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콘에 목이 메이네 2010. 5. 14. 02:11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시를 쓸 수 있냐고 물었지만 사실 시는 계속 써지고 있다. 특히 서정시가 그의 타겟이었다. 그는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라고 했지만, 야만인들은 끊이지 않고 나타난다. 야만적인 시를 쓰는 김용택 시인이, 영화 속에서는 김용탁 시인으로 등장하여 야만적 시를 쓰는 강의를 한다. 심지어 아우슈비츠 안에서도 서정시를 쓴 사람도 있다는 말이 있다.

  이대로 계속 쓰면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안의 유태인들과 집시, 동성애자와 장애인들 중 시 쓴 사람들을 야만인으로 몰아가는 꼴이니 정확히 해야겠다. 아도르노는 사람들이 같이 아파하고 괴로워하고, 인류의 잔인함에 경악을 했을 것이라고(혹은 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거리상, 시간상, 양심상의 이유로 모두 그러기란 힘든 법이다. 그리고 서정시의 역할에 대한 반증이 되기도 하였다. 사람은 강가의 다리에서 검은 물 밑으로 떨어지고 싶을 만큼 괴로울 때는 뭐라도 해야한다.

  사실 아우슈비츠는 잘 알려지고 매우 잔악하고, 또 그만큼 잘 팔린 사건이라서 '인류의 본성을 보여주는 사례' 리스트에서 제일 윗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영화속 주인공 '미자'가 아름다운 시상을 찾으려 돌아다니듯이 주위를 잘 둘러보면 매일매일 매 순간 서정시를 써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하게 만든다. 신문만 읽어도 괴로운 세상이다. 요즘은 신문에 적혀 있는 것이 없더라도, 적혀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괴로운 날들이다. 작년에도 있었다. 노무현이 죽은지 1년이 다 되가는데,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과정을 복기해보면 이 사회가 얼마나 폭력적이고, 우리의 침묵마저 죄악으로 만든다는 것에 아연해진다. 세상은 그에게 고결함을 유지하는 방법이라곤 떨어져 죽는 것 밖에 남겨놓지 않았다. 세태를 비꼬고 조소를 날리는 것마저 숙연해져서 하지 못 하겠다. 이런 심각한 세상이라니!

  이런 사건, 찾아 보면 많다. 다만 노무현의 죽음이 대표성을 띌 뿐이다. 영화 시작할 때 나오는 팔레스타인의 시체들도 은막 안의 브라운관 안에서 보여져 지구 반의 반 바퀴 돈 곳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감흥이 떨어질 뿐이지 충분히 비극이 아닌가. 그리고 영화에 나오는 성폭력 사건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한숨을 내쉬게 했던 진짜 사건 여러가지(심지어 하나가 아니라 여러가지!)와 무척 닮았다. 이 모든 것들은 멀리 있거나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감흥이 없다. 그러나 가까이서 일어나 바라보게 되는 순간 그 처참함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것이 바로 주인공 양미자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도저히 멀쩡히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처참한 현실 뿐이다.

  미자의 삶이 원래도 겉보기에 그리 행복한 것은 아니다. 몸은 고단하고, 딸은 멀리 떨어져있고, 외손자는 사춘기다. 그래도 미자는 이름 따라(美子) 늘 예쁘게 꾸며입고, 사물을 자주 쳐다보며 즐겁게 관찰하고, 그에 따라 하는 말도 조금 붕 떠있는 것만 같다. 유독 꽃 이야기가 많고, 서너 살 때의 추억을 수사와 감정을 곁들여 풀어놓는다. 그리고 국민학교 시절 선생님이 '너는 커서 시인이 되겠구나'라는 말을 해준 것을 기억하고 시인을 꿈꿀 줄도 안다. 강의를 나온 김용탁 시인은 시상을 찾아보고, 마음의 시를 꺼내보라고 한다. 그리고 시상을 찾기 시작한 그 시점부터 사건은 쏟아진다. 외손자는 끔찍한 성폭행 사건의 가해자, 그리고 가해자 부모들끼리 모인 자리에서의 타협 혹은 야합, 갑자기 성욕을 드러내는 돌봐주는 할아버지, 그리고 자신의 알츠하이머 병. 알츠하이머 병은 그녀가 그 고운 어휘마저 하나 둘 갉아먹어 잃게 할 것이다. 희망의 가능성을 아예 꺾어버렸다. 거대한 비극은 사람들이 기억이라도 하지, 도대체 그녀의 비극은 누가 기억해줄 것인가? 영화 속 그 누구를 살펴보아도 그렇게 해줄 사람이 없다. 영화에서 그녀가 시상을 찾아 꽃밭을 헤매는 장면은 현실도피로 보일 뿐이다.

  그러나 그 순간 그녀가 마침내 시상을 찾아낸 것 아닌가? 그녀는 합의금을 낸 후에, (아마도) 손자를 자기 손으로 신고하고, 아름다움에 눈이 부시는 대신 시가 써지지 않아 엉엉 울고 나서야 고운 시를 한 편 쓸 수 있었다. 이 순간 시는 그녀의 비극과, 피해자의 아픔까지 느낄 만큼 순수했던 그녀의 감성을 전달하는 유일한 통로가 된다. 다시 아도르노에게 물어보자. 서정시인은 야만인인가? "시 따위는 죽어도 싸다."라고 영화 속에 나오는 김용탁의 후배 시인이 말술을 퍼마시고 말한다. 시가 세상에 책임을 져야한다면 이 비참한 세상에서 시는 직무유기로 죽어도 싸다. 그러나 시가 세상을 아주 바꿀 수 없듯이 시에게는 그럴 힘도 책임도 없다. 시를 쓰고 악몽을 꾸는 것보다는, 악몽을 시로 표현하는 일이 더 잦을 것이다. 미자에게 아름다운 서정시는 삶의 원동력이 아닌 그 결과고, 그녀에게는 어느 순간 필요한 고통의 표현 방식이다.

  시는 앞으로도 계속 몸을 가누지 못할 만큼 약해질 것이다. 시는 판매량만 보면 타인의 삶은 커녕 시인의 삶도 구원 못할 몹쓸 것이다. 그러나 도요새와 같은 최후를 맞이하지는 않을테다. 증강현실이 나와도, 아이패드가 나와도, 인쇄매체가 사라져도, 인체의 모든 감각기관을 활용하는 매체가 나와도, 국어책의 시인들이 차츰 죽어가거나, 혹은 그들이 미치거나 타락해도, 소설가가 영화감독이 되어도, 좋은 시가 영영 나오지 않게 되더라도. 세상은 비극 투성이고, 그 비극을 겪는 사람 중 그 비극에 연루된 모든 사람들을 가여워하는 착한 마음씨의 소유자 중 누군가는 고요한 풍경을 닮은 아름다운 시를 쓰게 될 것이다.



Posted by 시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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