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사실 인간관계가 우리에게 상처를 얼마나 많이 주던가? 가족, 친구, 사랑, 학교, 직장 다 포함해서 말이다. 특히 가족과 사랑이 문제다. 아마 초등학교 교실에서 아랍어로 '가족'이라는 단어를 말해도 곧잘 알아듣고 엉엉 우는 아이들이 다섯 명은 될 것이다. 한국어도 영어도 아닌 아랍어인데! 이렇게 생각해보면 인간관계를 끊고 살면 조금 외롭기는 해도 상처받을 일은 없겠구나 싶다. 이것을 중학생이 실천하면 중2병 환자가 되는데, 조지 클루니가 실천하면 쿨한 남자가 된다. 영화속에서 그는 쿨한 해고 전문가 라이언 빙햄이고, 세상에서 제일 편한 장소는 비행기 안이다.

  멋진 아메리칸 리스트를 만든다면 조지 클루니는 분명 열 손가락 안에 들 것이지만, 라이언의 쿨함은 아메리칸 드림의 덕목이 아니다. 집에 돌아가면 나를 맞아줄 사랑스런 가족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라이언은 간접적으로 가정 붕괴에 일조하고 있다. 돈 제대로 못 벌어오는 남편이 어디 제대로 된 남편 취급 받던가? 라이언은 그런 남편들을 만들고 있다. 마침 미국 경제도 다리 한 짝 뭉게진 밥상처럼 휘청거리고 있겠다, 업계는 최고의 호황이다. 라이언이 직접 사람을 해고하는 것은 아니지만, 세상의 용기 없는 사장님들 덕에 그는 매번 직접 해고하는 것 마냥 행세해야 한다. 그렇다. 라이언이 하는 일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끊어놓는 일이다. 그리고 그는 정말 최선을 다해 일을 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품위있고 우아한 방식으로. 그래서 신참 나탈리가 내놓은 인터넷 해고 네트워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문자메세지로 이별통보 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냐고.

  그래서 이 해고전문가는 바로 그 신참을 끌고 자기방식대로 구름 속을 떠돈다. 그는 똑똑한 신참에게 우아한 해고의 정석을 보여준다. 어떤 면에서 우아하냐면, 사람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집어던지면서도 꿈과 희망을 한 가닥 정도는 남겨둔다는 소리다. 그러나 여전히 절망의 구렁텅이로 밀어넣는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는데서 이 일의 성격이 드러난다. 이 남자는 종종 강연을 한다. 나름 유명해져 별명도 붙었다. '빈 가방'. 그는 짐이고 인연이고 끌고 가지 말자고 주장한다. 아마 이 살벌한 직업을 통해 얻은 나름의 지혜일 것이다. 이 남자는 집에 머무는 것이 불편할 정도로 설 곳이 없다.
 
  아무리 우아한 방식으로 해고를 통보한다 하더라도 라이언 빙햄이 설 자리가 없는 것은 마치 인과율처럼 보인다. 사람들이 설 자리가 없게 만드는 만큼 지상에서 자신의 설 자리가 없어지는 원리다. 그러나 여동생의 결혼식날, 이 남자가 잔뜩 겁먹은 신랑에게 무슨 말을 했던가? 그는 슬픈 추억 속에서는 늘 혼자지만, 즐거운 추억 속에는 대개 두 명이 있지 않냐고. 그는 가족도 이웃도 없이 늘 혼자인 자신의 심장을 푹푹 찌르는 듯한 말로 신랑을 설득하는데 성공한다. 그 스스로도 자신의 신세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신세를 알고 있다고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잘못은 고치면 된다지만, 이건 라이언의 잘못이 아니다. 사실 해고를 결정한 것은 대차대조표를 읽은 사장이다. 다만 해고통보를 그가 할 뿐이지. 즉 아무리 딱한 사람이 있어도 그는 도울 수 없다. 그런데 사랑에 빠져도(심지어 조지 클루니인데도!) 보답받지 못할 것이고, 그는 여전히 밤낮 가리지 않고 사람을 자르기 위해 하늘을 떠돌아야만 한다. 이쯤 되면 인과율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하청업체의 비극에 가깝다. 결국 라이언의 슬픔은 그가 만든 것이 아니다. 라이언의 끝없는 여행은 경제위기의 수렁에 빠진 세계가 수많은 가정을 박살냈듯이, 역시 같은 세계가 그에게 안겨주는 슬픔이다.
Posted by 시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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