 깊게 본 영화의 배경이 바로 이 도시였다. 콜린 패럴(폰 부스), 브렌던 글리슨(매드아이 무디!), 랄프 파인즈(볼드모트!)가 출연하는 <킬러들의 도시>였다. 당시 지금에 비하면 영화를 훨씬 열심히 보던 때라서 확실히 기억이 난다. 씨네21 같은 잡지도 매주 챙겨읽었는데. 거기서도 브뤼주가 도시의 배경이라고 똑똑히 적혀있었다. 또한 이 영화 감상평이 적힌 각종 블로그 포스트에도 죄다 브뤼주라 적혀있었다. 'In Bruges'라는 평범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도시명 때문에 나름 신비스러웠던 제목을 <킬러들의 도시>라는 80년대 홍콩 쌈마이 액션영화 제목처럼 바꿔놓은 수입사의 행태를 성토하는 사람도 있었고. 어쨌든 내 기억 속에서는 브뤼주였어! 하지만 브뤼헤가 더 정확한 표기 같다는 생각은 든다. 내가 프랑스어도 네덜란드어도 모른다만, 아마 관광지로 유명해지면서 제대로 된 이름을 찾지 않았을까.

<킬러들의 도시>는 제작 당시 시당국과 시민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고 한다. 그전까지 브뤼헤에서 헐리우드의 대형 자본으로 영화를 찍은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영화를 통해 브뤼헤를 전세계에 홍보하여......당연히 관광객을 유치하려 한 것이다. 브뤼헤의 온갖 장소에서 영화를 찍게 해준 건 물론이고, 박물관에 고이 모셔둔 15세기 걸작 미술품들에 조명을 쬐고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을 허락했다. 심지어 영화의 시간적 배경인 연말에 맞춰주기 위해 도시 전체가 일치단결하여 3월까지 크리스마스 장식을 유지했다. 도시 전체가 세트장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고생한 결과가 아주 나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모차르트와 함께 잘츠부르크 시를 먹여살리는 <사운드 오브 뮤직>만큼은 아니어도, 스마트폰 앱으로 브뤼헤 관광지에 대한 정보를 찾다보니 '<킬러들의 도시>에서 등장인물 누구가 뭐뭐하던 곳이다'와 비슷한 설명이 여기저기 붙어있었다. 나만 해도 영화에서 기억나는 장소 위주로 움직였다. <비포 선라이즈>의 빈에서도 이렇게는 안 했는데 ㅋㅋ 뭐...브뤼헤가 도시가 작아서 부담이 없긴 하였다.

가장 먼저 가본 곳은 콜린 파렐이 연기한 영화의 주인공 레이와, 브렌단 글리스가 분한 선배 킬러 켄이 올라갔던 종탑이었다. 무려 366개의 계단으로 되어있는데, 굉장히 좁고 가파르다. 그래서 사람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서로를 보고 놀란다. 내려갈 때는 이런 일도 있엇다. 어떤 남자가 내가 튀어나오는 걸 보고, 자기 뒤에서 헥헥거리며 땅만 쳐다보고 올라오던 여자친구를 손을 뻗어 제지하려다가 손날로 콧등을 때렸다. 여자가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남자가 여자를 껴안으며 뭐라뭐라 말했다. 괜찮냐고 물어보는 말일 것이다.

영화에서 투덜이 레이는 계단을 타다가 힘들다고 내려오고, 선배 켄만 끝까지 올라갔다 온다. 레이는 광장의 벤치에서 구시렁대면서 앉아있고, 뚱뚱한 캐나다 관광객들에게 괜한 시비를 건다. 당신네들 코끼리 같은 덩치로는 올라가다 벽 사이에 끼게 될 것이라고. 그리고 켄이 돌아오자 묻는다. 저기 올라가면 뭐가 그리 좋아요? 아래 경치가 볼만해. 레이가 대꾸한다. 아래 경치는 여기 아래서도 잘만 보이는데요. 그러자 켄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너는 최악의 관광객이라고 말한다.

직접 올라가보니 켄 말대로 아래 경치가 잘 보이긴 한다. 날씨만 좋았으면 참 좋았을텐데라는 투정을 몇 번째 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하여간 그날도 그랬다. 비바람이 심하게 불어서 사진 찍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자꾸 렌즈에 빗방울이 튀겼기 때문이다. 몇 장 건지지 못한 게 아쉽다. 하지만 경치 이상으로 놀라운 걸 봤으니 그것으로 퉁쳐야겠다. 켄이 이걸 왜 빼먹었는지 모르겠다. 종탑의....종이다. 태엽과 톱니바퀴로 만든 기계장치가 47개의 종을 자동으로 연주했다. 솔직히 종 아래에서 듣는 소리는 귀가 찢어질 것처럼 요란하긴 했으나, 거대한 태엽에 철사슬이 알아서 척척 감기고 풀리는 모습은 지금 봐도 신기한게, 중세시대에는 정말 마법처럼 보였을 것이다.

성혈을 보관하고 있다는 교회를 잠깐 둘러보고 박물관에 갔다. 15세기에 히에로니무스 보스와 같은 화가들이 브뤼헤를 거점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당시 브뤼헤는 유럽에서 가장 번영한 도시 중 하나였으나...지금은 헐리우드 영화 한 편을 위해 3월까지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유지하는 관광에 사활을 건 도시가 되었다. 당연히 유럽에 권력이동이 일어나면서 브뤼헤에서 만들어진 유명한 미술품은 해외로 나간지 오래다. 당장 보스의 작품도 거의 다 마드리드의 프라도 박물관에 있다. 브뤼헤에는 <최후의 심판>이라는 세 폭 제단화 한 점만 남아있다. 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잏는 양식인데, 가운데 큰 그림이 있고 양쪽이 다른 그림 두 개가 붙어 있는 형식을 말한다. 그러나 이마저도 내가 갔을 때는 유지보수작업 때문에 가운데 그림이 빠져있었다. 황당했던 건 가운데 부분에 흑백사진을 대신 붙여놨다는 건데...아니 이왕 붙여둘 거면 컬러인쇄를 하지, 잉크가 아까운가.

보스의 그림에는 초현실적인 풍경이 많이 보인다. 그림 속 사람보다 거대한 과일이나, 선반에 정렬된 사람들은 20세기의 초현실주의 그림들을 연상케 한다. 실제로 살바도르 달리가 보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보스를 과격한 사상을 지닌 초현실주의의 선구자로 여겼다고 한다. 살바도르 달리 박물관도 브뤼헤에 있는데, 그게 이유일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최근 연구결과에 따르면 달리의 추측은 살짝 빗나갔다. 보스가 과격한 사상을 지녔던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오히려 교회의 사상에 충실했고, 따지고보면 그림의 내용도 교리에 충실하나 다만 표현방식이 독창적이었을 뿐이라고 한다.

아마 브뤼헤에서 가장 유명한 미술작품인 이 그림은 영화에서도 등장한다. 레이와 켄이 그림을 보고 나누는 대화는 좀 엉뚱하다. 켄이 먼저 말한다. 심판의 날이군. 알지? 하지만 무식한 레이는 모른다. 아뇨 그게 뭔데요? 음...그러니까, 지상의 마지막 날인 거야. 인간들이 자기들이 저지른 죄를 심판받는 날이지. 아, 그 다음에 누가 천국으로 가고 지옥으로 갈지 결정하는 거죠? 맞아. 근데 저건 뭘까? 레이가 대답한다. 연옥이요. 켄이 갸웃한다. 연옥...그게 뭐더라? 연옥은 중간에 낀 거에요. 완전 좆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좋지고 않고...토트넘처럼요. 대화가 잠깐 중단 됐다가 레이가 묻는다. 선배는 이런 거 믿어요? 켄이 되묻는다. 토트넘 말야?

박물관을 본 후 반나절만에 브뤼셀로 돌아왔다. 극중에서 레이는 이런 도시에 2주 있는 것이야말로 지옥 같은 일이라고 불평을 하는데, 아마 나도 며칠만 더 지냈어도 비슷한 말을 했을 것 같긴 하다. 조용한 중세 도시만큼 지겨운 게 별로 없다.


2015/1/22

Posted by 시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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