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목걸이 - 딜쿠샤 안주인 메리 테일러의 서울살이, 1917~1948
메리 린리 테일러 지음, 송영달 옮김
책과함께 (2014)

 

 

이 책의 저자 메리 테일러는 미국인 앤드류 테일러의 부인이었고, 일제강점기 행촌동에 있던(그리고 얼마전에 복원 된) 서양식 저택 딜쿠샤의 주인이었다. 앤드류 테일러는 3.1 운동과 제암리 학살 등을 해외 언론에 보도하였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언론인으로 알려져있으나, 그건 그가 역사의 격랑에서 조선에 대한 애정과 기독교적 사명감으로 한 일이다. 그의 본업은 조선 말 혹은 대한제국 시기에 금광개발사업권을 받은 아버지를 그대로 이은 광산 사업가였다. 메리 테일러는 영국의 좋은 집안의 규수로 태어나, 그 시대 비슷한 환경의 여성들이 그러하듯이 신부교육을 받고 사교계에 데뷔하여 좋은 집안에 결혼을 갈 예정이었으나, 부모와 사회가 짜준 트랙을 박차고 나와 세계 각지에서 공연을 하는 배우로 살면서 일본까지 가서 공연을 하다가, 사업차 일본에 와있던 앤드류 테일러와 사랑에 빠져 지구 반대편 은자의 나라에서 수십년을 보냈다.

그렇다면 메리 테일러가 어떤 시선으로 조선을 바라 보았는가. 전반적으로 애정과 동정심이다. 위에 적은 메리 테일러와 그의 남편인 앤드류 테일러의 인생 경로에 큰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메리 테일러 부부는 부유한 외국인이고, 부강한 나라에서 태어났고, 신분도 높고, 사교성이 좋고, 사업을 하며, 크리스쳔이며, 조선이 생활의 터전이면서 동시에 관광지였던 사람들이었다. 즉, 당시 조선땅의 부자 중에선 일본의 눈치를 볼 일이 가장 적은 사람들이었다. 어울리는 사람도 평범한 조선인과 일본인보다는 거의 다 조선 내 외국인 커뮤니티, 남편 회사의 근로자들, 집안 하인들이다. 남편 회사의 직원 중에는 젊은 시절 보빙사도 갔다온 양반 출신의 '김주사'라는 사람이 있다. '김주사'는 독립운동가이기도 했는데, 테일러 부부는 이를 묵인하며 계속 직원으로 사용하였다. 테일러 부부와 김주사의 관계가, 테일러 부부와 조선의 관계를 가장 잘 보여주지 않나 싶다.

메리 테일러는 보통 서울 내 외국인 커뮤니티의 사람들과 어울렸는데, 그러다보니 보통 책에서 볼 수 없는 작지만 흥미로운 사건들이 좀 적혀있다. 러시아 공산 혁명 당시 왕가의 편을 들었던 이른바 '백계 러시아'인들은 공산당이 정권을 장악한 이후 난민 신세가 되어버렸는데, 그런 사람들이 조선에 표류한 적도 있었고 개중 몇은 정착까지 하였단다. 테일러 부부를 포함하여 서울의 외국인 커뮤니티가 따뜻하게 품어주어서 대부분 무사하긴 했지만(그들이 어쨌든 서양인이었다는 점도 그나마 다행이긴 했을 것이다), 나라 잃은 사람들이 나라 잃은 민족의 땅에 정착했다는 이율배반은 메리 테일러 같은 조선 내 이방인의 서술이 아니면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앤드류 테일러가 3.1 운동을 보도한 에피소드는 잘 알려져있다. 마침 메리 테일러는 출산을 하고 세브란스에 입원해 있었는데, 일본 경찰이 병원을 뒤지기 시작하자, 3.1 운동에 참여한 세브란스의 간호사들이 독립선언문을 갓 태어난 테일러 아들을 뉘여 놓은 요람에 숨겨놓은 것이다. 앤드류 테일러가 그걸 발견하고 보도한 것이다. 기사만 쓰지 않았을 뿐 메리 테일러도 3.1 운동에 관심이 많았다. 메리 테일러도 병원에서 간호사들과 3.1 운동 얘기를 많이 한다. 조선인들은 메리에게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발표를 업그하면서, 서구 열강이 도와줄 것이라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열강과 식민지의 관계를 잘 알법한 영국인 메리 테일러는 조선인들이 실망할까봐 걱정한다. 결과적으로 메리 테일러의 걱정이 맞았고, 한동안 조선인들이 미국인을 공격하는 사태도 있었다고 한다.

읽으면서 요즘 미얀마 시위가 많이 생각 났다. 우리가 민족자결주의 같은 얘기를 한 적은 없지만, 케이팝의 영향인지 민주주의 쟁취의 선배여서인지는 몰라도 미얀마 국민들이 한국어 메세지도 쓰고 피켓에 케이팝 드립도 적혀있고 그렇다. 그냥 좋은 일이고 한국이 자랑스럽다 퉁치고 넘기기엔, 이 글을 적는 오늘까지만 해도 미얀마 시위대가 500명 이상 사망하였고 전망도 밝지 않다. 고통스러운 시기에 남이 알아주고 도와주는 것만큼 힘이 되는 일이 없다. 지금 미얀마가 대한민국이 그렇게 해주기를 바란다. 다만 대한민국이 다른 나라에게 도움을 요청받을 만큼 성장했다는 자화자찬 국뽕을 넘어, 실제 그 기대에 부합할 수 있는 나라일까. 3.1 운동 당시 조선인들이 미국에게 거는 기대가 이러했을 것이다. 그 기대의 무게가 너무나도 무겁다. 국제사회에서 리더가 되기를 원한다면, 리드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할 것이다.

 

Posted by 시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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