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치아 산타 루치아 기차역이었다. 댄하고 헤어지기 전 마지막으로 맥주 한 잔 할 허름한 펍을 찾았으나, 두브로브니크 이상으로 살인적인 물가를 자랑하는 베네치아에서 그런 곳이 있을 리가. 광장의 바글바글한 사람들을 보고 있자면 지금이 비수기라는 게 믿기지도 않았다. 어쨌거나 우리는 지친 몸을 끌고 한숨만 푹푹 쉬다가 마트에 가서 맥주를 사고 안주를 샀다. 날씨만 좋았더라면 운하 옆 벤치 같은 데 앉아 한 잔 하는 것도 운치 있고 좋았겠지만, 여전히 비는 쏟아지고 물은 도보까지 넘치고 사람들은 그게 뭐가 줗다고 색색 장화를 신고 첨벙첨벙 물놀이를 하는지. 결국 기차역 대합실의 어느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에구구구, 죽는 신음을 내며 자리에 앉았더니 댄이 하는 말이, 근데 여기서 마시는 게 합법인 지는 모르겠어...란다. 그러든가 말든가, 그냥 눈치보면서 마시는 걸로.

벤치에 앉아서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정말 다들 각지에서 왔다 싶었다. 유럽의 어느 역에서도 이렇게 영어로 대화하는 사람이 많은 곳은 처음이었다. 당연히 나와 같은 아시아인도 눈에 띄었다. 여기가 명동인가 유럽인가 의심스럽게 만들었건 크로아티아와 달리, 딱 봐도 중국인이 많았다. 일본인오 꽤 있었고, 한국인은 간간히 있었는데 인구비를 생각해보면 여기가 오히려 당연한 게 아닌가 싶다. 사실 중국인은 눌러앉아 사는 사람도 꽤 되어 보였다. 전에 배가 고파 그나마 싼 이탈리아 식당을 물색했는데, 주인이 죄다 중국인인 것이다. 기념품 가게에서도 젤라또 가게에서도 중국인이 많이 보였다.

희한하게 아시아인들을 보고 있자면 어느나라에서 왔는지 다 구분이 됐다. 중국인이면 중국인, 일본인이면 일본인, 한국인이면 한국인...물론 여기서 동남아시아나 네팔 같은 나라 사람들이 추가되면 복잡하겠지만, 그 나라 여행객들은 비교적 보기 힘드니까. 맥주를 홀짝이며 아시아인이 지나갈 때마다 내가 댄에게 말했다. 저 사람은 중국인, 저 사람은 일본인....저기 캐리어 끌고 가는 사람은 또 중국인. 당신네는 아니겠지만 나는 아시아 사람들을 완벽하게 구분 가능하다고 댄에게 자랑을 하니, 의외로 댄이 자기도 잘 맞추는 편이란다. 동아시아에서 온 사람을 많이 가르쳐봤단다. 그러더니 이젠 스스로 추측하기 시작했다. 내가 채점을 하고. 저 사람은 한국인이야. 내가 씩 웃었다. 중국인인데요. 댄이 한숨을 쉬었다. 키가 커서 한국인인줄 알았는데. 내가 몇 가지 요령을 가르쳐줬다. 골격으로 구분할 수 있는 건 일본인뿐이에요. 중국인도 키 큰 사람 많아요. 대신 중국인은 좀 스타일이, 옷 입는 방식이 뭐라고 해야 하나...내가 단어를 고심하자 댄이 받아주었다. 촌스럽다고? 맞아요, 좀 촌스러워요. 그리고 여자들 같은 경우는 화장으로도 구분 가능해요. 뭐라 설명해야할진 모르겠는데 분명히 차이가 있고...아, 영어 쓰는 것도 그래요. 한국인들이 영어로 말할 때 문장 초반에 얼버무리는 경우가 많죠. 예를 들어, 웨얼 캔 아이 겟 어 티켓이라고 치면 웨얼크나이게러...티켓! 이런 식으로요. 전반적으로 중국 사람들이 영어는 잘 하는 거 같고요. 댄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가르친 학생들 중에서는 한국인과 일본인들이 중국인들보다 훨씬 영어를 잘 했어. 알아듣기도 쉬웠고.

댄은 영어선생님이다. 주로 외국에서 유학이나 어학연수 온 학생들을 가르친다고 한다. 대학에서는 영화를 전공했고, 졸업해서는 음악잡지에서 일하다, 여자친구를 따라 무작정 독일로 넘어올 때부터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했고, 영국으로 돌아간 지금까지도 쭉 선생님이다. 지금 그는 커리어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고 한다. 그거때문에 여행을 떠난 건 아니고...여행을 떠났기 때문에 위기를 맞았다. 오기 전에는 5주 정도 갔다온다고 말해놨는데, 며칠 전 조금만 더 있다 오겠다고 이메일을 보냈다고 한다. 그런데 아직까지 답장이 없다고 한다. 댄하고 자그레브에서 처음 만나 베니스에서 헤어질 때까지, 그는 매일 같이 한숨을 푹푹 쉬며 짤리면 어떡하지 걱정을 했다. 그것 말고도 댄은 걱정이 많은 남자였다. 이탈리아에 사는 친구가 러쉬에서 샴푸를 사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매장에서 가격표를 확인한 그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어차피 크리스마스에는 친구도 영국에 있을 거야. 영국에서는 러쉬가 더 싸니까 거기서 사면 되겠지. 그러니까 이거 안 사도 전혀 무성의한 게 아니겠지? 그렇게 생각하지? 난 대답했다. 뭐...그렇겠죠.

문득 조지아에서 만났던 또다른 영국인 크리스토퍼가 생각났다. 하던 일을 관두고 여행을 떠난 사람이었다. 무슨 일을 하셨어요? 보험업계에 있었어요. 돌아가서도 같은 일을 하실 거예요? 그럼요. 직장 다시 잡기 쉬워요? 요즘 업계가 호황이라 괜찮을 거예요. 오래 산 건 아니지만 나는 본인 업계가 호황이라고 말하는 사람을 살면서 처음 보기는 했는데...댄을 보니 조금 이해가 갔다. 만약 영국인이 모두 댄 같으면 그 나라 보험업계는 영원히 호황일 것이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밖을 바라보며 댄이 물어봤다. 지금 이 순간 가장 하고 싶은 게 뭐야? 내가 대답했다. 물 마시고 싶은데요. 댄이 빵 터졌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나는 그냥 따듯한 방에서 혼자 맥주 한 잔 하고 싶어. 텔레비전 켜놓고...영화나 축구 보면 딱일텐데. 어쨌든 이런 동네 말고. 참고로 여기서 이런 동네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인 베네치아를 말한다. 그런 도시에 있고 싶다. 물도 가까이 있고. 산도 가까이 있고. 멋진 공원도 하나 있고. 역사도 짧지 않아서 멋진 유적도 있고. 동네에 괜찮은 영화관도 있고 멋진 펍도 있고. 조용하면서 물가도 싸고 사람들도 좋아야 하고. 그렇다고 대도시까지 아주 멀지도 않고. 내가 그런 동네가 어디있냐고, 혹시 죽으면 갈 수도 있을 거니까 지금부터라도 회개하고 열심히 기도하라고 하였다. (댄은 종교가 없다. 같이 오래된 교회에 들어갈 때마다 아름답다고 감탄하면서도 막상 기도하는 사람들을 보면 현대과학이 수백년동안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데 아직도 저짓거리냐고 혀를 찼다. 과학으로는 모든 일을 설명할 수 없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되려 강하게 비판했던 안톤 부자가 문득 떠올랐다. 그래서 나는 안톤 부자 앞에서는 열심히 불교신자인 척 했다. 참고로 나도 종교가 없다. 괄호가 길어지니 이만 줄이겠다.) 그러자 댄은 딱 한 곳 있다고 하였다. 캔터배리가 바로 그런 곳이야. 그가 현재 살고 있는 동네였다.

댄은 애국심과 애향심이 넘쳤다. 아니다... 자부심이라고 해야겠다. 얼마나 넘치냐면 영국 요리를 먹어본 적 없는 인간들이나 영국요리가 맛 없다고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갓 영국에 온 유학생들이 영국 요리 먹어보기도 전에 버거킹과 맥도날드를 찾는 걸 보면 속에서 천불이 난다고 했다. 정말 제대로 영국요리를 먹어본다면 그런 소리 못할 거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하지만 막상 뭘 먹으면 되냐는 질문에는 즉답을 피했다. 나중에 영국 오면 메일 보내. 내가 리스트 적어줄게. 나도 벼르고 있다. 적어준 대로 먹어보고 댄을 비난할 준비를 마쳤다. 사실 댄이 말고기 버거를 맛있다고 할 때 느꼈다. 내가 고무 같은 식감을 비난하자 댄은 단지 우리가 소고기와 돼지고기에 익숙해서 그리 느낄 뿐이라고 내 말을 짤랐다. 그때 속으로 생각했다. 이쪽도 미각이 정상은 아니구나...

그래도 영국 음악에 대한 자부심은 이해해줄만 했다. 최고의 음악이라고 해도 딱히 반박할 것도 없었다. 어쨌거나 비틀즈의 나라 아닌가. 사실 댄하고 쉽게 친해진 것도 내가 음악덕후인 덕이었을 것이었다. 같이 다닌 첫날이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영국밴드가 누구냐고 물었더니, 내라 펄프라고 대답하니 퍽 놀란 듯 하아. 아마 한국인이 외국인에게 케이팝 아티스트 중 누구 좋아하냐 물어봤더니 외국인이 패닉을 좋아한다고 말하면 비슷한 표정을 짓게될 걸이다. 댄 본인은 팔구십년대 음악은 다 좋지만 그중에서도 스미스가 최고란다. 그러면서 스미스의 음악을 흥얼거리며 자그레브의 유명한 실연 박물관에 들어갔다. 마침 거기서도 스미스 노래를 틀고 있었다. 댄이 리셉셔니스트를 칭찬했다. 훌륭한 음악이네요. 스미스 좋아해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모리세이(스미스의 프론트맨)가 다음 주에 자그레브에 와요. 유럽 투어중이거든요. 내가 물었다. 암 걸렸다고 들었는데 그래도 온데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온데요. 저는 공연 가려고요.

실연 박물관은 말그대로 실연에 관한 박물관이다. 전세계의 실연당한 사람에개 물건을 기증 받고, 그 옆에는 그 사람이 직접 쓴 사연이 영문으로 번역되어 있다. 댄은 들어가자마자 역시나 한숨을 푹 쉬었다. 자기를 위한 박물관이란다. 자기 사연만 가지고도 방 한 칸 정도는 가득 채우고도 남겠단다. 그의 연애는 대개 비슷한 결말을 맞았다. 헤어졌다...는 정도로 비슷하다는 건 아니고...거의 다 외국인 여자친구였는데, 마지막에 나랑 같이 영국에 가서 살자고 하면, 다들 처음에는 그러자고 했다가 막판에 각종 이유로 틀어졌단다. 단순 변심부터 아버지의 반대까지. 쌍년들. 우리 둘 다 낄낄댔다. 그렇다고 정말 원망하는 건 아니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으니 후회는 없단다. 앞으로 결혼할 수 있을지 없을진 모르겠지만.

내부의 전시품들의 사연은 다들 하나같이 강렬했다. 웃긴 것도 있고 슬픈 것도 있다. 남자들이라면 다들 알만한 풋볼 매니저 시디가 떡하니 걸려있는데, 프랑스 여자의 기증품이었다. 친구네 집에서 열린 파티에 갔다가 한 눈에 반해 남자와 동거를 했는데, 일 년을 같이 지냈으나 남자의 무책임함에 질려 결국 헤어졌단다. 풋볼 매니저는 남자가 주야를 가리지 않고 해대던 게임인데 마우스 딸깍하는 소리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고 했다. 그 무책임함의 상징이라며 시디를 기증한 것이다...

가슴 아픈 사연도 많았지만, 하나만 뽑으라면 아르메니아의 할머니가 기증한 사진이었다. 젊은 남너라 숲에 앉아 다정하게 찍은 사진이었다.

"저는 아르메니아의 수도 예레벤에서 온 올해 70살의 노인입니다. 1967년에 자그레브에 들린 적이 있습니다. 참 마음에 드는 도시이요. 제가 지역 신문을 읽다가 이런 곳이 있다는 걸 알게 됐는데, 슬프면서도 한 편으론 기쁘더군요.

이 사진은 오래 전 우리 옆집에 살던 젊은이가 문틈으로 넣어둔 사진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그 젊은이와 3년째 사랑하고 있었지요.

아르메니아 전통에 따라, 그의 부모님이 저희 집이 찾아와 댁의 여식을 데려가도 되겠냐고 요청했습니다. 제 부모님은 그쪽 아들에게 우리 딸을 줄 수 없다며 거절했어요. 저는 무척 화났고 상심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젊은이는 차를 몰아 절벽에서 뛰어내렸답니다..."

박물관 안에는 방명록이 있었다. 역시나 이곳에도 전세계 언어로 각종 사연이 적혀있었다. 한국어도 많이 있었다. 솔로 짱이라는 농담부터, 만나고 헤어지는 게 사람 삶이니 꿋꿋하게 살자는 스스로 다지는 각오인지 남에게 주는 충고인지 모를 말, 이젠 정말 안녕이라는 말....그러나 거기 그렇게 적는다고 정말 안녕이 되나, 밤이 오면 어김없이 그리울 텐데. 무뎌질 때까지 이젠 안녕이라는 말을 몇 번을 더 해야할지.

가슴을 후비는 수많은 어구 중 가장 와닿는 말은 보고싶다는 말이었다. 단순하지만 강했다. 정말 보고 싶다는 말만큼은 어떤 언어로 적혀있어도 알아볼 수 있을 것만 같다. 보고 싶다는 말은 언제나 작은 글씨로 적혀 있었다. 그 마음이 결코 작지 않을 텐데. 종종 뒤에는 말줄임표가 따라 붙었다. 보고 싶어...

염불보다 잿밥에 관심이 많다고, 전시물은 안 보고 방명록만 뒤적거리는 내 옆에 댄이 왔다. 댄도 좀 뒤적거리더니 내게 물었다. 뭐 적을 거 있어? 내가 대답했다. 아니, 딱히...하지만 댄은 무언가 적어야겠단다. 펜을 잡은 그는 먼저 옛사랑의 이름을 불러내더니 멈칫했다. 잠깐 고민하더니 결국 무언가 적었다.

사랑해줘서 고마워.


2014/12/13

Posted by 시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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