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책을 거의 잡지 않았다. 사실 못했다. 오랫동안 잡고 있을 수가 없었다. 예전 같았으면 새벽을 새더라도, 별것 아닌 책이라도 끝까지 읽었지만 요즘은 책을 잡으면 손이 저려 오는 것이다. 뭐 이런 상황이 다있나. 대신 안구건조증에 많은 공헌을 하는 영상물을 많이 보았다.
영화나 애니메이션 같은 영상물이 결코 책에 비해 떨어지는 매체가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실존의 문제라면 제이슨 본 시리즈를 보면서도 충분히 고민할수 있는 것 아닌가. 문화인이라면 선선한 가을 바람 맞으며(지금 맞으면 딱 얼어죽기 좋으며) 책을 읽어야지, 라는 마음가짐은 안타깝게도 시간만 나면 친구를 끌고가 플스방에서 위닝을 하고 축구를 보며 그날의 경기분석을 하는 내게 별로 없었다. 왜 근데 위닝을 자꾸 지는지는 잘 모른다.
그러나 난 내가 위닝 달인이 될수 없는 이유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축구 잡지를 구매하면서 스리슬쩍 어울리지도 않는 문화인 행세를 하기 위해 요즘 잘 건들지도 않는 책을 껴놓는 것이 나의 실수였다. 젠장, 위닝만 할걸.
그렇게 간만에 잡은 책이 연을 쫓는 아이였다. 사실 아스날의 골키퍼 옌스 레만이 제일 좋아하는 책이기도 하다. 상당히 품격있는 소설을 좋아하드라. 제목과 작가 이름, 사실 작가를 알고 있는 것은 전혀 아니고, 왠지 모르는 작가인데다가 미국 내 소수 민족 같아 보이니 오호, 이거 왠지 폼 나는걸, 이런 식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간만에 500쪽이 넘는 책을 단숨에 읽어내릴수 있었다. 놀라웠다.
아프가니스탄 연이란게 없는 것은 아니다. 거기는 사시사철 야자수와 함께하는 여름일텐데 무슨놈의 연이냐고 할진 모르겠다만, 책을 보면 카불에도 겨울이 있고, 눈이 내리긴 하나보다. 잡설로 이런 면이 이 소설의 강점중 하나인데, 주인공의 눈에 비친 풍경 묘사가 간결하면서도 선명하다. 묘사에 쓸데없이 많은 시간 투자 안해도 이렇게 아름답다. 뭐 어쨌거나, 그 동네도 연싸움을 한다. 연을 날려서 상대방 연줄을 끊어먹는 그 놀이 말이다. 사실 소설의 처음 시점인 70년대 가난한 카불의 연놀이는 부모님 세대가 시골에서 했던 추옥의 그 놀이라고 보기보다는 부자 아이들이나 하는 것이다. 그러면 연줄을 끊으면? 그 다음에는 하인으로 있는 가난한 아이가 허벌나게 뛰어서 연을 주워와야 한다.
주인공은 허벌나게 뛰지 않는 '아미르'이며 그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전개되고, 허벌나게 뛰어서 연을 주워와야 하는 '연을 쫓는 아이'는 '하산'이다. 그의 아버지 '알리'는 아미르의 카리스마 있는 아버지 '바바'와 함께 자라며 그 가문에 봉사해왔다.
하산은 차별 받는 소수민족인데다가 따지고 보면 바바 집의 종복이고 아미르의 종이지만, 아미르에게 말 그대로 맹목적인 우정을 퍼준다. 아미르? 아미르는 늘 아버지가 일개 종복이고, 스스로는 친구라고 생각도 안 해본 하산과 자신에게 비슷한 수준의 선물을 해주는 것도 원통할 따름이고 하산을 자주 이용해 먹는다. 하산이 그를 위해 연을 주으러 가다가 동네 깡패 아세프에게 강간당하는 것을 보고도 도와주지도 않고 오히려 그 후 하산을 멀리하는 정말 애같은 행동의 절정을 보여준다.
결국 이 사실을 안 하산의 아버지 알리는 분노하고, 결국 알리는 하산을 데리고 자신들, 소수민족이 사는 곳으로 떠난다. 그리고 곧 가족사에 역사가 끼어드는 것이다.
이건 미국 소설이다. 하지만 아프가니스탄 사람이 쓴 영어 소설이다. 사실 아프가니스탄만큼 근 30년간 굴곡 많은 역사를 미국은 보낸 적이 없다. 오직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의 대립, 적과 나, 혹은 사회 대 개인이 있었다면 역사라는 깊이를 가진 칼레드 호세이니의 이 책은 '세상이 철저히 뒤틀어버린 가족사'를 보여준다.
알리와 하산은 동네 꼬맹이들에게도 개취급 받는(알리는 성인인데도!) 소수민족이고, 아직 왕정은 있으며, 왕정이 친척의 반란으로 무너지고 공화정이 들어온다더니만 소련군이 들어오고, 바바와 아미르는 미국으로 도망가고, 부유한 상인 집안이었던 그들은 밑바닥 생활을 하고, 또 많은 아프가니스탄인들이 벼룩 시장에서 그렇게 보내는데 알고보니 그 아프가니스탄인들은 그나마 돈이 있어서 탈출한 사람들이고, 아미르가 볼 수 없었던 카불 밖의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은 여전히 가난하고, 그와중에 탈레반이 생기고, 탈레반이 북부동맹을 몰아내서 잠시 자유가 찾아오나 싶었더니, 탈레반은 연날리기까지 금지하고 소수민족을 학살하고, 갑자기 쌍둥이 빌딩에 비행기 두 대가 날아오고 미국내 아프가니스탄 인들은 차별받고, 뭐 소설이 그 전에 끝나긴 했지만 미국은 군대를 보내 아프가니스탄 석유를 차지할 야심찬 계획까지 세운다.
그럼에도 이 책의 말투는 분노가 아니다. 세상일에 대해서, 전쟁을 읽으신 잘나 것들에게 보내는 조소도 아니다. 세상일이 이렇게 개인의 힘으로 조절할수 없게 돌아갈지라도, 마지막에 속죄의 여정을 떠나는 아미르를 통해서 속죄와 용서, 그리고 소박한 용기를 통해서 아셰프로 대표되는 세상의 부조리도 헤쳐나갈 수 있고 이 세상을 조금이나마 아름답게 가꿀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작가는 세계가 아프가니스탄을, 그 민중들을 그렇게 대해주길 바란다.
"너를 위해서라면 천번이라도 그렇게 할게." 하산이 아미르를 친구라고 여기며 해주었던 말이고 아미르가 하산을 친구라고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게 하지 않았던 말이다. 마지막 아미르의 입에서 결국 나오는 이 말은 속죄를 넘어 미래를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