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기적은 일어난다. 개천에서 용 나기 힘들다고 해도, 기적이 돈 많고 빽 있는 사람들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잿더미가 된 나라에서도 기적은 일어난다. 일본은 원폭 두 방에 잿더미가 되었고, 맥아더는 일본을 농업국가로 만드려고 했다. 하지만 5년 후 한반도가 잿더미가 되자 그 틈을 타 기적적으로 부활하여 강대국이 된다. 그 사이 구멍이 숭숭 나 미래가 없을 것이라는 한국도 기적적으로 살아난다. 한국은 50년 만에 원조 받는 국가에서 원조하는 국가가 되었다. 이 와중의 산업화를 한강의 기적이라 부른다. 한강의 기적의 원조는 라인강의 기적에서 따온 말이다. 마치 일본처럼 잿더미가 된 것을 너머 아예 나라가 갈라진 독일에게도 기적의 순간은 왔다는 것이다. 기적은 그 자체로 독립적인 순간이 아니다. 기적에는 따라오는 징조들이 여러가지 있다. 그 중 하나로 독일은 월드컵을 우승했다. 이를 영화로 그린 것이 <베른의 기적>이었다. 그 우승과 함께 국민들은 할 수 있다는 힘을 얻고, 전쟁으로 와해된 가족은 뭉쳤다.

  독일 안에 있는 독일인이라면 이런 극적인 반전을 느끼고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당대의 상식을 가지고 독일의 발전에 한마음으로 이바지한 독일인이라면, 국경이라는 테두리에 빙 둘러 서서 어깨동무를 하고 꽃 같은 환희의 순간에 같이 취하면 된다. 그러나 독일 밖의 독일인들은 별 운이 없었다. 숨그네의 등장인물들이 그랬다. 주인공 레오는 루마니아에서 왔다. 그들은 전범의 죄는 같이 책임지되, 기적은 같이 누리지 못했다. 건강하다면 남녀를 가리지 않고 러시아의 강제노동수용소, 굴라크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그들은 파시스트라는 비난을 들으며 나귀 같이 부려졌다. 아우슈비츠 이전의 나치의 유태인 격리하고 별 차이도 없어 보일 정도로 열악하고 비인간적인 장소에서 오직 독일인이라는 이유 하나로. 차이점이라곤 가스실이 없는 것 뿐인다. 수용인들은 하루에 빵 한 덩이 씩으로 연명해야 한다.

  레오의 상황은 일반 수용인들보다 더 좋지 못했다. 그는 17세였다. 고대 그리스 작가들부터 현대의 예술가들까지 아름답다고 꼽는 시기를 통채로 내줘야 하는데, 더 큰 문제는 그가 동성애자라는 것이다. 그가 고된 노동이 끝나고 샤워실에 들어가면 헐벗은 남자들을 보면 먹을 수 없었던 빵 만큼이나 괴로워한다. 그가 수용소에 가 있는 동안에 동생이 태어난다. 동생은 원래 그가 받을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는 가족에서마저 밀려났다. 즉 레오는 완벽한 주변인이다. 어리고, 동성애자인데다가, '배고픈 천사'의 선택을 받았고, 가족들마저 그를 잊기 시작한다.

  굴라크 내에서는 고된 노동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그렇듯 기묘한 역학관계가 함께 있다. 어디에나 있으니 사실 특별할 것은 없다. 그리고 아우슈비츠 안에서도 시를 썼으니, 여기서도 우정이 있고 인간미가 있다. 역시 어디에나 있으니 사실 특별할 것은 없다. 이 모든 것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주변인 레오의 시선이다. 레오는 콘크리트 반죽에 사람이 빠져 죽는 것도, 자신들 편인듯 행세하다 이내 관리인에게 아양을 떠는 여자 수용인도, 화주를 마신 후 끊임없이 질문하다 죽은 사람까지도. 심지어 레오는 자기 자신마저도 주변화한다. 레오가(혹은 작가 헤르타 뮐러가) 만들어내는 예쁜 말들은 살펴보면 그 중심이 레오에게 있지 않다. 레오는 자신이 좋아하는 삽을 '심장삽'으로 명명한다. 심장이 삽한테 있는 셈이고, 레오는 자신이 심장삽을 제대로 다루지 못할까 두려워한다. 그저 삽질 한 번에 빵 한 번이라는 공식을 만들어가며 인내한다.

  <베른의 기적>에서는 굴라크에서 돌아온 아버지와 아들이 월드컵을 기점으로 극적으로 화해했다. 전쟁 세대와 그 이후 세대가 극적으로 화합하는 환영식이었다. 그러나 레오의 귀환에는 루마니아 대표팀의 활약도, 플랜 카드도 없었고, 성대한 파티도 없었다. 가족은 레오를 열렬히 반기기 보다는 오히려 부담스러워한다. 스스로를 사각에 내모는 것이 습관이 된 레오에게는 자유가 두렵고 강박관념은 편안하다. 사실 열악한 환경만 빼곤 수용소와 큰 차이도 없다. 수용소의 그때 그사람들이 다 같이 풀려났으니. 누군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수만 번이라도 도끼로 머리통을 찍혔을 악독한 관리인 투어 프리쿨리치까지 포함해서. 소설은 처음에서 대략 40년 후 쯤에 끝을 맺는데, 레오는 여전히 처음처럼 외롭고, 수용소에서 그랬듯이 사람보다는 물건에 애착을 보인다.

  소설은 뮐러의 친구인 파스티오르의 경험을 바탕으로 써졌다. 파스티오르는 시인이었다. 둘이 걷다 뮐러가 전나무를 보면서 참 재미없는 나무에 별의별 이야기를 붙인다고 불평하자, 파스티오르는 자신이 수용소에 있던 시절 전나무를 크리스마스 트리로 만든 이야기를 하였다. 파스티오르는 수용소가 자신이 원래 가지고 있던 언어를 파괴하였다고 한다. 그게 <숨그네>가 정말 시를 닮아있는 이유일 것이다.  '숨그네', '배고픈 천사', '심장삽' 같은 예쁜 조어들. 그렇지만 희한한 단어들. 중심부에서 대화할 때는 결코 쓰지 않는 단어들. 그러니 이 단어들이 낯선 만큼 레오는 주변에서 서성거리고 있을 것이다. 레오가 수용소로 떠날 때 할머니가 말했다. "너는 반드시 돌아올 거야." 레오는 수용소에서 주림에도 배를 움켜쥐지 못하고 삽을 퍼며 속으로 대답했다. "그런데 할머니 그거 아세요? 그게 얼마나 힘든지." 레오는 결코 온전히 돌아오지 못했다.
Posted by 시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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