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며칠 간 민박집을 스쳐간 모든 인연에게 말했다. 다시 런던에 오면 민박집은 절대 안 갈 거예요. 이렇게 후진 데는 처음 봐요. 하필 다들 첫 유럽여행이었고, 첫 도시가 런던이었고...그래서 다들 되물었다. 다른 데는 안 이래요? 내가 대답했다. 점심 시간에 쫓아내는 데는 처음 봤다니까요. 통금있는 숙소도 아예 처음이고요. 그래도 밥은 맛있어요. 이렇게 해주는 데 없긴 한데...그게 유일한 장점이에요. 사람들이 입을 벌리고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이며 느릿느릿 말했다. 아아 그렇구나.


90일 여행했다고 하면 다들 연륜있는 여행자 대우를 해준다. 그간 20년 여행하는 이탈리아인, 아시아에서 시작해서 유럽까지 온 한국인, 반대로 가는 네덜란드인, 원고료로 여행하는 남아공인, 세계여행하는데 지쳐서 잠깐 고향에서 쉬다 다시 올 거라는 일본인 등 스펙타클한 사람들을 많이 봐서 약간 찔리긴 하지만...결국 나는 생색을 내면서 지겹다, 이젠 다신 안 할 거다와 같은 불만같아 보이지만 실은 자랑하는 말들을 쏟아냈다. 막판에는 살짝 오지랖도 떨어준다. 혹시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보세요. 첫날 윗침대에서 잤던 형이 물어봤다. 로마 가봤어요? 내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뇨.


처음 오는 건데 제가 급하게 오는 거라 준비를 전혀 못했거든요. 그래서 여행사에서 짜준 대로 다니고 있거든요. 사실 나는 이 말을 듣고 여행사에서 혼자 다니는 여행 코스도 짜준다는 걸 처음 알았다. 어쨌거나 형이 계속 말했다. 런던 인, 로마 아웃인데...이렇게 다니는 이유가 로마에 볼 거리가 많아서, 로마부터 들리면 다른 도시가 시시하기 때문에 마지막이라고 하던데요. 내가 대답했다. 저도 런던으로 들어와서 로마로 나가는 사람은 많이 봤는데...제가 들은 이유는 그게 아니었는데요. 그냥 로마에서 한국가는 비행기가 싸서 그렇다고 들었거든요. 아마 부다페스트에서 고은이 혹은 재석이가 해준 말이었을 것이다. 둘 다 로마에서 귀국했다. 어쨌거나 그 말을 들은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 이것들이 그냥 이유를 갖다붙였나보네.


그렇게 몇 날을 떼우고, 2월 1일 저녁에 선우가 도착했다. 내가 아스날 경기를 직관하고 돌아온 날이었다. 선우는 그날 저녁 히드로 공항에 도착했고, 입대신청하는 족족 거절당해 일 년째 군대를 못 가고 있다고 했고, 여기 오기 전에는 일을 했단다, 런던은 모레 떠난다고 하였다. 내 출국일이기도 했다. 사실상 런던을 둘러볼 수 있는 날은 2월 2일 하루밖에 없는 것이다. 딱히 할 것도 없었던 내가 말했다. 괜찮으면 내가 따라다닐게요. 길 찾는 정도는 도와줄 수 있을 거예요. 선우는 시원하게 허락하였다.


자기 전에 여행에 대해 이런저런 대화를 했다. 유로스타는 미리 가 있어야한다는 것도 이때 알려줬다. 그것 외에도 질문을 몇 가지 받았고, 아는대로 경험한대로 대답해줬다. 돈을 얼마 썼는지도 물어봤다. 사실 90일 다닌다고 하면 가장 처음 들어오는 질문 중 하나다. 천 만원은 넘었고...그 이후로는 통장 잔고를 안 보고 있어요. 무서워서 못 봐요. 생각해보면 그리 알뜰살뜰한 여행은 아니었다. 자판기랑 싸우다가 10유로 이상 날려먹은 적도 있고, 숙소도 굳이 싼 곳을 고집한 것도 아니고...물가가 싼 나라이긴 했지만 4성 호텔에서 잔 적도 한 번 있긴 하다. 여행 중반까지는 딱히 식비도 안 아꼈다. 예산을 넉넉하게 잡았다. 그덕에 올해 생활비는 좀 쪼들린다. 그래도 둘 중 하나라도 넉넉한 게 어딘가....라고 생각했는데 귀국하고 보름 쯤 지나고 통장잔고를 확인하니 떨떠름하다. 새학기를 생각하면 막막하다. 다시 간다면 훨씬 알뜰하게 다닐 수 있을 것 같다. 돈을 절약하는 것은 물론이요, 시간도 절약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몇 년 동안은 기회조차 없겠지만, 만약 다시 갈 수 있다면...


일단 루마니아는 가지 않을 것이다. 신새벽에 도착하자마자 주정뱅이에게 쫓겨다녔다. 머무는 내내 비가 내렸다. 내내 아팠다. 집에 가고 싶었다. 나는 여행이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매순간 했다. 이렇게만 적어놓으면 최악의 여행지 같지만, 사실 나쁜 점만 있던 곳은 아니다. 거리가 예쁘다. 미녀가 많다. 물가도 싸다. 또 여름이라면 풍경도 제법 다를 것 같다. 흑백의 부쿠레슈티가 태양 밑에서는 푸르게 빛날 지도 모른다. 그래도 다시 가지는 않을 것이다. 부쿠레슈티에 가려면 불가리아나 헝가리에서 건너가야 하는데, 시간도 많이 걸리고, 더 중요한 건 수고롭게 다시 갈 이유를 모르겠다. 그냥 쭉 우울한 기억으로 남겨둘 생각이다. 두 번째 기회는 없다. 부쿠레슈티도 이해해주길 바란다.


또 있다. 겨울에 유람선을 타지 않을 것이다. 11월 초에 보스포러스 해협을 한 바퀴 도는 유람선을 탔었다. 두 시간 내내 얇은 패딩 한 장을 걸치고 양쪽에서 부는 바람과 싸웠다. 관광은 십 분이면 족했다. 나머지 한 시간 오십 분 동안은 관광한다기보다는 관광당했다. 사람들이 자꾸 곁눈질했다. 쟤는 여기 왜 있지?


미술관은 더 많이 가봤어야 했다. 특히 미술관...이제야 조금 보는 법을 알 것도 같다. 진품만이 가진다는 아우라도 왠지 알 것도 같다. 물론 몇몇 유명 미술관의 압도적인 컬렉션의 후광효과일 수도 있는데, 그래서 더욱 확인해보고 싶다.


박물관은 잘 모르겠다. 내가 사학자라면 모를까, 눈으로 확인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을까? 구석기, 신석기 시대의 유물은 국립중앙박물관의 유물은 딱히 차이를 모르겠다. 국가가 생긴 후의 유물들도 마찬가지다. 농민들은 농사를 짓기 위해 낫을 갈았다. 군인들은 서로를 죽이기 위해 칼을 벼렸다. 귀족은 서로를 구분하기 위해 장신구를 몸에 달았다.


요리를 잘 했으면 좋을 뻔했다. 요리 잘하는 여행객만큼 환영받는 여행객이 없었다. 보통은 돈을 들고 다녀서 환영받는데 말이다. 그런 이유만은 아니다. 자구책이기도 하다. 독일에서 잠깐 밥을 해먹고 다닐 때가 있었다. 독일 요리는 지역마다 개성이 강한데, 그래도 공통점이 딱 하나 있다. 다들 비싸고 맛이 없다. 그래서 한 동안 직접 이런 파스타 저런 파스타를 만들어 먹었는데, 며칠 하다가 질려서 포기했다. 아마 내 레파토리가 다양했더라면 식비라도 좀 아꼈을 것이다.


이렇게 짜잘하게 아쉬운 점은 있지만, 돌아온 지금 후회는 없다. 평생 기억에 남을 여행을 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냥 질렸다. 여행 시작 열흘만에 난 여행하고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 사람치고는 참 오래 버텼다. 떠나기 며칠 전 댄하고 밥을 먹을 때였다. 내게 중국어로 호객하고 중국어로 주문을 받던 런던 차이나타운의 한 식당이었다. 댄이 물었다. 집에 가고 싶어? 한참을 고민하다 답했다. 나 스스로도 무슨 심리인지 정확히 파악하고 싶었던 것이다. 계속 밖에서 자고 싶은 건 아닌데, 집에 가고 싶지도 않아요. 현실로 돌아가는 게 싫은 거야? 아뇨, 지금이라고 딱히 꿈 속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뭐, 현실적인 문제가 있긴 하죠. 돌아가면 설날이 있어요. 댄이 물었다. 한국도 음력 신년을 기념해? 내가 대답했다. 해요, 당연히 하죠. 우리가 정말 귀신이 있다고 진지하게 생각해서 거창하게 그러는 건 아니고... 친척끼리 오랜만에 모여서 할말 없으니까 자기자랑을 하거나 서로의 험담을 하는 날이에요. 그런 이유로 설날은 넘기고 싶어요. 결국 내 바람대로 됐다.


요 몇 년 간 내 바람대로 되지 않았던 게 별로 없다. 아스날의 성적 정도 빼고는 신기할 정도로 생각대로 되었다. 여행만 해도 그렇다. 유럽여행이 내 목표였다고 부르기에도 민망하다. 초소에서 지샌 외롭고 답답한 밤마다 했던 상상이었다. 바깥물정을 알 수도 없으니 마냥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전역한 지 두 달만에 꿈이 너무 컸다고 인정하고, 현실적으로 목표를 조정하려 했는데, 어쩌다보니 운이 좋아서 이렇게 되었다. 다양한 면에서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다. 특히 희욱 형님에게는 몇 번 감사를 드리든 모자를 것이다. 여행 중에도 그랬다. 장소를 생각하면 언제나 그때 같이 있었던 사람이 생각난다. 이스탄불에서 만난 에이든부터 런던에서 만난 선우까지. 다들 멋진 사람들이다.


저녁이 다 되가는 시간에 점심을 먹고 런던 브릿지를 건너 쭉 동쪽으로 갔다. 중간에 보로 마켓을 들리고, 타워 브릿지가 잘 보이는 곳에서 사진을 몇 방 찍은 후, 다시 타워 브릿지를 건넜다. 열흘 런던에 있으면서 왠만한 곳은 다 가본줄 알았는데, 같이 다니다 보니 의외로 놓친 곳이 좀 있었다. 당장 타워 브릿지만 해도 그날 처음 건너는 것이었고, 건너편에 있는 런던 탑은 아예 처음 봤다. 선우가 물었다. 열흘동안 뭐했어요? 나도 모르겠다.

런던 탑은 이미 폐장했다. 관광을 마치고 숙소에 돌아가기로 했다. 지하철역으로 가는 길에 뒤를 돌아보니 노을이 천천히 지고 있었다. 한숨이 나왔다. 이게 내 마지막 풍경이구나. 예전에, 아주 예전에 군대에 있을 때 내 유럽여행 마지막 풍경은 보스포러스 해협이 될 것이라고 정해놨었다. 결과적으로 앞뒤가 바뀌긴 했지만, 이것도 나쁘지 않았고 나름 근사했다.


그러나 이것도 마지막 풍경이 아니었다. 숙소에 들어간지 얼마 되지 않아 짧은 머리의 남자 두 명이 거대한 캐리어 두 개를 끌고 우당탕탕 들어왔다. 갓 전역했다는 느낌이 팍팍 들었는데 실제로 그러하였다. 심지어 한 명은 사흘 전에 전역했단다. 군대에서 모은 돈에 부모님 돈을 약간 더 보태서 왔다고 하였다. 이들도 런던으로 들어와서 로마로 나간다고 했던 것 같다. 둘 다 오랜 비행으로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짧은 일정에 하룻밤도 놀릴 수 없다며 야경을 보러 나가겠다고 하였다. 가능하다면 런던 아이도 탈 예정이라면서. 나랑 선우도 따라 나갔다.

다시 탬스 강변을 따라 걸었다. 일단은 웨스터민스터 다리까지. 이들도 내가 90일 여행했다고, 또 오늘이 마지막 밤이라고 하니 감탄을 했다. 이젠 익숙한 반응이다 껄껄껄껄. 그렇게 한참을 걷다보니 국회의사당과 빅벤이 보였다. 둘이 연발 셔터를 눌러댔다. 다리 위에서는 잠깐 서로의 사진을 찍어줬다. 그러고 나니 할일이 없었다. 사흘 전 전역한 친구가 내게 물었다. 이제 어딜 가면 될까요? 내가 대답했다. 여행 첫 날이신데 그냥 들리고 싶은 데 가세요. 전 어디로 가든 상관 없어요. 그가 말했다. 그래도 마지막 날이시라니까. 그 말을 듣고 다시 고민을 해봐도 딱히 떠오르는 곳이 없었다. 어디로 가든 상관 없었다. 어디로 가든...


결국 더 걸어서 간 후 오는 길에 런던 아이를 들리기로 하였다. 가는 길에 선우가 물어보았다. 여행 동안 깨달은 게 있으세요? 내가 대답했다. 큰 깨달음 같은 건 없고...굳이 하나 꼽자면, 자기 자신에게 잘하는 게 제일 어렵더라고요. 만난 외국인들마다 저에게 다 잘해줬거든요. 그러니까 도리어 남들에게 잘해주는 게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오히려 문제가 생길 땐 전부 한국인이었어요. 자기 자신에게 잘해주는 게 제일 어려운 셈이죠. 가족이든, 부하든, 같은 민족이든, 자기 자신이든. 말하고보니 참 별 거 아니다. 90일이 나를 깨치게 만든 건 아닌 것 같았다. 이 경험이 나를 발전하게 하든 말든 상관 없다. 어차피 가장 즐거운 날은 하루 뿐이다. 그간 행복했으니 충분하다.


그래도 귀국한 지 스무여일이 지난 지금, 여행 과정을 되짚어보면 다르게 보이는 것들이 조금 있다. 앞으로도 실타래처럼 헝클어진 이 기억을 지구 반대편에서 다른 각도로 응시하다보면 새로 알게되는 것들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럴 때마다 어깨를 찍어누르는 무거운 배낭을 메고 기차 시간표를 훑어보던 내 기억 속을 탐험할 것이다. 열차를 타고 새 도시에 도착하여 기차역 밖으로 나설 때가 가장 즐거운 시간이었다. 결과적으로 그 도시에서 똥을 밟든 바가지를 씌였든 상관없다. 다음 도시에서는 똑같은 기대감이 부풀게 돼있다. 기대 이상으로 멋진 곳일 수도 있다.


계속 걸어가는데, 선우가 말했다. 저분들이 런던 아이 타면 형하고 저는 먼저 돌아가야겠네요. 입으로는 그래야겠다고 말했지만, 속으로는 잠깐 고민했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지갑을 만지작거렸다. 아직 20파운드가 남아있다. 내일 이 돈을 사용할 것 같진 않다. 그럴 바엔 오늘 런던 아이 타는데 쓸까. 여행의 마지막 풍경이 런던 아이에서 바라보는 야경이라면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돌아가서 그럴싸하게 이야기를 풀 수도 있겠다. 내 여행 마지막 풍경은 런던아이에서 내려본 탬스강이었노라고. 하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타지 않을 것이다. 상관 없어 안 타도 돼. 내게는 필요없는 일이다. 이제는 안다.


2015/2/27

Posted by 시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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