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의 주인공들은 결코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변신의 그레고리 잠자는 왜 자신이 벌레가 되었는지 따지지 않고, 성의 K는 자신이 왜 성에 들어갈 수 없는지 캐묻지 않으며, 심판의 요제프 K도 자신이 왜 죽어야 하는지 모르는 건 마찬가지다. 조악한 비유지만 자신의 병명을 모르는 환자와도 같다. 대신 운명처럼 찾아온 재앙에 맞선다. 목적지로 진입하려 하고, 변호사를 고용해 재판을 이기려 든다. 그리곤 으레 패배한다. 장렬한 패배 같지만...읽다보면 그렇지도 않다. 요제프 K가 개같이 죽는다고 사형장에서 신세를 한탄할 때까지도 그의 죄목을 알 수 없다. 사실 그 자신도 죄목을 알고 있지 않은 것 같다. 무엇을 위해 치열하게 싸우는 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짧고 단정적인 카프카의 문장과는 대조적이다. 모든 건 어둠 속에 있다. 카프카를 길러낸 프라하의 밤처럼.

프라하를 잠깐만 둘러보아도 화려한 이력을 지닌 곳이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프라하는 여러 나라의 주요도시였다. 보헤미아 왕국의 수도였고 신성로마제국의 수도였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요지였다.하지만 영광도 한 때, 나치독일의 점령 이후 프라하는 수십년 간 서방세계에서 접근할 수 없는 중부유럽의 진주였다. 사실 같은 시기 동방에 살았다고 해도 쉬이 접근할 수 있었을것 같지는 않다만. 나치가 물러난 이후에는 공산정권이 들어섰다. 그들은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바라며 시위를 일으킨 시민들을 남의 나라 군대의 힘을 빌려 짖밟았다. 그렇지만 역사는 그렇게 멈추지 않는다.

1989년 벨벳 혁명에 이어 공산주의 독재가 끝을 맺고, 이어서 1993년에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나뉜다. 대략 그때쯤부터 프라하가 여행지로도 유명해졌다고 한다. 처음에는 아는 사람만 가는 도시였다고한다. 하지만 압도적인 위용을 지닌 프라하 성, 내려다보면 온통 빨간 지붕, 백조가 날아다니는 강변, 그 강 위에서 수백년을 버티고 있는 카를 교, 전설인지 역사인지 구분이 희미한 신비로운...이런 도시를 새 주인 자본주의가 감히 가만히 둘 리가 없다. <프라하의 연인> 덕인지 뭔지, 프라하는 이제 한국에서도 아주 유명한 여행지가 되었다.

이런 아름다운 도시에서도 카프카는 인간의 어두움을 읽었는데, 당시의 시대상에 기인한 바가 크다. 때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프라하는 이때 이미 다문화 도시였지만, 이걸 뉴욕의 다문화 같은 걸로 생각하면 안 된다. 이때는 똘똘 뭉쳐살던 민족들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흐르던 때였다.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카프카가 느끼는 압박감은 더 했을 것이다. 전 유럽에 반유대주의의 기운이 꿈틀 싹을 틔우던 때였다. 그것만이면 다행이다. 사실 카프카의 가장 큰 문제는 가족이었다. 그 중에서도 억압적인 아버지. 자수성가한 강인한 사내였던 아버지 카프카는 아들 프란츠 카프카 대에서 상류사회로 진입하기를 바랐지만, 예민한 영혼의 소유자 프란츠는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아들 카프카에게 아버지 카프카는 극복할 수 없는 트라우마 그 자체였고, 기쁨과 사랑 속에서도 불안과 공포를 읽게 해준 원동력이었다. 분명 아버지 카프카는 아들 카프카를 한심하게 여겼을 것이다. 인간운명의 부조리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기껏 사다리를 만들어 줬더니 걷어차버린 한심한 아들놈. 카프카의 수치. 분명 지금도 누군가는 카프카의 아버지처럼 철학이니 문학이니 뜬구름잡는 소리 하지 마라...하겠지만, 결과적으로 카프카의 통찰이 옳지 않았는가? 카프카가 폐병으로 죽은지 20여년 후, 그의 두 여동생은 나치의 유태인 강제수용소에서 죽었다. 카프카도 그때까지 살아있었더라면 비슷한 최후를 맞았을 것이다. 수용소에서 죽은 이들은 요제프K처럼 영문을 모른 채 부조리하게 죽었고, 죽인 이들은 그레고르의 가족들처럼 퇴근 후 가족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할 것이다. 생각만 할 것이다.

프라하에서 카프카의 흔적을 볼 수 있는 곳은 크게 드 곳이 있다. 먼저 카프카가 살았던 유태인 지구, 그리고 강변에 위치한 카프카 박물관. 그 외에도 황금소로 쪽에 카프카의 여동생이 살았다는 집이 있다고 하고, 유태인 공동묘지에 카프카 가족묘도 있다고 들었지만 들리지는 않았다. 유태인 지구에 가면 카프카의 이름을 딴 카페나 건물이 따로 있긴 하지만, 잘츠부르크의 모차르트 사랑만큼 지독하진 않다. 카프카의 단골집이 멀쩡히 영업중인 마당에 나서대는 게 부끄러운 일이긴 할 것이다. 단골집의 이름은 카페 루브르, 계단이 대리석으로 되어있는 삼층 건물이다. ...당대 프라하에 살던 지성들이 모여 철학을 논하던 자리란다. 오스트리아의 경험에 빗대어, 이곳도 카프카 초상으로 도배가 되어있을 줄 알았는데, 막상 가보니 카프카의 이름은 벽에 붙은 찌라시에 아주 작게 한 줄 정도 적혀있다. 하긴, 아인슈타인도 단골이었고, 당대의 기라성 같은 이들에게 모두 사랑받은 곳인데...난 누구에게 사랑받았다고 자랑하고 다니는 건 촌스러운 일이다. 모두의 연인은 그럴 필요가 없다. 그게 사랑스러운 이유이기도 할 것이고.

카프카는 소설에서 구체적인 지명을 제시하지 않는다. 아무래도 카프카가 거의 프라하를 벗어난 적이 없는데다가 스스로 내 인생은 프라하의 몇몇 동그라미 안에 있다고 말하기도 했으니, 다들 그 배경이 프라하일 것이라고 어림한다. 카프카의 친구인 작가 빌리 하스는 프라하에서 태어나고 자라지 않은 자는 카프카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내 상상의 범주를 넘어서는 특수한 상황에 처해있던 곳이니, 맞는 말일 수도. 하지만 지금도 그럴까? 100여년이 지난 지금 프라하의 여전히 국제적인 도시지만 그 의미는 달라졌다. 민족끼리 경계하고, 구체제와 신체제가 치열하게 맞서던 격동의 세기는 지나갔다. 지금은 전세계 언어로 가이드가 존재하는 관광도시이다. 꼴레뉴를 먹으러 가면 이건 '족발'이고, '맥주' 마실 생각이 있냐고 한국어로 물어보는 도시가 되었다. 만약 호스텔에 머문다면 각지에서 온 사람들과 친해질 수 있겠다. 그리고 그들 때문에 지붕의 붉은 칠을 결코 벗겨낼 수 없는 도시가 됐다. 물론 구시가지를 벗어나면 회색 고층빌딩이 있고 번화가가 있겠지만, 적어도 카프카의 프라하는 늙은 육신만 남아 있고 내면의 불안 따윈 떨친지 오래다. 만약 빌리 하스의 저 말이 실로 맞다면, 그렇다면 이제 카프카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아무도 없는 건가. 카프카 스스로 혹은 나치가 태워버린 그의 일부 작품처럼, <성>이니 <변신>이니하는 그의 작품의 의미 일부도 불에 타서 재가 된걸까 블타바강 물살에 쓸려나간 걸까.

말년의 카프카는 텔 아비브에 가서 유태인끼리 살고 싶어했다고 한다. 여행 가는 것도 꺼린 그가 가본적도 없는 곳에 가서 살겠다고 결심한 건 시오니스트였던 그의 마지막 연인 도라의 영향이 컸다구 한다. 카프카 본인은 시오니즘에 미온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하나 예민한 영혼의 선지자답게 유럽에 감도는 분위기가 이상함을 먼저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비슷한 인간들끼리 서로 돕고 살면 존재의 불안이 해소될 수도 있다고 믿었을 지도 모른다. 기실 그런 환경에서 살아본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그의 병이 악화되면서 결국 이뤄지지 못한다.

이런 게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닌가 싶다. 오늘날 이스라엘에는 프라하의 유대인 지구가 당대 받았던 압박과는 비교도 안 되는 압박을 받는 지역이 있으니, 바로 가자 지구다. 지구상에서 인간을 몰이사냥하듯 죽일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이다. 유태인 강제수용소하고도 다르다. 강제수용소가 죽음의 공장이라면, 여긴 죽음의 사냥터니까. 여기라면 좀 카프카의 프라하에 빗댈만 하지 않을까?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카프카를 읽고 잘 이해할지는 모르겠다. 존재의 불안을 느낄 감각조차 마비시킬 곳이니. 하지만 카프카라면 가자지구에서 산다는 게 어떤 것인지 금새 이해할 수 있을 거라 본다. 어떤 짙은 안개 속에서도 사물의 형태를 파악해내는 것이 그가 제일 잘 하는 일 아닌가.

유태인 지구에 가면 카프카의 동상이 있다. 머리도 팔도 없는 남자의 어깨 위에 카프카가 앉아서 어딘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다. 형태가 없는 사람 위에 앉아있는 건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가 만든 인물들이 대개 그러하니까. 하지만 카프카가 무언가 가리킨다는 게 이상했다. 그의 글은 벽돌로 만든 미로 아닌가. 가장 간단한 재료로 만든 미궁. 미궁은 길을 잃으라고 만드는 것 아닌가. 카프카는 스스로 만든 미궁에 갖힌 미아 아닌가. 아니다...생각해보면 분명히 가리키는 지점이 있다. 가는 길이 여러 개라고 출구가 없는 것은 아니니까, 좀 돌아가는 것일 뿐이니. 우리가 불안과 소외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는 지점이 어딘가 있긴 있을 것이다. 소심한 카프카가 행복을 찾아 베를린으로 떠났듯이. 프라하의 밤, 오래된 건물과 벽돌길로 이루어진 미로에서도 집에 가는 길은 반드시 있듯이.


2014/12/26

Posted by 시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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