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흐렸다. 비는 오지 않았지만 습한 공기가 내 옷가지 구석구석에 눌러붙었다. 날이 쌀쌀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여긴 완전히 가을이었다. 바람이 불고 낙엽이 지고. 오래된 건물들. 물이 새는 기차역...세계에서 6번째로 오래된 도시란 말은 믿긴다. 그러나 불가리아에서 두번째로 큰 도시라는 건 믿기지가 않았다. 두번째가 이렇다면 세번째는 어떻다는 것인가? 다행히 사람들은 친절했다. 역에서 내리자마자 만난 주차관리원은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먼저 다가와 어디로 가냐고, 길을 알려주겠다고 자진해서 나섰다. 내가 지도를 찾아 가방을 뒤적이는 동안 그가 물었다. 어디서 왔어요? 한국에서요. 와, 멀리서도 왔네요. 남쪽이에요, 북쪽이에요? 남쪽에서 왔죠. 북쪽에서 온 사람 뵙기는 힘들 걸요. 불가리아가 북한하고 수교한 역사가 더 길긴 하지만, 그래도 북한 사람 보긴 힘들 거라 생각했다.


주차관리원이 알려준 방향으로 쭉 가니 광장이 나왔다. 비둘기들이 젖은 몰골로 무리를 지어 어슬렁거렸다. 역시 비둘기는 날아다니는 법이 없다. 이번에는 문 앞에 몰려있는 학생들에게 물어봤다. 어딜 가나 학생들에게 물어보는 편이 제일 낫다는 걸 지난 열흘 동안 깨쳤다. 대개 친절하고 영어도 조금 되고...이들도 마찬가지여서, 내 지도를 펼치더니 자기들끼리 난상토론을 펼쳤다. 분명 세 명이서 떠들었는데, 나중에는 대여섯명이 더 껴들고, 종국에는 지나가던 아줌마까지 껴들었다. 아줌마는 자꾸 불가리아 어로 설명해서 난감했는데, 옆에서 다른 학생이 아줌마의 말을 바디랭기지로 풀어주었다. 그러나 처음 학생들이 아줌마한테 이의를 제기했다. 불가리아 어는 모르지만...거기 아닌 거 같은데요라고 따지는 건 뻔했다. 어째 목적지는 하나이나 가리키는 방향은 각자 다른지. 가장 나중에 껴든 아저씨가 그냥 큰길 쭉 따라가서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라고 하였다.


플로브디프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인 만큼 그 주인도 여러 번 바뀌었다고 한다. 그들 모두 자기네 건축물을 올렸고, 그래서 시내에는 상이한 건축물들끼리 서로 이웃하고 있다. 아직 발굴 중인 로마시대 경기장 바로 옆에 유럽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모스크가 있다든지, 그 모스크에서 좀만 걸어가면 정교회 성당이, 아예 구시가지로 들어가면 로마 시대의 원형 경기장이 있다. 거기서도 좀 더 올라가면 마을 전경을 내려다볼 수 있는 트라키아인들의 요새가 있다. 트라키아인들은 현대 불가리아 민족의 조상 중 하나인데, 그리스 로마 신화에도 그 존재가 언급된다. 트로이 전쟁에서도 트로이의 우군으로 참전했다고 한다.


아침 일찍 체크인했다. 여권을 내밀었는데, 생일 축하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생일이었지. 고마워요. 짐을 풀고, 몸을 씻고, 시내 구경하러 나갔다. 어느 벤치에서는 장발의 남자가 기타를 치면서 하모니카를 불고 있었다. 셋리스트가 마음에 들었다. The Man Who Sold the World, Imagine, 세 번째 곡은 귀에 익은데 뭔진 모르겠다...그건 그거고 일단 식사부터...불가리아 음식은 딱히 먹지 않았다. 숍스카 샐러드라는 전통 샐러드 하나만 먹었는데...음 뭐 굳이 다시 먹지 않아도 괜찮겠다. 나쁠 건 없었다. 오이와 토마토 위에 치즈를 갈아 올리고, 치즈동산 위에는 올리브 한 조각. 그냥 그저 그런...밥을 먹고 구시가지로 올라갔다. 플로브디프의 자부심인 원형극장을 들릴 거다. 플로브디프에서는 반드시 원형극장에 가야 한단다. 정말로 그러한지...가는 길에 잠깐 지도를 보고 어디쯤인지 셈을 하는데, 길 가던 아줌마가 원형극장 가는 길은 저기라고 방향을 찍어주었다. 묻지도 않았는데! 그냥 저 길로 쭉 올라가면 되어요. 그 순간 지나가던 다른 아저씨가 말했다. And it's very beautiful!


로마시대 원형극장은 작지만 위엄 있었다. 사실 그냥 내 기준에서 작은 거고, 당대에는 꽤 컸던 걸지도 모르지만. 관객석이 무대까지 가파르게 떨어졌다. 좀 과장하자면, 제일 높은 열에 앉아도 배우의 정수리가 보일 것만 같았다. 무대로도 내려가보고, 무대 뒤도 좀 둘러보다 나왔다. 나오는 길에 관리인 아저씨가 물었다. 아름답지 않나요? 느낀 대로 대답했다. 그렇네요. 아저씨가 극장 바로 옆에 붙어있는 학교 건물을 가리켰다. 여름에는 여기 예술학교 학생들이 공연을 해요. 두세번 정도...내가 대답했다. 복 받은 친구들이네요.


그리곤 트리키아인들의 요새까지 올라갔다. 여기서 한국인을 만났다. 이스탄불에서 본 이후론 처음이었다. 사실 이스탄불에서 한국인을 보는 건 쉽다. 하기아 소피아만 가도 한국인 관광객은 많다. 단체관광객도 많이 오는데...그 덕에 하기아 소피아는 공짜로 들어갈 뻔했다. 교회에서 온 단체 관광객이었는데, 이 아저씨 아줌마들은 노스 페이스를 입고, 난 노스 페이스는 아니지만 패딩을 입고 있는 게 일행처럼 보였나보다. 이 사람들 따라가면 입구겠구나 해서 꽁무니에 붙었는데, 그러다가 얼떨결에 단체관광객 줄에 섰고, 입구에서 아무 제지 없이 통과시켰다. 자, 빨리빨리 지나가세요! 하면서. 터키어나 영어가 아니라 한국어로 저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이 한국인도 오랫동안 여행중이었다. 9개월 정도 됐단다. 독일에서 여행을 끝낼 건데, 나처럼 돌아가는 건 아니고독일에서 일을 구한다고 하였다. 서로 일정이 있어서 대화를 오래 나누진 못했는데, 아마 얘기를 들어보니 코더인 것 같았다. 정말 코딩의 시대구나...그 사람은 먼저 떠나고, 난 홀로 요새에 남아 시내를 바라봤다. 붉은 지붕의 건물들, 오고 가는 차들...생일날 이런 곳에 있구나. 돌아가면 이제 뭘 해야하지? 학교로 돌아가는 건 돌아가는 건데 가서는 뭘 하고 가서 끝난 다음에는 뭘 해야 하고...답답했다. 많이 답답했다. 만 스물 넷인데 난 정말 누구도 아니구나. 하지만 낡은 벽에 앉아 궁상 떤다고 뾰족한 답이 나올리가. 그냥 호텔로 내려가기로 결정햇다. 내려가는 길에 빗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잠깐 피신할 겸 이콘 박물관에 들렸다. 홀로 박물관을 지키던 아주머니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남에서 왔나요, 북에서 왔나요? 남에서 왔어요. 북에서 온 사람 보기 힘들 걸요, 라고 주차관리원에게 했던 것과 같은 대답을 했다. 아주머니는 웃으면서 관람하다가 모르는 게 있으면 얼마든지 물어보라고 했다. 난 정말 그러고 싶었는데, 아는 게 없으니 물어볼 것도 없었다.


조지아와 불가리아...내가 거친 정교권 국가라고는 딱 둘 밖에 없지만, 적어도 이 두 나라만큼은 성 게오르기우스가 예수 그리스도 만큼이나 슈퍼스타였다. 이콘 박물관에서 가장 많은 지분을 차지하고 있던 성인이 게오르기우스였다. 조지아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 조지아라는 영문 국칭을 게오르기우스에서 따온 것이니. 게오르기우스가 영어로 George이다. 조지아는 Georgia이고. 


도시 구경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왔다. 피곤한데 그냥 일찍 잘까...하다가 이대로 가긴 아쉬워서 근처 술집에 갔다. 가게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Download Rock Bar. 우리 모두 로큰롤을 사랑하니까! 아닌가 ㅋㅋㅋㅋㅋ 별 기대는 없었다. 그냥 나 같은 여행자나 한 명 만났으면 하는 기대가 다였는데...막상 들어가니까 기대를 초월했다. 여기도 이 동네 친구들이 집결하여, 여기거 다들 알개 되는, 뭐 그런 종류의 가게로 보였는데, 한 잔 다 마실 참이 되니 누군가 말을 걸었다. 정말 록 좋아하기 생긴 거친 아저씨, 띵띵한 아저씨 하나...였는데 그중 거칠게 생긴 아저씨가 어디서 왔는지 물어보더라.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태권도도 아닌 합기도 얘기를 꺼내며 반가워해줬다. 금방 친해졌다. 둘은 또 자기들 아는 사람이 가게에 들어올 때마다 한국에서 온 친구래, 하면서 소개시켜줬다. 


술먹고 한 얘기들이 으레 그렇듯이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만...일단 둘 다 영국에서 오랜 세월 공부했다 하여 의사소통에는 별 문제가 없었고(내가 좀 후달렸다), 띵띵한 아저씨가 미친 듯이 웃겼고, 다음 행선지가 소피아라고 하니까 다들 플로브디프가 훨씬 낫다며 소피아를 비난했다는 거다. 소피아도 그런 취급이니, 불구대천의 원수 터키의 이스탄불은 말할 것도 없었다. 내가 이스탄불을 들렸다 하니 거친 아저씨가 말했다. 터키 놈들은 죄다 위선자에요. 겉으론 실실 웃는데 돈밖에 모르는 족속이죠. 내가 런던에서 여행을 끝낸다 하니 역시 거친 아저씨가 말했다. 영국 놈들도 죄다 위선자죠. 내가 6년 살아봤잖아요. 다음 나라는 루마니아라고 하니 아예 질색을 했다. ATM에서 돈 뺄 때 조심 또 조심해요. 집시들이 정말 장난이 아니니까... 


듣다가 좀 놀란 이야기가 하나 있었다. 그 아저씨가 처음에 물었다. 남이에요, 북이에요? 당연히 남쪽에서 왔죠. 이번엔 북쪽 사람 만나기 힘들 거란 얘기 말고, 다른 걸 물어봤다. 한국 사람 만난 적 있어요? 있단다. 바로 이 가게에 여자 세 명이 놀라온 적이 있단다. 그런가보다 고개를 끄덕이는데...그 여자들은 북한에서 왔어요. 정말요? 그렇다니까요. 무슨 한국어 아카데미 같은 걸 만들려고 한다던데...


잠시 후 가게 주인이 돌아왔다. 크리드 노래만 줄창 틀어대는 가게 답지 않게, 가게 주인은 인상이 부드러운 남자였다. 이름은 라드. 한국에서 왔다니까, GSL을 좋아한단다. 이게 뭐냐면....글로벌 스타크래프트 리그라고 스타크래프트2 리그다. 나도 군대 가기 전에는 좀 봤다가 관심을 끊었다. 라드가 오히려 요즘은 누가 잘한다, 누가 못한다 취근의 대새를 알려주었다. 스타크래프트를 알면 한국의 절반은 아는 거죠. 라드가 하하 웃었다. 그는 또 한국 영화와 한국 드라마를 좀 봤다며, 비천무와 악마를 보았다를 재밌게 봤담다. 비천무라니....한국에서도 쌍욕을 먹은 그 작품을!


덕분이 공짜 위스키도 한 잔 얻어먹고 또 시시껄렁한 얘기를 하면서 떠들고 있는데, 갑자기 라드가 노래를 바꾸더니 내게 말했다. This is for you. 왜 이 노래가 날 위한 건진 모르겠지만, 귀에 익은 노래였다. 라드가 물어봤다. 이 노래 알아요? 나는 얼버무렸다. 귀에 익숙하긴 한데...라드가 씩 웃으면서 말했다. 한국 드라마 노래에요. Slave Chasers. 그런 드라마가 있나 찾아봤더니....추노였다. 그렇다.... 추노 OST였다....껄껄껄, 뭘 좀 아시네요.


그렇게 맥주를 한참 마시다가 숙소에 돌아왔다. 그런데 숙소에 들어간 기억이 없다...
다음 날, 난 살면서 손에 꼽을만한 숙취에 시달렸다. 
그전의 숙취와 다른 게 있다면, 한국에서야 그냥 집에 가면 되지만
여기서 난 10kg 배낭을 매고 소피아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참 무거웠고, 난 역까지 걸어가면서 자주 주저앉았다.

2014/11/14

Posted by 시니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