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는 절대 타기 싫다, 기차가 좋다, 하여튼 왠만하면 버스타고 이동하지 않겠다고 말한지 한 3일 된 거 같다. 바투미에서 앙카라까지 버스를 타고 간다는 다른 배낭여행자에게 한 말이다. 그는 고개를 으쓱 하고 떠났다. 난 비행기를 타고 가야하기 때문에 떠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고. 그 다음날인가, 심심함을 못 참고 바투미에 있는 아무 술집에 들어갔다. 이번에는 네덜란드에서 온 자전거여행자를 만났다. 회사에 반 년 휴가를 내고, 암스테르담에서 싱가폴까지 자전거를 타고 가는 중이란다. 하여간 여행 시작하고 만난 다른 여행자들이 전부 이런 식이다. 내 여행이 배낭여행이라기보다는 배낭휴양으로 보이게 만드는, 기가 질리게 빡세게 여행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정말 죽고나서 누군가가 그대는 생전에 뭘 하고 살았는가 물으면 여행자였노라고, 지구촌 곳곳에 발자국을 찍고 또 찍었다고 당당하게 말할 자격이 있는 자들일 것이다. 난 아니다. 이 여행이 끝나더라도 아닐 것이다.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도 않다.


그리고 방금 나는 그 타기 싫다는 버스를 타고 이스탄불에서 국경도시 카피쿨레까지 왔다. 긴 여정이었다. 바투미에서 비행기를 타고 이스탄불로, 지하철과 트램을 타고 귤하네로, 역전 식당에서 허겁지겁 배만 채우고 바로 버스를 타고 카피쿨레까지....역 근처 식당들이 맛 없는 건 한국이나 터키나 마찬가지였다. 역시 형제의 나라다.


어제까지만 해도 존재조차 몰랐던 카피쿨레의 누추한 대합실에서 이걸 쓰고 있다. 현재 시각은 두 시 반, 잠시 후 기차를 타고 국경을 넘을 것이다. 목적지는 불가리아의 플로프디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란다. 마케도니아의 도시이기도 했고, 로마의 도시이기도 했고, 또 다른 민족의 도시이기도 했다가, 결국 불가리아의 땅이 된지 천 오백년이 다 되가는데, 막상 도시에서 가장 유명한 유적은 로마 시대에 지은 극장이다. 생각해보면 바투미도 그랬다. 로마와 엮일 일이라곤 2000년 전에 잠깐 지배받은 게 전부인 도시다. 구시가지에 로마 유적도 딱히 없다. 그러자 로마 식으로 새 건물을 올리고 있었다. 정말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대합실에는 한 열 명 정도 있다. 성분을 보아하니 짐을 바리바리 싸든 노인 서넛, 배낭여행객 둘, 배낭휴양객 하나, 짐이 무겁지 않은 터키 청년 네다섯...조용하다. 오늘은 내 생일인데, 날짜가 바뀌는 순간은 버스 안에서 맞았다. 한 10년 전에도 이런 적이 있다. 외고 입시 준비하던 시절. 그때도 버스 안에서 생일을 맞았을 것이다. 그러고보니 내일은 수능이네...나 수능 볼 때도 생일 다음날이었다. 박정수가 케이크를 챙겨줬다.


어제만 하더라도 오리엔트 익스프레스라고 불리는 그 유명한 노선을 타고 국경을 건널 것이라고 생각했다. 막상 기차 역에 가니 운행 정지란다. 대신 버스를 운행하니 그걸 타고 가란다. 아니...생각해보면 조짐이 있었다. 위의 그 네덜란드 사람에게 불가리아에 간다고 하니까, 이스탄불에서 불가리아 가는 구간 공사하고 있던 거 같다며 말을 흐렸다. 정확한 건 아니니까 자세히 알아보라는 단서를 달면서. 좋은 정보 고마워요, 라고 말했지만 알아보진 않았고...아 그냥 돈이 많았으면 좋겠다. 소피아까지 비행기타고 가게. 비지니스 클래스로...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다행히 별 일 없이 무사히 도착했다. 길도 잘 닦여있었고. 버스 스태프도 친절하고....왜 버스 스태프라고 하냐면, 딱히 지칭할 말이 없어서 그렇다. 버스 한 대 가는데 세 명이 탄다. 당연하지만 운전기사, 말빨 쎈 승무원, 역할을 모르겠는 나머지 한 명. 셋이서 쉴새없이 떠들며 가는데, 졸음운전 할까봐 가슴 졸일 필요는 없었다. 나도 잠을 못 자서 문제지. 거기다 목도 아파서 제대로 잠을 설쳤다. 열차에서는 좀 자야 하는데...잠이 올련가. 최소한 체크인 할 때까지는 천근만근 같은 배낭을 매고 시내를 돌아야 하는데 피곤해서야 어떡하지. 


머릿속도 복잡하다. 아직도 여행의 갈피가 잡히지 않는다. 바투미에서 갖혀 있는 동안 왠만하면 빨리빨리 이동하자고 결심은 했는데, 도시에 들리면 뭘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대충 시간 떼우는 법은 안다. 심심하면 그냥 혼자 술 마시러 가면 된다. 그러면 배낭여행객을 만나든가, 아니면 외국인이 신기한 동네 주민들을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여행 계획 짜는 게 어려운데....예를 들면 플로프디프 다음에 들릴 불가리아의 소피아 같은 경우가 문제다....


소피아에서 제일 유명한 관광명소는 정교회 성당이란다. 근데 그건 바투미도 그랬다. 무슨 차이란 말인가. 바투미의 성당이 나름 인상깊다면 깊었다. 하지만 난 교인이 아니다. 이스탄불에서 모스크 몇 개를 들린 이후에는 모스크에 흥미를 잃은 것처럼, 정교회 교회라고 해도 그냥 썩....미술적 건축적 디테일을 안다면 더 재밌을 수는 있겠다. 그러나 내가 그런 쪽 소양이 전혀 없다는 게 문제다. 두고볼 일이다. 정교회의 역사라든가 종교적 절차라든가 그런 거라도 읽고 가야겠다.


그러고보니 가죽이 좀 싸다 들었는데 벨트를 새로 사야겠다. 신발도 사고 싶다. 집에서 나올 때, 나중에 바꿀 요량으로 가장 낡은 신발을 신고 나왔는데 열흘을 못 버티고 구멍이 났다.


많이 졸리다. 졸린 것도 졸린 거지만, 사실 지금 가장 고픈 건 물이다. 자판기 하나 없다. 이스탄불에서 샀든가, 아니면 고속도로 휴게소에서라도 샀어야 했는데 그땐 왜 생각을 못했는지. 동전도 몇 푼 남았는데. 자판기라도 하나 갖다놓지 아쉽다. 터키 청년에게 좀 얻어먹었는데 여전히 목 마르다. 


이제 타라는데...기차가 아니라 또 버스였다 아이고...이번 버스는 냄새도 퀘퀘하고 좋지 않다. 도착이야 별 일 없이 하겠지. 다만 내가 멀미 없이 가길 바란다. 울퉁불퉁한 길을 달리고 또 달리고....


하여 자고 일어난 지금은 오전 7시, 카피쿨레에서 터키 출국심사, 불가리아 입국심사를 거쳐 국경을 넘고, 시골도로를 달려 야발코보라는 역에 도착하였다. 이젠 또 기차를 타란다. 역도 낡았고 열차도 낡았다. 유레일 앱에 따르면 플로프디프까지 한 시간 남았다는데...영 신용이 안 선다. 시골도로에 이은 시골철도다. 한국의 시골풍경하곤 사뭇 다르다. 우린 언제나 산이 보이지만, 여기선 지평선이 보인다. 금방이라도 비가 올 듯 흐린 하늘 때문에 땅끝도 좀 흐리멍텅하게 보인다. 추수는 다 끝났는지 작물을 기르는 것 같진 않다. 이 사람들은 뭘 그리 열심히 키울까.


방금 호텔에 도착했다. 불가리아 사람들은 다들 친절했지만, 이상하게 다들 엉뚱한 길만 알려줬고 결국 내 힘으로 찾아왔다. 읽지도 못하는 키릴 문자를 짜맞춰가면서! 호텔 수속을 하는데 나이가 지긋한 로비 할머니가(호텔 주인 같다), 두꺼운 안경알 너머로 내 여권을 지긋이 읽더니 말했다. 해피 버스데이! 그래...오늘 생일이지 ㅜㅜ


2014/11/12

Posted by 시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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