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툭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나는 무시하고 걸었다. 앞에서 걸어가고 있던 노부부가 내 쪽을 쳐다본다. 그러나 시선이 나를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내 오른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도 같이 쳐다봤다. 어깨에 걸어놨던 카메라가 바닥에 널부러져 있다. 할아버지가 카메라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독일어로 떠들얼다. 나는 머릿속이 하얗게 질려 카메라를 들어올렸다. 떨어져나간 부분은 없었다. 돌바닥에 떨어졌는데 멀쩡하다니 안도감이 들었다. 제픔 잘 골랐다는 생각도 했다. 전원 스위치를 돌리자 멀쩡히 켜졌다. 그러나 렌즈 앞을 손바닥으로 가린 것처럼 디스플레이는 컴컴했다. 할아버지가 내게 물었는데, 독일어가 그렇게 선명한게 들린 적이 오랜만이었다. 카메라 괜찮아요? 대답할 정신이 없었다. 괜한 버튼만 이 버튼 저 버튼 눌러보고, 줌을 땅겨보려고 하는데 뜻대로 되지 않는다. 곧 메세지가 뜬다. 렌즈가 바르게 장착되지 않았습니다.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인가, 멀쩡하게 붙어 있는데. 카메라를 돌려 렌즈를 내 쪽을 보게 하였다. 렌즈가 찌그러져 있었다. 그래서 줌이 돌아가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손톱을 찌그러진 부분에 넣고 쑤셔서 벌려보려고 한다. 하지만 될 리가 없다. 할아버지가 말했다. 목에 걸고 다녔어야지. 할아버지가 카메라를 목에 거는 제스쳐를 한다. 나는 멍청한 짓은 그만두고 황망하게 렌즈를 뺏다 꼇다 해본다. 보다못한 할머니가 할아버지에게 말한다. 여보, 영어로 말해봐요, 영어로. 그러나 할아버지는 계속 독일어로 말한다. 괜찮아 보이는데. 자 봐요, 카메라를 들고 이 쪽을 봐요. 할아버지가 할머니와 팔짱을 낀 후 내 쪽을 바라본다. 봐요, 우리 사진 좀 찍어줘요. 이쪽을 보고 셔터를 눌러봐요. 괜찮죠? 자 우린 준비 됐어요. 셋에 찍어줘요. 하나, 둘, 셋. 카메라 멀쩡하죠? 하지만 나는 멀뚱히 찌그러진 렌즈만 쳐다보면서 이 버튼, 저 버튼 누르고 있다. 할아버지가 묻는다. "Kaputt?" 정말 고장났어요? 내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Ja, kaputt." 네, 고장났어요

원래 사진 찍는 취미가 없다. 셀카도 잘 안 찍는다. 여행에 카메라를 안 들고 올 계획이었다. 잘 찍지도 못하는 거 들고 다녀서 뭐하나 싶었다. 미적 감각이 영 좋지도 않고, 조리개니 셔터니 공부하기도 싫었다. 남는 건 사진 뿐이라지만, 나중에 정 그리우면 인터넷에서 검색해서 보면 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보다 잘 찍었을테니. 생각이 10월 되서야 바뀌었다. 딱히 여행과 사진의 필요충분조건 관계에 대한 생각이 바뀐 건 아니다. 어쩌다 회사선배가 들고 다니는 카메라를 만져보게 됐는데 가볍고, 화질도 좋았고, 무엇보다 와이파이로 스마트폰이나 패드에 바로바로 백업이 가능하다는 게 매력적이었다. 선배가 조만간 단종되니 빨리 사란다. 그렇게 막상 구매를 한 이후에도 출국할 때까지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나가기 전에 한 번 정도는 공부를 하려고 했는데, 귀찮았다. 뮌헨 공항에서 경유할 때 잠깐 사용설명서를 뒤적거린 게 다였다.

애초에 사건과 사고를 쓰기로 결정했던 것도 사진을 잘 못 찍기 때문이었다. 뭔가 흔적이 남기는 남았으면 하는데, 사진을 잘 찍진 못하니 글이라도 쓰기로 한 것이다. 그냥 도시에서 이거했다 저거했다 하면 일기 같을까봐 글 하나 안에서도 사건순서를 고의적으로 뒤섞는 등 이것저것 한다.

그래서 글만 열심히 쓰게 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사진 찍는 것도 재밌다. 한 도시에서만 몇 백장 찍는 경우도 있다. 일행이 있을 땐 사람 사진 찍는 것도 재밌다. 여전히 잘 찍지는 못하지만 몇 가지 배운 게 있다. 무엇을 찍는지가 당연히 제일 중요하고, 그 무엇을 어떻게 어디까지 보여줄 지도 중요하다. 절묘한 순간을 순간포착을 할 수도 있고, 계산된 구도로 한 장에 이야기를 담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동방정교의 성당이었다가 모스크가 된 이스탄불의 야야 소피아 같은 경우, 실내전경을 찍을 때 두 종교의 성물이 같은 프레임 안에 들어오게 찍으면 건물의 성격이 더 잘 드러날 것이다. 로마시대 경기장과 유럽에서 두번째로 오래된 모스크가 이웃하고 있는 플로브디프 같은 도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단순히 건물 하나의 정경을 찍을 때도, 그 건물의 성격을 나타내는 부분은 잘리지 않도록 조심하며 찍었다. 교회를 찍는다고 치면 십자가는 짤리지 않도록.

하지만 사람을 찍는 건 어렵다. 어떻게 찍어야 할 지 전혀 모르겠다. 그냥 막 찍고 한 장 건지는 식이다. 사실 셀카도 제대로 못 찍는데 남의 사진이라고 제대로 찍을까 싶다. 길거리 지나가는 사람들은 정말 못 찍겠다. 도촬하는 거 같아 기분이 찝찝하다. 정 찍고 싶을 때는 줌을 최대한 땅겨서 대충 찍고 도망간다.

어쨌든 처참한 심정으로 맥도날드로 가서 와이파이를 잡았다. 주변의 카메라 매장을 몇 곳 검색하고 발품팔아 돌았는데, 내가 부숴먹은 렌즈가 이 기종에서 가장 싼 렌즈란다. 근대 그게 카메라 본체 값과 맞먹었다. 한국이라면 저 가격의 절반도 안 되는 걸 알고 있었다. 차라리 똑딱이를 하나 살까 고민하기도 했다. 렌즈는 돌아가서 한국에서 사면 되는 거 아닌가...했지만 결국 그 가격을 줬다. 계속 최소한 이 정도 화질은 유지하고 싶었다. 어차피 똑딱이를 산다면 한국에서 쓰지는 않을 것 같기도 했고. 기분이 무척 좋지 않았다. 지갑이 텅 비었다. 벤치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여행 초반에 그런 생각을 했다. 유럽은 모험의 대상이 될 수 없구나. 약간의 스릴을 기대하고 온 입장에서 김이 빠지는 일이었다. 멍청한 생각이긴 하다만. 하여튼 유럽은 동유럽이든 서유럽이든 돈만 있으면 딱히 서러울 것도 위험할 것도 없는 곳이고, 여행객이 겪을 수 있는 대부분의 위기는 돈으로 넘길 수 있는 곳이라고.

바로 그 돈이 없어서 한 3일간 일정을 줄줄이 취소했다. 온천도 안 갔고 박물관도 안 들어갔다. 그냥 와이파이 되는 카페나 호스텔 로비에 앉아 읽고 쓰기만 했다. 요 며칠 글이 길었던 이유다. 


2015/1/12

Posted by 시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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