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패다. 목적지를 찾을 수가 없다.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곳에서도 별 문제가 없었는데, 하필 독일에서 이런 문제를 겪을 것이라곤 생각도 못했다. 날이 껌껌하다. 비가 퍼붓다가 눈이 퍼붓다가 한다. 첫눈을 이런 데서 맞을 줄이야 하나도 반갑지 않다. 몸이 밀릴 정도로 바람이 쎄다. 가로등은 너무 뜨문뜨문 있고 빛도 희미하다. 하여간 에너지 절약 참 철저하게 하신다. 길바닥이 질은 것은 신경 끄기로 했다. 앞이 보이지 않아 자꾸 물웅덩이를 밟게 되지만 뭐 별 수 없지...이것만이면 별 탈 없는 거다. 어떻게든 아이폰을 켜서 GPS로 현재 위치를 파악하고, 메일함을 열어 호스트의 주소를 확인한 후 찾아내면 된다. 그런데 하필 이게 안 된다.

원래 액정이 물에 젖으면 터치가 안 먹는 경우가 왕왕 있다. 주머니 속에 넣어둔 핸드폰이 바지와 함께 쫄딱 젖어 있길래, 이번에도 그런 경우겠거니 하고 대충 물기를 닦아냈으나...요지부동이다. 완전히 물기를 제거하면 될까 싶어서 간신히 찾아낸 굴다리로 들어가서 바싹 마를 때까지 기다렸다. 하지만 아이폰은 여전히 말을 듣지 않았다. 전원버튼과 볼륨버튼, 홈버튼은 먹는데 그놈의 터치가 전혀 먹지 않는다. 껐다 키면 되겠지. 그래서 전원버튼을 꾹 눌렀더니 다음과 같은 메세지가 뜬다. '밀어서 전원 끄기' 그래 맞아, 밀어서 잠금 해제, 밀어서 전원 끄기였지. 헛웃음이 나왔다.

어떻게 해야하지. 처음으로 시도한 카우치서핑이었다. 여행자들끼리 서로 공짜로 재워주는 시스템인데...아무래도 가정집이다보니 호스텔보다 길 찾기는 힘들다. 일단 이 거리인 것은 확실했다. 거리이름까지는 기억이 난다. 제미나슈트라세. 번지수가 기억이 안 나서 문제지. 두 자리 수였던 것 같긴 한데...처음에는 집집마다 다 찾아가서 초인종 옆에 붙은 명패를 확인할 작정이었다. 삼십분만에 포기했다. 일단 날씨가 너무 안 좋았고, 집이 너무 많기도 했다. 아파트만 몇 개인지. 쫄딱 젖은 채 굴다리로 돌아왔다. 시내로 들어가서 와이파이가 되는 곳을 찾아볼까. 아이패드로 와이파이를 잡아 메일함을 열어보는 것이다. 커피숍 하나 정도는 열려있지 않을까 싶었지만...시간은 오후 다섯 시, 여기는 코트부스, 조용하고 작은 마을이다. 과연 시내에 간다고 쉽게 찾을 수는 있을련지. 그래도 시도는 해봐야 하니까 굴다리를 나섰는데, 바로 굴다리로 돌아왔다. 도저히 나갈 수 있는 날씨가 아니었다. 다음은 노숙...왜 주택과 주택 사이에 굴다리가 있는 지는 모르겠지만, 이 날씨에 바닥이 젖지 않은 거 보면 안전할 거 같다. 시골마을이니 범죄의 위험도 덜할 것이고...하지만 지척에 호스트의 집을 두고 노숙을 한다니 울화가 치밀었다. 분명 방법이 있을 텐데....

순간 드는 생각. 잡스 형님께서 이 상황에 대비 안 했을 리가 없어! 분명 터치를 하지 않고 핸드폰을 리부트 시킬 방법이 있을 것이다. 문득 대학교 1학년 때 들고다녔던 모토롤라 폰이 생각났다. 벽에다 던지면 재부팅이 되곤 했는데...그래도 아이폰을 상대로 그런 실험을 할 순 없고. 어쨌든 방법이 있을 것이다. 현재 작동하는 건 세 가지, 홈버튼, 볼륨버튼, 전원버튼...각 버튼들끼리 조합하여 이것저것 눌러봤다. 그리고 홈버튼과 전원버튼을 동시에 꾹 누른 순간, 핸드폰이 마침내 꺼졌다! 그리고 다시 전원버튼을 꾹 눌러 아이폰을 켰다. 제발 되라고 마음 속으로 몇 번이나 빌었는지 모른다. 화면에 메세지가 떴다. 밀어서 잠금 해제. 엄지손가락으로 밀었더니 잠금화면이 내 손가락의 궤적을 따라 쓱 사라졌다! 잡스 형 사랑해 좋은 곳에서 행복해야해 ㅜㅜ 우열곡절 끝에 발견한 호스트의 집은 정말 지척에 있었다. 굴다리 옆의 옆 건물이었다.

호스트의 이름은 시우마...이름을 보고 눈치챘어야 했는데! 독일인이 아닌 브라질 사람이다. 인근 대학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는 화학박사였다. 그녀는 홀랑 젖은 내 꼴을 보더니, 왠지 근처에서 헤매고 있을 것 같았다며 웃으면서 말했다. 그리고는 따뜻한 커피와 빵을 주었다. 그녀는 아시아인을 호스트 하는 것은 처음이라고 하면서, 한국에 대해 말해달라고 했다. 내가 말했다. 일단...한국인이라고 다 개를 먹는 건 아니에요. 시우마가 웃었다. 나는 계속 말했다. 생각나는 대로 말했기 때문에 별 개연성은 없다. 늦게까지 일하고, 아마 세계에서 가장 아파트에 사는 사람 비율이 높은 나라일 것이고, 화장실 사용하는데 돈 받는 건 생각도 할 수 없고, 대중교통이 무척 잘 되어 있고, 수도 서울은 옛것을 도저히 가만히 냅두지 않는 도시고(시우마가 말했다. 와, 정말 자본주의적이네요.) , 면요리가 발달되어 있고,...청년실업이 심각한 문제라고 하니, 그녀도 독일 청년들도 같은 문제로 고생하고 있다고 했다. 난 독일인들은 고등학교 때 밤 10시까지 공부하고 대학 4년 내내 빡빡한 일정에 시달리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어느정도 정리가 된 이후 그녀는 오늘 밤 파티가 있는데 따라나가겠냐고 물었다. 난 그러겠노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한 시간 전만 해도 노숙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지금 파티에 간다는 게 웃긴다고 말했다. 재킷을 챙기며 그녀가 말했다. 내일이 일요일이라 원래는 교회를 가야 하지만...한 동안 안 갔으니까 오늘 열심히 놀고 내일 한 번 더 빠지는 정도야 괜찬겠죠? 종교가 없는 나는 부담 없이 답했다. 그렇겠죠. 시우마가 다시 물었다. 한국에는 어떤 종교를 믿나요? 내가 대답했다. 최근에 통계를 봤는데, 종교 없는 사람이 제일 많고, 그 다음이 기독교, 그 다음이 불교라던데요. 그녀가 물었다. 유교는 안 믿어요? 순간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내 무슨 말인지 깨닫고 대답했다. 아아, 그건 믿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고...생활양식과 규범에 가깝죠. 우린 종교라고 생각 안 해요. 시우마가 물었다. 국교는 없나봐요? 뭐....하나 있죠. 자본주의.

파티는 다른 브라질 유학생의 집에서 열린단다. 시우마를 따라 도착한 곳에는 오래됐다는 말도 붙이기 민망한 다세대 주택이 한 채 있었다. 프라하 성도 오래된 건물이고, 두브로브니크의 알록달록한 집들도 오래된 집이니까...시우마가 집을 보면서 말했다. 처음에는 버려진 건물인줄 알았어요. 나중에 알았는데 모든 층에 사람이 살더라구요. 그렇게 말하고 시우마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곧 꼭대기층 창문에서 그림자가 불쑥 튀어나오더니 우리 쪽으로 열쇠를 던졌다. 이 모든 과정을 어처구니 없는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는 내 심정을 시우마가 읽었나보다. 안에서 열 수 없거든요. 동독 시절에 지은 집이라니까요.

안에는 집주인 필리페가 화장실에서 제 머리를 깎고 있었고, 그걸 훌리우라는 다른 친구가 도와주고 있었다. 화장실에 몇 시간째 박혀서 제 머리를 깎았는데, 손을 대면 댈 수록 이상해져서 결국 다 밀어야겠단다. 필리페가 한참 깎던 와중에 훌리우가 도착해서 도와주려 했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한 사람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둘이 씨름하는 사이, 나는 시우마와 같이 음식을 준비했다...라고 적었지만 실상 내가 한 거라곤 시우마가 시키는 대로 감자를 손질하고 양파를 썰고...밑작업 뿐이었다. 요리를 하고 있으니 다른 사람들이 속속 도착했다. 필리페의 룸메이트라는 태국사람,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콜롬비아인과 그의 친구인 장발의 미국인...그리고 마침내 머리를 다 밀어버린 필리페가 훌리우와 함께 화장실에서 돌아왔다. 콜롬비아 친구만 빼고 다들 코트부스의 BTU에서 이학 혹은 공학을 전공하고 있었고...아무도 독일어를 할 줄 몰랐다.

요리는 브라질 전통요리라고 한다. 닭고기와 각종 야채를 익혀 보울에 넣은 후, 그 위에 삶은 감자 다진 것과 모짜렐라 치즈를 올린 후 오븐에 구워 만드는 것으로, 집에 오븐만 있다면 쉽게 만들 수 있는 요리다. 먹으면서 시우마에게 물어보았다. 이 요리 이름이 뭐라고요? 그녀가 뭐라 대답을 하긴 했는데......세 명의 브라질인을 제외하곤 식탁에서 그 요리의 이름을 알게 된 사람은 결국 아무도 없었다. 이렇게 밥을 먹고 술을 나누고 파티는 끝인 줄 알았는데...갑자기 미국인이 내게 물었다. 오늘 밤 파티 가요? 내가 되물었다. 이게 파티 아니었어요? 그가 말했다. 이것도 파티인데...저기 클럽에 다른 파티가 더 있죠. 나는 손님이니까 호스트가 가면 가는 거고 말면 마는 것이라고 대답했다만, 솔직히 쉬고 싶었다. 그러나 브라질 사람 시우마가 거절할 리가 없었다. 그녀는 파티 소식에 반색했다. 당연히 가야죠!

이 황폐한 거리가 이미 충분히 도시 외곽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우리는 술병을 들고 정말 칼바람을 헤치며 불빛 하나 없는 거리를 걸었다. 정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쯤에, 건물이 하나 보였다. 내부는 클럽이었다. 코트부스의 밤문화의 중심...이라고 하기에는 코트부스만큼이나 코딱지만한 곳이었다. 초등학교 교실 세네개 쯤 붙여놓은 것 같은 넓이였다. 음악은 주로 알앤비...여기까지 와서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있을 순 없으니 나는 브라질 친구들과 춤을 췄고, 훌리우는 내게 허리를 제대로 돌리는 법을 알려주려 했으나 내 골반이 전혀 따라가지 못했다. 내가 5살 더 어린데 ㅜㅜ 미국인과 콜롬비아인은 헌팅을 시도하는 듯 하였으나...다 실패한 거 같고.

여튼 시간을 때우고 있는데 어느 순간부터 시우마가 보이지 않았다. 시우마를 찾아 클럽 곳곳을 뒤졌으나 그녀는 보이지 않았고, 훌리우와 필리페가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았다. 다들 화장실 앞에 쪼르르 모여 계속 전화를 걸면서 전전긍긍하고 있는데...마침내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 몸상태가 안 좋아 집에 갔다는 것이다. 다들 안심하며 웃었지만 나는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그럼 나는 어떻게 돌아가란 말인가...훌리우가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걱정마요, 우리만 믿어요.

우리만 믿으라기엔 사람들은 하나둘 먼저 갔고, 나랑 훌리우만 끝까지 남아서...결국 둘이 돌아갔다. 훌리우가 말했다. 아마 브라질이었으면 자기와 필리페와 시우마가 친구가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브라질은 영토도 무척 넓은 나라고, 또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나라이니까. 띄워주는 건지 뭔지, 내가 자신이 만난 한국인 중 유일하게 좋은 인상을 받은 사람이라는 이야기도 했다. LG에서 일하는 사람을 몇몇 알았는데, 그곳의 한국인은 딱딱하고 도저히 속내를 알 수 없는 인간들이란다.

훌리우는 약속을 확실하게 지켰다. 그는 시우마의 방 초인종을 딩동딩동딩동딩동 신나게 눌러댔고, 반 죽은 듯한 안색의 시우마가 문을 열어주었다. 그리곤 침대로 기어들어가더니 바로 곯아떨어졌다. 다음날 그녀가 말한 진상은 다음과 같다. 잘 추고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몸이 확 안 좋아지더란다. 잠깐 쉬어야겠다 싶어서 화장실에 갔는데....그 다음부터 토를 하고....주위의 여자들이 놀라서 부축을 해주고....택시를 부르고....어쨌든 거의 의식이 없었나보다. 필리페와 통화를 한 것도 기억 못 하고 있었다.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내 입장에선 화날 건 없었고, 그냥 좀 당황스럽고 신기한 경험이었다. 시우마는 사과의 의미로 점심을 만들어 나와 브라질 친구들에게 대접했다. 또 닭요리였다.

저녁에는 필리페, 시우마와 같이 시내관광을 나갔다. 구시가지까지 가는 길은 동독 시절에 지은 아파트가 쭉 늘어서 있었다. 거리 이름이 무려 칼 마르크스 슈트라세였다. 시우마가 단평을 남겼다. 동독 건물 답죠. 아파트 모두 개성 없고 칙칙하잖아요. 나도 그런가보다...하고 쓱 둘러봤는데, 한국에 있는 낡은 복도식 아파트들하고 별 차이가 없었다. 사실 정말 비슷하였다. 자꾸 보다보니 은마 아파트가 떠올랐다. 적어도 체제의 차이가 아파트 외장을 무미건조하게 만드는 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와중에도 발코니에 크리스마스 장식을 해둔 집을 보면서, 어디서나 예쁘게 꾸미고 사는 집은 그러고 사는구나 생각했다. 추운 날에도 온기가 느껴졌다.

구시가지라고 해봤자 마켓 정도 빼놓곤 별 게 없었기 때문에, 정말 금방 끝났다. 그래도 크리스마스 마켓은 재밌었다. 독일이 어딜 가든 크리스마스 마켓 하나는 기가 막히게 해놓는다. 코트부스 같은 작은 동네의 마켓도 관람차와 각종 놀이기구를 설치를 해놓고 요란을 떨었다. 전전날 갔던 드레스덴 마켓은 더 대단했고...내일 갈 베를린은 대체 어떨까 상상이 안 갔다. 나는 시우마에게 마켓에 영어 표지판이 없는 게 마음에 든다고 하였다. 시우마가 동의했다.

돌아가는 길에 필리페가 영어로 띄엄띄엄 말했다. 비록 별 거 없고 밤이 되면 심심하지만, 자기는 이 마을이 좋다고. 조용하고 살기 좋은 마을이라 하였다. 시우마도 동의했다. 편안하게 지낼 수 있는 곳이라며. 그리고 딱히 할 게 없어서 공부하기 좋은 마을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나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긴 했다. 나름 영화관도 있고, 베를린하고도 가깝고, 또 다음날 떠나는 길에 보니 상가도 생각보다 크고, 안전할 거 같긴 하고, 물가도 싼 듯 하고...하지만 이것만으로 살 수 없다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다. 여행 다니면서 조용한 도시, 잠들지 않는 도시, 멋진 도시, 싼 도시, 이 중 여러가지 조건을 만족시키는 도시...다 보았지만 그 어느 도시에서도 살고 싶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나는 다음날 오전에 코트부스를 떠났다. 베를린으로 간다.


2014/12/28

Posted by 시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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