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뤼셀에 도착한 날 가장 먼저 한 것은 빨래였다. 호스텔 리셉션에 물어보았다. 여기 세탁은 얼마에요? 간단명료한 대답이 돌아왔다. 여긴 없어요. 무인세탁소 이용하셔야 해요. 탄식이 절로 나왔다. 슈투트가르트부터 빨래 좀 하려면 하필 그 호스텔만 세탁 서비스가 없어서 계속 밖에 나갔다오고 있다. 웃긴 건 이전 호스텔이나 다음 호스텔에는 꼭 세탁서비스가 있다는 것이다. 정말 모를 일이다.

종종 걷고 종종 뛰어서 십오분 거리에 위치한 머나먼 세탁소를 찾아냈다. 안에서는 직원으로 보이는 히잡을 쓴 여성 둘이 서로에게 삿대질을 하면서 고성을 질러댔다. 나는 있는 듯 없는 듯 세탁물을 꺼내고 세탁기용 코인을 구입하려고 했는데...10유로를 집어넣었더니 대뜸 코인 두 개와 잔돈이 튀어나왔다. 당연히 코인 하나면 충분한데. 이게 뭔가 싶어서 두리번 거렸는데 자판기 옆 벽에 설명이 붙어있었다. 프랑스어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림은 충분히 알아먹을 수 있었다. 5유로를 넣으면 자동으로 코인 하나가 튀어나오고, 10유로는 두 개, 20유로는 다섯 개란다. 다시 한 번 탄식이 나왔다.

하지만 자판기의 농락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바로 옆의 세제 자판기도 문제였다.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돈을 넣고 번호를 선택하면 안의 나선이 뱅글뱅글 돌아가며 제품을 앞으로 떨구는 형태의 자판기였다. 왠지 느낌이 좋진 않았는데 설마 별일 있을까 싶어 돈을 투입했다. 1.8유로였으니 싸지도 않았다. 어쨌거나 버튼을 누르는 순간 제품이 앞으로 떨어지려 하다가...역시나 선반과 유리벽 사이에 꼈다. 그럼 그렇지.

보통 이런 경우 자판기를 통채로 흔들면 밑으로 빠진다. 그런데 이 자판기는 대체 어떻게 한 건지 온몸으로 밀었는데 꿈쩍도 하지 않았다. 유리창을 주먹으로 쾅쾅 내려쳐도 미동도 없었다. 나 혼자서는 해결이 안 될 거 같았다. 직원에게 물어봐야겠다. 아직도 둘이 싸우고 있어서 영 내키지는 않았지만...뭐 별 수 있나. 내가 구원이 필요한 눈빛을 뿜으며 슬금슬금 다가가자 두 여자도 내가 자기들에게 볼 일이 있는 걸 눈치챘는지 말다툼을 중단하고 나를 보았다. 잠깐 고민했다. 영어가 먹힐 것인가. 하지만 안 먹힌다고 불어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자판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말했다. 걸렸어요.

직원은 자판기 앞에 서서 한 손을 턱에 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아까 나처럼 주먹으로 유리창을 내려쳤으나 역시나 씨알도 안 먹혔다. 여자는 잠깐 고민하다가 내게 물었다....고 생각한다. 1.8유로, 를 외치며 손바닥을 내밀고 흔든 건 영어가 짧은 탓일 것이다...아마도. 밀어내기를 하려는 것 같았다. 뭐 나중에 돈 주겠지 싶어서 선선히 건내줬다. 역시나 돈을 자판기에 투입하고 같은 번호를 눌렀다. 세제 한 봉이 낀 봉지를 밀어내면서 같이 떨어졌다. 그리고 여자는 내게 세제 두 봉을 건내줬다. 내가 한 봉이면 된다고 하나만 집고 돈 달라고 하는데...여자는 내 품에 두 봉을 안겨주며 말했다. 돈 두 번, 봉지 두 개. 오케이? 내가 팔을 휘두르며 말했다. 노노, 아이 원트 리펀드. 하지만 환불해달라는 걸 못 알아듣는 것 같기도 하고, 얘가 도와줬더니 왜 이러나 싶어 당황해하는 것도 같았다. 순간 뇌리를 불현듯 스치는 생각이 있어서 물어보았다. 여기서 일해요? 여자 둘이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노노. 그들도 손님이었던 것이다. 다시 한 번 탄식이 나왔다.

빨래를 마치고 곧 호스텔을 나왔다. 저녁 약속을 잡았다. 브뤼셀 오기 전부터 유랑에 홍합탕 먹겠다고 뺀질나게 글 올렸는데 두 명에게만 연락이 왔고, 그나마저 한 분은 날이 안 맞아서 결국 보지도 못했다. 어쨌거나 외롭지 않은 척 도도한 척 혼자 4인용 테이블 차지하고 홍합탕 먹을 뻔한 위기에 빠진 나를 구출한 분을 만나러 나갔다. 근처 호스텔에 묵고 계신 송희 씨였다. 대학원 진학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온 것이라고 하셨는데(맞나 헷갈린다) 내가 복학한다고 하니 학생 시절이 최고라며 부럽다고 하셨다. 막상 학교 다닌지 4년 넘어가니 기억도 잘 안 난다. 굳이 따지면 작년과 재작년이 최고였다. 근데 이제 정말 복학 해야지...

저한테만 연락 받으신 거예요? 내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아니 한 분 더 연락 받았는데, 브뤼헤에서 오신다는 분이 답이 없네요...그러자 송희 씨는 며칠 전에 올렸던 글에 답이 왔다고, 몇 분 더 오실 거라 하였다. 아니 난 대체 왜 이리 사이버 세상에서마저 인덕이 없나 ㅜㅜ 실제로 약속 장소에 가니 4명이 더 있었다. 알고보니 상수피플이었던 황석이 형, 그리고 릴에서 유학 중인데 당일치기로 놀러왔다는 분, 유랑에서 만나 여행을 같이 하고 있다는 또래의 남자 둘이었다.

그렇게 셰 레옹이라는 브뤼셀에서 가장 유명한 홍합집에 갔다. 이왕 온 거 거금 25유로를 들여 화이트와인 소스 홍합탕을 주문했다. 맛은...실망스러웠다. 맛이 없다고는 하지 않겠다. 다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빕스 샐러드바에 있었던 벨기에 홍합탕보다 크게 나을 것이 없을 뿐. 카메라가 박살난 이후부터, 뭘 하나 먹고 뭘 하나 할 때마다 기회비용이 자꾸 머릿속에서 아른아른 거리는데 도저히 떨쳐지지가 않는다. 어차피 박살난 거 즐기자 싶어도 뜻대로 되진 않는다.

밥을 먹고 자리가 파할랑말랑 애매했는데, 릴로 돌아가야 하는 유학생 분만 떠나고 나머지는 맥주 한 잔 더 하기로 하였다. 동갑 친구가 호스텔에서 델리리움 카페라는 가게를 추천받았다고 한다. 브뤼셀에서 가장 유명한 술집이라고 한다. 근처에 있다고 하니 망설일 것도 없었다. 바로 이동하는데, 그 짧은 거리에도 한국어로 호객하는 사람들이 몇 번을 붙잡았다. 프라하 이후로 처음보는 호객꾼이니...한 달만이었다. 다시 관광객이 된 기분이었다.

델리리움에서 따로따로 주문을 하여 자기 맥주를 가지고 오는데, 주문을 하던 일행이 혹을 하나 달고 왔다. 보통 이런 경우 한국인을 데려오는데, 엉뚱하게도 브라질 여자였다. 그것도 미녀였다만...건배를 할 때 내 손이 조금 세게 나가서 맥주가 그녀 쪽으로 튀었다. 일행이 장난스레 내가 벗어둔 빨간 목도리를 건넸는데...정말 그걸로 닦았다! 내 목도리! 70일 넘게 차고 다닌 내 목도리! 비록 그간 한 번도 안 빨았지만 내 목도리! 그녀가 웃으면서 말했다. 미안해요. 하지만 그쪽 잘못이니까. 속에서 끓어올랐지만, 화 내봤자 부질 없는 것 같고 그러려니 넘어가려고 했으나...복수의 기회는 찾아왔다. 그녀가 우리보다 일찍 자리를 떴는데, 자기 목도리를 두고 간 것이다. 우리가 나갈 때까지 찾으러 오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가졌다.

이대로 밤을 끝내기는 아쉬워서 두 군데를 더 갔다. 레게음악 틀어주는 라운지 바, 그 다음에는 입장료 안 받는 라이브 클럽...굳이 우열을 가리자면, 난 언제나 디제잉보다 밴드를 좋아했기 때문에 라이브 클럽이 더 좋았다. 여자가 어쿠스틱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고 남자가 뭔지 모를 타악기로 장단을 맞췄는데, 종종 아는 노래가 나와서 반가웠다. 여행 초반에는 밤에 심심하면 그냥 라이브 클럽 찾아서 떼우지...이런 마음이었는데 막상 여행 중에 다섯 번도 안한 것 같다. 아홉 시만 넘어가면 피곤하다. 어쨌든 공연을 보고 맥주를 마시다가 새벽 한 시쯤 헤어졌다.

그리고는 다음 날 브뤼헤에 간 것이다. 돌아오자마자 아스날 경기를 보러 펍으로 갔고. 맨시티를 리그에서 잡은 것도 오랜만이었거, 이렇게 완벽한 경기력을 보여준 것도 오랜만이었다. 술집에서도 아스날 팬이 더 많아서 분위기가 좋았다. 다른 응원가는 모르겠어도 지루 응원가는 쉬웠다.

또 아침이 왔다. 열차가 이른 시간대에 있었다. 허겁지겁 짐을 챙기고 역으로 갔다. 목이 말랐는데 마침 음료자판기가 보였다. 구멍이 돈을 넣었다. 자판기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다시 한 번 탄식이 절로 나왔다.


2015/1/23

Posted by 시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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