댄과 함께 자그레브를 돌고 저녁 7시쯤 돌아왔던 것 같다. 돌아와서는 축구를 한 경기 봤다. 선덜랜드 대 첼시...우리 둘 다 어느쪽의 편도 아니다. 따지자면 둘 다 첼시를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 선덜랜드 편이라고 할 수 있겠다. 경기는 지루한 공방이 이어지다 0:0으로 끝났고...할 게 없어진 우리는 맥주나 한 잔 하기로 하고 호스텔 로비로 갔다. 거기선 축구를 자꾸 사커라 불렀다가 풋볼로 정정하는 캐나다 유학생과, 호주 NGO에서 일하다 이번에 영국으로 이직한다는 남자가 있었다. 댄이 영국에서 왔다고 하니 관심을 보였다. 어디 살아요? 댄이 대답했다. 브라이튼에 살다가 최근에 캔터배리로 옮겼어요. 호주인이 다시 물어봤다. 첫 출근일까지 이곳저곳 둘러보려고 하는데, 그 동네 괜찮아요? 댄이 머뭇거렸다. 좋은 동네이기는 한데 겨울에 들리기는 영...그때 캐나다 유학생이 껴들었다. 겨울에는 어딜 가든 별로잖아요. 다들 빵 터졌다. 하지만 댄은 고국을 사랑했다. 분명 겨울에도 괜찮은 곳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얼마나 사랑하나면 영국맥주와 소세지가 독일 것보다 맛있다고 하고, 영국요리가 맛 없다는 건 먹지도 않은 인간들이 만든 편견이라고 주장하니까. 그는 기어코 겨울에 괜찮은 도시를 찾아냈다. 카디프는 겨울에 괜찮죠. 가봐요.

그래도 겨울이 나쁜 것만은 아니에요. 호주인이 말했다. 여름에 볼 게 더 많긴 하지만, 겨울에는...특히 11월 말부터 12월까지는 집을 떠났던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오잖아요. 지역민들하고 어울릴 수 있는 확률이 높죠. 크리스마스 마켓도 있고요. 캐나다 유학생이 껴들었다. 눈도 내리잖아요! 댄이 건조하게 대답했다. 눈 별로 안 좋아해요. 내가 거들었다. 눈 정말 싫어요. 유학생이 사람들이 왜 이리 메말랐냐며 농담조로 질타했다. 내가 군대에서 2년 동안 눈만 쓸었다고 이유를 대자, 그녀는 그럴만 하다고 동의해줬다. 댄이 뭐라고 했는진 기억이 안 난다.

어쨌거나 호주 아저씨의 저 말이 내 기억을 되짚는 계기가 됐다. 여행 시작한 이후로 성수기가 괜히 성수기가 아니구나 줄곧 생각했는데, 듣고 보니 좀 달리 보이는 게 있었다. 당장 그날만 해도 그랬다. 댄하고 다니면서 교회 몇 곳을 들리고, 광장을 좀 누비고, 높은 곳에서 시내를 내려다보며 다른 도시보다 안 예쁘다고 한탄하고, 그냥 매우 동유럽스러운 도시구나 낄낄대면서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무슨 축제가 하길래 잠깐 보다 왔다. 글뤼바인도 한 잔 하고, 공연도 보고...(음악 마음에 들어요? 댄이 물어봤다. 아니 사실 재즈는 좀... 내가 대답했다. 댄이 말했다. 나도 좀...)

난 관광객이면서 동시에 관광의 대상이었다. 길거리에 한국인은커녕 아시아인이 나 하나밖에 없었다. 아마 그게 신기했나보다. 카메라를 든 사람들이 종이컵을 손에 들고 멍하니 서 있는 내 모습을 자꾸 찍어댔다. 심지어는 방송사 카메라도 나를 잠깐 훑었다.

그러부터 3일 후,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호스텔 스태프는 다들 자그레브나 부다페스트에서 이탈리아 가는 사람들, 혹은 그 반대로 이동하는 사람들이 잠깐 들리는 도시라고 자조적으로 말했지만, 류블랴나는 작지만 멋진 동네였다. 적어도 크리스마스 마켓은 부다페스트만큼 훌륭했고. 그곳에서도 댄과 같이 크리스마스 마켓을 구석구석 돌았는데, 어느 노점에선가 라이브 밴드가 연주중이었다. 가수가 아코디언을 들고 노래를 부르는데,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다들 따라부르는 걸로 보아 슬로베니아의 흘러간 유행가인가 보다. 옆 테이블에서 정말 신나게 부르길래 카메라로 찍는데, 그걸 본 그 태이블 사람들이 내 쪽을 바라보면서 환호했다. 난 엄지 손가락을 들어줬다. 그 바로 옆, 노점 사잇길에서는 커플 한 쌍이 춤을 췄다. 왈츠 리듬에 맞춰 하나둘셋 하나둘셋. 노래와 안 어울리는 점잖은 춤이었지만, 어쨌든 음악이 세박자이니 대충 그럴듯했다. 사람들이 그들을 보며 박수를 쳤다.

노래가 끝나는 시점에 맞춰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누가 내 손을 붙잡았다. 뭔가 해서 돌아보니, 할머니 한 분이 내 손을 잡고 무대 쪽으로 끌어내는 것이다. 그러더니 내 손을 맞잡고 춤을 추기 시작했고, 나는 별 도리가 없어서 따라췄다. 사람들이 우리 쪽을 보고 웃으면서 사진을 찍었다. 댄은 아마 낄낄대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 뭐...내가 맨날 관광하는데 하루 정도는 관광당할 수도 있지...적고보니 말이 이상한데 뭐 여튼 그러하다. 또 한 곡이 끝나자 할머니는 내 볼에 연신 뽀뽀를 퍼부으며(차마 키스라곤 못 적는다 절대 네버 뻐킹!!!!!) 땡큐, 땡큐를 연발하였다. 겨우 풀려난 나를 보고 댄이 말했다. 내가 안 잡혀가서 행복하다.

어쨌든 이런 게 겨울에만 겪을 수 있는 것일 거란다.

그러고보니 두브로브니크에서는 이런 일이 있었다. 일단 도시 자체는 잔뜩 기대하고 갔으나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었다. 소피아 이후로 오랜만에 도시 자체가 실망스러웠다. 비는 쏟아지고, 바람은 미친 듯 불고, 물가는 비싸고, 인간들은 죄다 관광객 등쳐먹으려는 것만 같고...결국 세 시쯤 숙소로 돌아와 낮잠을 자다가, 저녁에는 플리트비체에서 만난 재용이 형과 그 일행하고 같이 밥을 먹고 셋이서 도시를 배회하고 별도 보고 이런저런 썰도 풀고 불안도 나누다가 헤어졌다. 그런데 숙소로 돌아오니 호스트 안톤이 아직 안 자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와인 한 잔을 권하길래 당연히 받았다. 안톤은 마흔 다섯 평생을 이 도시에서 살았단다. 이 도시에서 태어나서, 자라고, 일을 하고, 결혼하고, 딸을 얻고, 이어서 아들을 얻고, 아내와 사별하고, 딸을 시집보내고, 아들과 같이 산단다. 나는 안톤에게 물어봤다. 두브로브니크에서 사는 건 어때요? 좋죠. 아름답고 평화롭잖아요. 특히 요즘 같은 때가 좋아요. 사람도 없고. 여름에는 너무 시끄러워서...장소를 좀 옮기고 싶긴 하네요. 근처 섬으로 가고 싶어요. 내가 웃으며 말했다. 저 같은 관광객이 문제네요. 안톤이 손사래를 쳤다. 그런 의미가 아니에요. 여행자들하고 이야기하는 건 재밌어요. 웃어 넘겼지만 사실 나도 호스트하고 대화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웠다. 


2014/12/06

Posted by 시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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