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기억 못할 만한 영화지만, 영화의 한 장면 이야기부터 해야겠다. 2003년에 「남남북녀」라는 영화가 개봉했다. 조인성과 김사랑이 나왔다. 휘파람 소녀의 연장이라 봐도 괜찮다. 별로 재미 없었던 이 영화에 나오는 축구 관련 대화 딱 한마디. 북한의 '오영희' 역으로 나오는 김사랑이 자신은 북한의 축구선수 '전철'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독특한 이름일세.

  전철은 실존하는 축구선수다. 지금도 공을 차고 있는지는 알 길이 없다만, 그는 2002년 열린 남북통일축구에서 북한의 에이스였다. 그 독특한 이름 때문에 기억에 남아 남한 영화에까지 이름이 나왔지만, 몇 년이 지나고 북한 축구 선수단을 보니 그의 이름을 찾을 수가 없었다. 아마 에이스라는 선수가 그러하니 북한 선수단 대부분이 바뀌지 않았을까 싶다. 이제 홍영조를 제외하면 그들의 실력도, 특징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

  지금 북한의 에이스는 정대세다. 그러나 그는 전철과는 명확히 달라보인다. 그는 지금까지 그 어느 북한의 대표선수보다도 남한 땅에 잘 알려져있다. 왜일까? 북한 축구가 최근 몇 년간 중흥기를 맞고 있어 월드컵에 진출했고, 또 그는 아시아의 여느 선수와 비교해도 상당한 경지에 있는 선수인 것은 맞다. 80kg에 육박하는 덩치에 빠른 반응, 저돌적인 자세, 그리고 간간히 보여주는 지능적인 모습. 하지만 그가 유명해진 것은 축구실력 때문이 아니다. 그는 매우 특이한 입장에 서 있는 선수다. 그는 한국 국적을 가진, 일본 땅에서 태어난, 북한 대표다.

  사실 북한의 정대세 만큼 꼬인 국제관계 아래서 뛰는 선수가 하나 더 있긴 하다. 수원의 안영학이다. 재일교포 출신의 북한 국가대표인 그는 남한에서 자본주의의 첨탑 같은 기업이 돈을 대는 클럽에서 뛰고 있다. 다만 정대세는 사진에서 벌써 느껴지지 않는가? 그는 젊고, 힙합을 좋아하며, 나이키의 후원을 받고, 포털 사이트에 칼럼을 연재하며, 염색을 하고, 말도 많은데, 그만큼 말도 잘하며, 자기주장이 뚜렷하다. 그는 북한의 어느 선수보다 더 눈에 띈다. 반강제로 동원된 관중들마저 그것을 느끼나보다. 그는 안영학과 같이 북한에서 처음으로 '이름'으로 응원가가 불려진 선수다. 이것은 북한의 변화일까, 아니면 정대세가 너무 눈에 띄기 때문인 걸까?

  정대세가 한겨레 지면에 칼럼을 쓴 적이 있었고, 내가 정대세라는 선수를 의식하게 된 것도 그 때였다. 우리나라에서 축구선수가 칼럼을 쓰는 경우는 무척 드물다. 지면을 잘 내주지 않기도 하고, 우리나라에서 인터뷰 하나 또렷하게 하는 선수가 어디 흔하던가. 하물며 현역 북한 대표 선수가 정기적으로 칼럼을 연재하다니. 일본어 글투가 묻어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정대세는 유쾌한 글쟁이였다. 아무래도 3국에 끼여 사는 프로축구 선수가 할 말이 부족할 일은 없어보인다. 그 실력을 인정 받은 덕인지 지금은 네이버에서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본인 스스로도 문장력이 늘어 매우 흡족해하는 듯 하다.

  이제 그는 2010년 월드컵을 앞두고 있다. 유럽 진출과, 월드컵 진출이라는 목표 중 벌써 절반을 이루었다고 기뻐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3국의 경계인인 그의 슬픔보다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다.. 분명 그는 고민도 하고 고난도 겪었겠지만, 이상하고 긴장된 세상은 변하지 않았더라도, 지금 그는 하고 싶은 일도 많고 그의 근육만큼이나 탄탄하고 깊은 생각을 가진 젊은이다. 오히려 그의 꿈에 대해 논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그는 3국의 가교가 되고 싶다는 말을 했다.

  그가 아주 극적인 변화를 불러오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스포츠의 힘은 위대하다. 그가 지금보다 더 좋은 활약을 보여준다면, 예를 들어 당장 월드컵에서 2골 정도를 넣거나, 유럽 리그에 진출하여 몇 년간 꾸준한 활약을 하면 그가 하고 싶은 말들이 더 널리 퍼질 것이다. 3국의 경계인인 그는 3국에 모든 다른 파장을 끼칠 것이다.

  최소한 한국인의 자이니치에 대한 인식을 개선할 수도 있다. 추성훈은 무릎팍 도사와 광고에 나왔고, 정대세는 광고를 찍고 칼럼을 쓴다. 그 둘은 자이니치라는 것을 당당하게 밝히는 몇 안되는 공인이다. 특히 정대세는 조총련의 영향을 받았다고 노골적으로 말하기에 더 중요하다. 재일동포가 영원한 경계인을 택하며 총련을 중심으로 똘똘 뭉치게 된 것은 역사의 상처 때문인데, 그 후예인 정대세는 분노는 하지 않지만 잊지도 않고 있다. 역사적 아픔을 잊지 않기 위해 세워진 기념비만 몇 개던가. 축구와 힙합은 세계 평화를 위해 만든 훌륭한 발명품이라고 말한 정대세, 그는 살아있는 화해의 기념비가 될 수 있을까? 아마 일본에게 정대세가 뜻하는 바도 비슷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북한 사람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칠 것이다. 정대세는 북한에서 살아본 적 없는 북한 선수다. 그리고 북한에서 처음으로 이름으로 응원 받은 선수다. 북한이 과거 경제 개발 계획을 진행할 때, '인민 영웅'들을 뽑아 띄워줬지만, '인민 루니' 정대세는 그들과 다르다. 기존의 인민 영웅들이 사회주의, 노동, 공동체를 이야기했다면, 정대세는 칼럼에서 에코, 패션, 그리고 프로페셔널리즘을 말한다. 쉬는 날에는 충실히 소비를 하며 편안히 지낸 정대세가 북한의 사회주의를 반길 수 있을까? 총련계 교육을 받은 그는 북한 국적을 택했지만 그를 주체 사상의 신봉자라고 볼 수는 없다. 즉 이제 북한 인민들이 이름까지 불러가며 열렬히 응원하는 선수는 "자본주의의 돼지"다. 정대세가 그만한 충격을 주었기에 유독 이름으로 불리는 것인지, 아니면 이것이 북한 자체의 변화이고 그가 일조하고 있는지 지켜봐야 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을 떠나 나는 정대세가 월드컵에서 좋은 활약을 펼쳐 유럽으로 나갔으면 좋겠다. 조편성을 보면 힘겨워 보이기는 하지만. 그의 칼럼에서 우러나오는 사람의 깊이가 감탄스럽기도 하고, 그의 축구 자체가 마음에 들기도 하다. 만약 그가 그가 바라는대로 서유럽의 팀에서(직접적으로 아스날에서 뛰고 싶다고 말했다.) 뛰게 된다면, 그건 또 나름대로 이야깃거리가 될 것이다. 적어도 북한을 핵폭탄 말고 축구로 기억할 거리는 주니까.
Posted by 시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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