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당당한 노숙자는 처음이었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지나가는 나를 공손하게 불러세우더니만 또박또박 정확한 문법으로 본인의 요구를 전달했다. 현재 수 주째 씻지 못하고 있으며 장기간의 노숙생활로 인하여 심신이 많이 지친 상태입니다. 하룻밤 호스텔에서 묵을 수 있다면 따듯한 샤워를 할 수 있고 제대로 된 아침식사를 할 수 있습니다. 약간의 적선을 간절하게 부탁드리며, 만약 몇 푼 주신다면 매우 감사할 것입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그냥 지나갔다.

안경을 찾으러 가는 길이었다. 전날 레 미제라블 뮤지컬을 보고, 다음날 숙소를 다른 호스텔로 옮겼다. 그리고 그날 아스날 스타디움 투어를 갔다. 여기까진 좋았는데...경기장에 가서 가방을 뒤지니 안경을 보이지 않았다. 또 물건을 잊어버렸나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했다. 이젠 잃어버릴 게 없어서 안경까지 잃어버리다니.

여행 중 잃어버린 물건만으로도 여행기를 한 편 쓸 수 있을 것 같다. 첫날부터 잃어먹었다. 터키에서 보낸 첫 날 보조 배터리 하나를 잃어버렸다. 침대 틈새로 빠졌는데, 당장 꺼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저녁에 꺼내려고 관광을 하고 오니 아예 사라져있었다. 그나마 배터리 두 개 중 용량이 작은 것이었다는 게 유일한 위안거리였으나... 나머지 하나도 결국 분실했다. 이것도 어떻게 사라졌는지 확실히 기억난다. 릴의 호스텔에 두고왔다. 충전할 때 나오는 파란 불빛이 거슬려서 베개 밑에다가 감추었다. 그리고 다음날...그대로 떠났다. 파리에서 짐 풀다가 깨닳았다.

떠나간 열차에 미련을 갖지 말자. 90일의 여행 중에는 물건을 잃어버리는 것도 어딜 못 가는 것도 깜빡 놓치는 것도 비일비재한 일이었다. 지내다보니 아쉬움은 결국 희석된다. 그때까지 꾹 참고 즐기면 된다. 이게 길에서 배운 지혜라면 지혜였지만...안경을 두고도 그럴 순 없었다. 사실 한국에서 다시 맞추면 된다. 맞추면 되는데...문제는 3일 후에 아스날 경기를 봐야한다는 것이었다. 평소에 안경 안 끼고 다니기는 하다만...이번에는 경우가 달랐다.

안경이 어디 있다는 단서는 없었다. 그날 내가 갔던 장소를 다 가보는 수밖에. 가깝지 않았지만 별 수 없었다. 현재 숙소는 로얄 알버트 홀. 저번 숙소는 뉴 크로스 게이트 역 근처. 뮤지컬은 소호...서울로 치면 안경 찾겠다고 하루 종일 신촌, 대학로, 강남을 떠도는 셈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못 찾았다. 극장 직원도 저번 호스텔 직원도 참 친절했지만, 친절하다고 없는 안경을 찾아낼 수는 없었다. 나는 잔뜩 풀이 죽어서 피카딜리 서커스 근처에서 대충 저녁을 떼우고, 바로 숙소로 돌아가기는 싫어서 근처에서 어슬렁 거리는데...약국이 있었다. 2층에는 안경점이 있었고. 대형 전광판 달린 유명한 유선형 건물이었다. 셜록 같은 영국 드라마 보면 언제나 타이틀 화면에 나오는 바로 그 건물. 살짝 희망을 품고 혹시 컨택트 렌즈를 구입할 수 있냐고 물었다. 안경사에게 시력 검사를 받으면 가능하단다. 잘됐네요. 지금 검사를 받을 수 있나요? 아뇨, 내일 오후 4시에 다시 오셔야해요. 가격은 60파운드입니다. 한숨을 푹 쉬고 가게를 나왔다. 그냥 안경 없이 경기를 봐야겠다.

계속 축 쳐져있기 싫어서 뮤지컬을 봤다. 맘마 미아. ABBA도 대충 알고, 뮤지컬의 내용도 영화로 본 적이 있어서 익숙해서 골랐다. 옆에는 배낭여행계에서 멸종된 줄 알았던 일본인들이 앉았다. 남자 하나 여자 넷의 복받은 조합이었고, 공연 시작할 때까지 재잘재잘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눴다. 조금 부러웠다. 댄이 집이 간 후 나는 며칠 째 기본적인 대화("이건 얼마에요?")와 약간의 고급대화("제가 안경을 여기서 잃어버린 것 같아요.")밖에 하지 않았다.

난 정말 여행이 지겨웠다. 호스텔의 다인실에서 잘 때마다 남이 뒤척이고 코고는 소리 듣는 것도 싫었고(전역도 했는데!), 샤워할 때마다 얇디얇은 스포츠 타월 한 장으로 온 몸을 닦아야하는 것도 싫었고, 그 이후에 샤워용품과 세탁물을 바리바리 들고 방으로 돌아가는 것도 번거롭고, 대화상대가 없어서 종종 혼잣말하는 것도 비참하고, 와이파이 안 잡히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으며, 물건 잃어버릴 때마다 자책한 후 잊자잊자 재밌게 놀자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것도 싫증나고, 돈낭비했다는 걸 깨달았을 때 내 처지를 비관하는 것도 짜증나고, 올해 생활비를 까먹으면서 여행하고 있다는 생각하면은 초라하고, 관광도 재미없어진지 오래다. 유럽 도시가 얼마나 천편일률적 구성을 지니고 있는진 오래 전부터 말했다. 성도 지겹고 교회도 지겹다. 정교회고 가톨릭이고 성공회고 개신교고 뭐가 뭔지도 이제 모르겠다. 딱 하나 예외가 있었는데, 미술관과 박물관은 되려 뒤로 갈수록 좀 재밌어진다. 컬렉션이 나아진 덕일 것이다.

밥도 문제였다. 처음에는 말고기니 사슴고기니 괴식탐방하는 재미라도 있었는데, 서유럽 국가로 넘어오고부턴 그런 재미도 사라졌다. 다들 뻔하고 맛도 없었다. 특히 영국은 대미를 장식할만 했다. 영국에서 제일 맛있는 건 맥도날드에서 먹은 치킨 레전드였다. 그건 정말 이름값을 했다. 레전드의 맛이었다. 그 외의 모든 영국스러운 음식...피쉬 앤 칩스고 뭐시기고 길거리에서 파는 햄버거까지 골판지 씹는 줄 알았다. 밥 먹을 때만 짜증나는 건 아니다. 밥을 못 먹고 있을 때도 짜증난다. 독일에서 한동안 케밥만 먹고 살 때가 있었다. 그땐 하루종일 살짝 배고픈 상태였다. 그 상태가 며칠 지속되니 짜증이 치솟았다. 내가 굶어죽지 않을 건 안다. 딱히 맛있는 게 먹고 싶지도 않고, 사실 뭘 먹어도 상관은 없다. 하지만 이 불쾌함을 견딜 수가 없어서 배에다 뭐든지 가득가득 쑤셔넣고 싶었다. 그래서 점심은 8.5유로짜리 중식 뷔페에 가서 위장에 고기를 쳐붓고, 두 시간 후 맥도날드에 가서 빅맥세트를 해치웠다.

댄 앞에서도 같은 소리를 했다. 댄이 물었다. 이제 집에 가고 싶어? 당연히 가고 싶다. 더 하고 싶은 것도 없다. 이딴 짓 다시는 안 한다고 과장된 몸짓으로 감정을 표현하려고 했으나...막상 하려니 대답이 목구멍에서 걸렸다. 스스로에게 물어봤다. 여행을 계속하고 싶냐? 그만 할래. 집에 가고 싶냐? 아...그건 좀. 가고 싶지 않았다. 한참 침묵하다 마침내 입을 열었다. 별로 가고 싶진 않아요. 그가 다시 물었다. 가족이나 친구들은 보고 싶지 않아? 역시 한참을 고민하고 대답했다. 그립기는 한데, 그립기는 한데...내가 말을 못 잇자 댄이 뒷말을 추측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맘마 미아가 끝났다. 런던에서 본 뮤지컬 두 편의 감상평. 레 미제라블: 영화보다 재밌다. 맘마 미아: 영화보다 재미 없다. 레 미제라블을 한 번 더 볼 걸. 그래도 보기 전보다는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마지막 앙코르 때 Dancing Queen을 다시 불러준 게 특히 좋았다. 앞좌석의 아줌마는 아예 일어나서 춤을 추었다. 나도 따라 일어났다. 즐겨야만 한다. 즐거워야만 한다. 공연은 훌륭해야 한다. 훌륭하지 않아도 추억 하나는 있어야지. 물건 잃어버린 것도 추억이 되어야만 한다. 한국에 돌아간다면, 그냥 기분이 꿀꿀하다는 이유로 공연을 보러갈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한 소절 따라부르고 자리에 앉았다. 이게 뭐하는 짓이냐.

다음날에는 민박집으로 숙소를 옮겼다. 최후의 며칠은 편하게 지내고 싶었다. 12시에 체크인 가능하단다. 막상 갔더니, 12시부터 5시까지는 청소해야되니 잠시 딴데 놀러갔다 오란다. 소호에 갔다. 맥도날드에 가서 밥을 먹었다. 감기기운이 있어서 식탁에 엎어져서 졸았다. 5시가 되자마자 숙소로 돌아갔다. 짐을 정리하고 씻었다. 몸도 안 좋은데 그냥 그대로 잘까 하다가...며칠 안 남았는데 하루라도 낭비할 수 없다는 강박에 인터넷을 뒤졌다. 블러가 무명시절에 공연을 했다는 보더라인이라는 클럽에서 DJ셋이 열린단다. 그래 여기서 놀다 들어와야지. 그런데 민박집에서 통금이 있단다. 다음날 아침에 들어온다고 하니까 그러라고 했다.

놀다가 새벽 세 시에 나왔다. 우리처럼 24시간 연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길가에 벌벌 떨면서 서있었다. 가만히 있으니 더 추워서 거리를 왕복했다. 무릎이 삐그덕거렸다. 런던에서 드물다는 눈이 내렸다. 발바닥이 얼어서 감각이 없었다. 그렇게 네 시간을 버티고 숙소로 들어와서 바로 뻗었다. 점심 쯤에 민박집 사장이 나를 깨우더니 말했다. 이러시면 안 되죠. 12시부터 5시부터는 저희가 청소도 해야하고, 또 가족들이 집을 비우기 때문에 손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되어요. 그런 조건 인터넷 사이트에 좀 미리 적어두지 그랬냐고, 3개월 여행하다가 이런 숙소 처음봤다고 따지는 대신 나는 죄송합니다...말하고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일어날 힘도 없었다. 사장은 벌레씹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방 밖으로 나갔다. 난 코웃음을 쳤다. 지가 뭘 어쩔 건데. 물론 사장에겐 안 들리게. 여기가 일박에 무려 삼십 파운드다. 대략 사만오천원이다.


2015/2/15

Posted by 시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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