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아의 영토가 그렇게 넓진 않지만, 지형이 복잡한 탓에 지역마다 기후 차이가 심하다고 한다. 여기만 해도 그렇다. 숙소에서 좀만 걸어가면, 자갈해변과 흑해가 눈 앞에 펼쳐진다. 해변대로에는 야자수가 자란다. 그런데 오른쪽으로 고개를 좀만 돌리면 저 멀리 설산이 보인다. 최소한 한국에서는 볼 일 없는 풍경이다. 어쨌거나 저 산이 아자라야 공화국과 조지아를 가르는 기준이란다. 아자라야 공화국은 어디냐고? 내가 있는 곳이 아자라야 공화국의 바투미다. 이곳은 아자라야 공화국이고, 아자라야 공화국은 자치정부가 있지만 일단은 조지아의 일부다. 바로 위에 러시아, 왼쪽에 터키가 있다보니 자연스레 정치적으로 복잡해졌다. 조지아 북쪽에는 또 남오세티아라는 나라가 있다. 러시아와의 전쟁 이후에 생긴 나라인데, 조지아는 이곳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 물론 러시아는 남오세티아를 강력하게 지지하고 있다.


오전에는 먼저 숙소 옆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집주인이 에어비엔비에 적어둔 설명에 따르면 세상이서 가장 맛있는 아자라얀 카차푸리를 파는 집이라는게...뭐 맞는 말일 것이다. 세상 어디에서 또 아자라얀 카차푸리를 팔까. 치즈빵 도우에, 치즈 듬뿍, 그 위에 날계란, 그 옆에 버터 한 덩이를 올린 피자 같은, 혈관에 콜레스테롤이 잔뜩 낄 거 같은 음식이다...내가 웬만하면 주는 대로 받아 먹는 인간인데, 먹다 지쳤다. 아 이 사람들은 이런 걸 먹고 산단 말이지. 하지만 내가 질렸든가 말든가 점심 때 만난 집주인은 아자라얀 카차푸리에 자부심이 넘쳤다. 먹어보셨다고요? 정말 좋죠? (예아, 잇 워즈 그레잇...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ㅜㅜ) 아자라얀 카차푸리를 파는 곳은 많죠. 트빌리시(조지아의 수도)에서도 팔고, 러시아에서도 팔죠. 하지만 진짜는 아자라야에서만 먹을 수 있어요. 아자라얀 카차푸리니까요. 그 중에서도 저 가게에서 파는 게 최고에요. 저거 먹으려고 조지아 전역에서 온다니까요. 


밥을 먹고는 자전거를 타고 해변을 달렸다. 빌리는 것도 일이었다. 방법을 알 수가 없어서 해변에 쫙 깔린 경찰들에게 물어봤다. 경찰들은 불친절하진 않았지만, 크게 도와주고 싶은 생각도 없었던 것 같다. 결국 여행안내소에까지 갔는데, 다행히 그곳에서 바로 빌려주었다. 구름 한 점 없었다. 왼쪽에는 야자수길. 오른쪽에는 흑해. 왼쪽 야자수길 너머에는 허름한 아파트 혹은 짓다 만 고층빌딩들. 오른쪽 바다 건너에는 아마 불가리아가 있을 것이다. 나들이 나온 가족들, 이대일 패스를 주고받으며 해변을 달리는 청년들, 여행 온듯한 소녀들, 간이 축구장에서 공을 차는 아이들, 지켜보는 부모와 형제들...어젯밤 버스를 타고 올 때는 이 동네가 왜 이리 무서웠는지 모르겠다. 좀 돌아보니 평화로운 동네였다....흑해의 라스베가스라는 별명이 있다는데, 그건 트럼프 카드로 고스톱 치는 소리고, 사실 강원도 속초 같은 곳이다. 뭐 강원도에도 카지노는 있으니까! 참고로 이스탄불은 서울시 용산구다.


자전거를 반납하고 숙소로 돌아가니, 곧 집주인이 따라들어왔다. 당신이 민기 맞죠? 오, 한 번에 알아보시네요. 한국인이 온 건 처음이니까요. 커피 한 잔 하세요. 그러죠.


조지아식 커피는 미숫가루처럼 가루가 많이 씹히고, 많이 달다. 단 거야 설탕 탓이겠지만, 기본적으로 조지아 사람들은 설탕을 많이 넣는 것 같다. 어쨌거나 집주인을 따라 2층 발코니에 갔는데 먼저 앉아있는 사람이 있었다. 집주인이 그에게 물었다. 당신이 영국에서 온 크리스토퍼 맞죠? 네, 맞아요. 그도 나처럼 어젯밤 도착했단다. 원래는 보험일을 하다가, 일을 관두고 여행을 시작했단다. 집주인이 물었다. 돌아가면 다시 보험일을 다시 찾아야 하나요? 그렇죠. 집주인이 다시 물었다. 다시 직장 구하는 게 쉽나요? 사실 업계가 좀 호황이에요, 라며 괜찮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난 사실 살면서 요즘 호황이라고 하는 사람을 처음봤다. 영국인들이 걱정이 많은가 보다. 집주인도 굳이 따지면 내 편이었다. 전 여행을 다닐 만한 돈이 없어요. 제 입장에서는 당신들 같은 여행객하고 이렇게 대화하는 게 여행이죠....그래서 어디어디 갔다오셨나오?


나야 갓 여행을 시작했으니 별로 말할 게 없었지만, 크리스토퍼는 달랐다. 그는 진정한 배낭여행가였다. 모스크바에서 시작해서, 아제르바이얀,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뭐시기스탄 저시기스탄 등등...참 보고듣기 힘든 나라들을 많이 들렸는데, 그 중 압권은 투르크메니스탄이었다. 거긴 북한 같이 완벽히 통제된 나라라고 보면 된다. 내가 깜짝 놀라 물었다. 투르크메니스탄이요? 애초에 거길 들어갈 수나 있어요? 크리스토퍼는 씩 웃으면서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거리에는 경찰하고 환경미화원 밖에 없어요. 길은 잘 닦여있는데 보행자는 정말 단 한 명도 없고요...민주주의란 게 전혀 없어요. 어딜 가든 대통령이 있어요. 사진 봐요. 택시에도 있고, 호텔 로비, 호텔 방...이건 티비 화면인데요 하루 종일 대통령에 대한 뉴스가 나오고, 이건 어린 애들이 대통령 찬양하는 거고...심지어 대통령 말 타는 걸 방송으로 내보내요. 이건 나라에서 나눠준 여행 가이드에요. 봐봐요. 대통령이 한 말을 적어놨다니까요. "여행산업은 국가발전에 필수적이니 장려해야 한다." 내가 물었다. 왜 이런 걸 적어놓죠? 오히려 이런 걸 적으면 더 웃음거리가 되는 걸 모르나봐요? 크리스토퍼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모르니까 했겠죠. 


투르크메니스탄 사진을 쭉 보는데, 황당하게도 호텔에 말을 그린 액자가 걸려있는걸 찍은 사진이 있었다. 누가 말을 타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말 다섯 마리 그림. 왜 달랑 말만 있데요? 그가 대답했다. 대통령이 말을 사랑하거든요.


다음에는 어딜 갈 거예요? 오늘 저녁에 앙카라로 가요. 버스타고 16시간 정도....그 다음에는 이스탄불로 가지요. 그 다음에는요? 이스라엘....그 다음에는 요르단...거기서 여행을 끝낼 거예요. 내가 허탈하게 웃었다.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곳만 골라다니네요. 크리스토퍼가 대답했다. 사람들이 가보지 않은 곳에 가는 걸 좋아해요. 그리고 이스라엘과 요르단이 생각보다는 안전해요. 난 고개를 저었다. 안전하다는 말을 관대하게 사용하시네요. 가자 지구도 안전하다고 하실 거 같아요. 그가 깔깔 웃었다. 아니, 그건 아니고요...사실 남아공은 좀 위험했어요. 


늦은 점심을 같이 먹었다. 크리스토퍼에게는 조지아에서 갖는 마지막 식사였다. 영국인과 점심 먹는 건 처음이에요. 내가 그리 말하니, 크리스토퍼도 한국인과 점심을 먹어본 적은 없지만, 같이 이동해본적은 있단다. 투르크메니스탄에서 같이 페리를 탔어요. 중국으로 나와서 쭉 육로로 여행했데요. 그 말을 듣고 꽤 놀랐다. 투르크메니스탄의 한국인이라니 상상도 못했다. 자기 인생을 여행으로 채우는 사람이구나. 


크리스토퍼는 런던 근교에 산다며, 나중에 런던에 도착하면 연락하라 하였다. 물론 그때까지 여행 중일지도 모른다면서. 런던 사는 남자라면 당연히 축구 팬이죠? 당연하죠. 하지만 사실 좋아하는 팀은 런던에 없고, 독일에 있어요. 그래서 축구 보러 독일에 가요. 한 50번은 갔을 걸요? 세상에...어느 팀인데요? 그가 수줍게 웃었다. 말해도 모를 걸요? 하부리그 팀이거든요. 내가 자부심을 담아 말했다. 백퍼센트 알 거니까 말해봐요. 크리스토퍼가 시간을 좀 끌면서 말했다. 보쿰이에요. 알아요? 껄껄껄....역시나 아는 팀이다. 당연히 알죠. 한국 선수가 뛰었거든요. 크리스토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정대세가 있었죠. 요즘은 뭐해요? 내가 대답했다. 한국에서 뛰고 있어요. 크리스토퍼가 의아해했다. 그런데 정대세는 북한 사람 아니에요? 북한 사람이 남한에서 뛸 수 있나요? 맞는데...좀 복잡해요. 일본인이기도 하고, 한국사람이기도 하고, 기본적으로는 북한 사람이지만...


그가 떠나는 길에 내게 물었다. 바투미에서 앞으로는 뭐 할 거예요? 글쎄요...술이나 한 잔 하려로 하는데 안전할랑가 모르겠네요. 크리스토퍼가 나를 달랬다. 걱정마요, 안전해요. 유럽은 전반적으로 다 안전하거든요....


글쎄다....그의 안전이 내 안전하곤 많이 다른 것 같다.


2014/11/09

Posted by 시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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