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영국에 아마추어 수영 대회라는 게 생겼다. 왜 영국일까 묻는다면, 사실 당연한 일이다. 19세기라면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다는 영국 정도는 되어야 수영장을 짓고 관리하고, 또 취미로 수영을 즐기는 사람들이 모여 대회를 치를 수 있었을테니 말이다.

  아무튼 이때의 수영대회가 현대의 대회처럼 세부종목이 딱 나뉜 대회는 당연히 아니다. 애초에 영국땅에 정립된 영법이라고는 평영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어쩌면 평영이 유럽의 유일한 영법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크롤 영법이 20세기 초에야 겨우 완성이 됐으니. 물론 평영이 정립되었다고 해서, 우리가 수영장에서 배우는 평영과 똑같은 형태는 아닐 것이라고 추측한다. 막연한 상상은 아니고, 그렇게 짐작하는 단서가 있다. 19세기보다도 더 거슬러 올라가기는 하지만, 17세기 말에 프랑스의 학자인 떼베노가 저술한 <수영의 기술>이라는 책이 있다. 이 책에는 각종 영법을 삽화로 수록했는데, 일단 당시에는 수영복을 입지 않고 다 벗고 수영을 했다는 사실부터 알 수 있다. 여기서 페이지를 계속 넘기다보면 평영으로 추정되는 삽화가 하나 있다. 그림을 보면 킥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무릎을 구부려 등쪽으로 당기는 그 평영킥이 맞다. 하지만 그때까지 평영 손동작은 개발되지 않았는지, 그림 속 모델은 뒷짐을 진 채 킥으로만 수영을 하고 있다.

  그리고 1844년, 두 명의 아메리카 원주민이 세계의 중심 런던에 도착했다. 이들은 런던의 아마추어 수영대회에 참여하였고, 평영과는 전혀 다른 일종의 원시적인 크롤 영법으로 우승을 거머쥐어 영국의 동호인들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 이후에 일어난 일도 기록에 남아있는데, 식민지민과 유색인종에게 동정은 차고 넘치게 해줄망정, 그들에게 무릎을 꿇을 수는 없었던 영국인들이 토론을 벌였다는 것이다. 원주민 영법, 이대로 괜찮은가? 요컨대 물을 첨벙거리면서 전진하는 원주민 영법이 빠르기는 해도 점잖지는 않으니, 영국 신사들 생각으로는 저런 식으로 이기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이럴 때는 차라리 효율성과 유용성만을 판단의 잣대로 삼아 인간을 소외시켰다는 근대적 사고가 차라리 인간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영국인들이 효율성과 유용성의 깃발을 자신들 필요할 때는 높이 들고 흔들어댔다는 것을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영국인들의 평영 사랑은 계속되었다. 위키피디아에는 1873년까지 영국인들은 평영만 사용했다고 하는데,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이후 열린 대회에서 평영만 사용했다는 것인지, 아니면 그 어떤 영국인도 다른 영법을 배울 생각조차 안했다는 것인지. 굴욕적인 패배 이후에도 근 30년동안 평영만 주구장창 팠으니, 이쯤되면 평영에 대한 진정성을 인정해줄만 하지 않을까 싶다. 1875년에는 영국의 매튜 웹 대위가 평영으로 영국해협을 건너기에 이른다. 거리는 34킬로미터, 소요시간은 21시간 45분. 대단하다. 난 요즘 21시간 깨있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당시에는 크롤이 현대의 형태로 완성된 건 아니었지만 도입은 된 상태였는데도 불구하고 평영을 고른 것이었다.

  그런데 과연 평영이 최고의 방법이었을까? 물론 평영이 체력소모도 적고 전방을 주시하기 좋아 바다수영에 적합한 것도 맞다. 또 웹 대위가 군인이었던 것도 굳이 평영을 고른 요인일 수도 있다. 군인들은 아무래도 평영이 익숙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하여도 평영은 크롤보다 현저히 느리다. 장거리에서도 크롤이 낫지 않을까? 34킬로미터는 못 미치는 거리이지만, 역시 오픈워터 종목이자 10킬로 정도 되는 수영 마라톤에서도 일단 크롤로 간다. 자유형 경기에서 볼 수 있는 크롤과 폼이 다르긴 하지만, 분명 평영은 아니다. 하지만 10킬로와 34킬로의 간극은 여전하다.

  다른 사례를 찾아보자.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은 1980년 대한해협을 건널 떄 과연 무슨 영법을 사용하였을까? 일단 53킬로미터이니 영국해협보다도 길다. 시간은 13시간 16분이 걸렸고, 조오련이 자유형 선수였던 것을 감안하면 크롤이라고 심증은 가는데, 자료가 전혀 없다. 무슨 영법으로 건넜다는 기사 한 줄은 커녕, 수영 도중의 사진조차 없다. 하지만 다행히 조오련이 대한해협만 건넌 것은 아니었다. 조오련은 은퇴 이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여러번 장거리 수영에 도전했다. 독도를 33번 돌기도 했고, 소지섭 등 연예인들과 계영으로 대한해협을 건너기도 하였다. 이때 사진은 남아있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크롤이다.

  그런데 자료를 찾다보니 더 결정적인 사건이 있다. 1925년, 미국의 수영 선수 거트루드 에덜리가 대서양을 건너 프랑스로 왔다. 겨우 열아홉이었지만 그녀는 이미 열두살에 세계신기록을 세웠으며, 열여덟에 올림픽 챔피언이 된 수영계의 살아있는 전설이었고, 프랑스까지 온 까닭은 영국해협 횡단에 도전하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대단한 선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도전에는 회의적인 시각이 많았다. 첫째, 그녀가 여성이었고, 둘째, 그녀가 크롤을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일단 지금까지 영국해협을 횡단하는데 성공한 다섯 명이 전부 남자였고, 그들 모두 평영 사용자였다. 크롤이 빠르기는 하나 체력을 금방 갉아먹는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럼에도 거트루드는 망설이지 않고 본인의 주특기인 크롤을 선택한다. 아쉽게도 1925년 첫번째 도전에서는 실패하였다.

  하지만 이듬해, 코치를 교체한 그녀는 14시간 31분만에 해협을 건너는 데 성공했을 뿐 아니라, 신기록도 갈아치워버렸다. 고향 뉴욕으로 돌아간 그녀는 이백만 명의 환대를 받았다. 그녀가 여성인 건 약점이 아니라 이제 자랑거리가 되었다. 그리고 크롤 영법은 장거리에서도 최강임을 입증하였다. 크롤이 원시적인 형태나마 유럽에 등장한지 82년만의 일이었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렸을까? 직관적으로 생각했을 때 평영이 생존에 유리해보이기는 하다. 앞의 5명의 남자들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고, 사실 실제로도 그럴 것이다. 해협을 건너는 장거리 수영은 생존이라기 보다는 사실상 스포츠다. 거트루드도 옆에 길잡이가 있으니 과감히 크롤을 시도했을 것이다. 물론 길잡이가 없다면 평영도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지만, 그나마 평영이라면 시야도 확보할 수 있고 손도 자유롭게 쓸 수 있지 않은가. 일본에는 일본영법이라 불리는, 전국시대에 확립된 일종의 생존수영이 있다. 옛것이라면 일단 보존하고 살을 붙여 파는 일본인들 답게 아직까지도 전래되는데(물론 원본보다 훨씬 세련되게 바꾸었긴 했을 것이다.), 정말 느리고 현대 영법과 많이 다르긴 하지만, 굳이 비교를 하자면 횡영과 평영을 섞어놓은 것 같다. 생각해보면 인간의 개헤엄도 평영하고 가장 유사하지 않나 싶다. 신사들의 수영방법이라는 19세기의 영국인의 생각과는 달리, 평영이야말로 인간의 직관에 가장 부합하는 원시적인 영법이 아닐까 싶다.

   개인적으로는 평영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다. 빡세게 하면 골반도 아프고, 기복에 따라 속도차가 심하며, 레슨 시간에 하도 옆의 사람을 걷어차게 되어서 마음 놓고 해본 적이 없다. 하도 많이 걷어차고 차이다보니, 수영레슨에서의 평영은 그저 생존이라기보다는 적자생존에 가까운 것 같다. 어쩌다가 할머니들을 발로 밀치게 되면 섬칫하여, 자유수영 때는 연습도 안 한다. 그러니 더더욱 늘지 않는다. 딱히 관심도 없다. 수영 다닌지 1년 넘게 지났고, 오늘에서야 겨우 언더워터 스타트라는 평영 고유의 스타트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일롱이지만 나름 마스터반인데 정말 몰랐다. 다이빙을 준비하는데 강사가 물어봤다. 다들 언더워터 스타트 배우셨죠? 나 혼자 손을 들고 대답했다. 아뇨. 강사가 말했다. 아 그렇구나...자, 갈 때 평영, 올때 자유형. 시작. 아마 영원히 못 배울 것 같다.

  어쨌든, 거트루드는 그 누구도 자신의 기록을 깨지 못할 것이라고 자부하였고, 20년 넘게 정말 그 어떤 남녀도 영국해협에서 그녀의 기록을 넘보지 못했다. 하지만 모든 기록이란 종국에는 깨지라고 있는 게 아닌가? 1950년 미국인 플로렌스 채드윅이 13시간 20분이라는 기록으로 그녀의 기록을 깬다. 플로렌스 채드윅도 여성 수영선수다는 게, 여성의 능력을 증명하고 싶었다는 거트루드에게 그나마 위안거리가 아니었을까 싶다. 당시 거트루드는 힘겹게 살고 있었다. 그녀가 사랑하던 수영 때문에 청력도 잃고, 사고로 몸도 크게 다쳤으며, 대공황 때 재산을 많이 잃은 바람에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녀가 영광의 세월 이후 비참한 여생을 보냈다고 쉽게 말할 수는 없겠다. 청력을 잃은 그녀는, 청력을 잃은 아이들에게 수영을 가르치고 있었다. 1950년대, 힘겹게 운명을 버티던 그녀가 어느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불만은 없어요. 편안하고 만족해요. 저는 별이 손안에 있는데 달을 쫓는 사람이 아니랍니다. 주께서 그간 제게 많은 은덕을 베푸셨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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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케일이 1973년 발표한 앨범인 Paris 1919는 록 음악 역사상 가장 훌륭한 앨범 중 하나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을 하긴 하다만, 실제 위상은 그와 거리가 멀다. 지금도 언급조차 뜨문뜨문 되는 앨범이기 때문에, 몇십 년 더 지나면 구해서 듣는 것조차 힘든 앨범이 되는 게 아닌가 걱정도 된다. 사실 발매 당시나 지금이나 평가가 좋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각종 리뷰를 찾아봐도 찬사만 받았지 악평은 하나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럼에도 이런 미미한 위상으로 밀려난 것은 당시 존 케일의 미미한 대중적 인지도와 판매량 탓도 있겠지만, 그 무엇보다 70년대에 나온 게 가장 큰 문제가 아니었을까 싶다.

Paris 1919는 유럽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변 바로 알아보겠지만, 1919년 파리 강화조약을 일컫는 것이다. 1차대전 종결 이후 패전국의 처우, 식민지 문제, 국제기구 창설 등을 논의하기 위해 승전국들 주도로 열린 회의였다. 결과는 다들 잘 알다시피 승전국들이 독일에게 과도한 추징금을 물림으로써 세계 2차대전의 단초를 제공하였다. 그 외에도 패전국의 식민지는 해체하고 승전국의 식민지는 유지하기로 하였고, 이 때문에 동아줄 잡는 심정으로 왔던 임시정부의 특사들이 소득 없이 돌아갔으며, 국제연맹이라는 있으나 마나한 국제기구가 탄생은 했다. 임시정부의 외교관으로 파견됐던 김규식은 미국의 외교관에게 "일본은 국제연맹이 제어할 것이다."라는 대답을 들었다고 하는데, 알다시피 일본을 제어하지는커녕 방조한 덕에 수천만의 한국인과 죽거나 착취당한 것은 물론이고, 그때 내린 결정의 여파 덕에 20세기를 지나 21세기까지 혼란이 그치질 않는다. 아프리카의 수직선과 수평선으로 그인 국경선, 같은 곳에서 독재자를 죽인 장군들이 다시 독재자가 되는 피의 통치사, 남한과 북한 혹은 한국과 일본, 토끼몰이꾼 이스라엘과 사냥감 팔레스타인, 이슬람국가와 유럽의 난민문제 등. 모든 것이 합리적으로 통제가능하다고 믿었던 당시 유럽의 지도자들이 이렇게 한 치 앞도 너무 멀어서 못 보는 인간들이었다.

"끔찍한 일을 가장 멋진 방식으로 다뤄보자."라는 게 존 케일이 이 음반을 만들면서 세운 목표였다고 한다. 끔찍한 일이야 당연히 70년대에 지금보다 더 생생하게 여파를 느낄 수 있었던 파리 강화조약이다. 그렇다면 멋진 방식이란 무엇이었을까? 존 케일의 생각은 피아노와오케스트라 편곡이었다. 사실 식상한 발상이기는 하다. 유럽 클래식 음악의 유구한 전통이고 대중음악에도 도입된 지 꽤 되었다. 하지만 이게 존 케일의 발상이라는 점은 특이하다. 존 케일은 록 음악계에서 정말 보기 드문 비올리스트였고 클래식 교육까지 받은 뮤지션이었지만, 이 앨범 이전에도 이후에도 오케스트라 편곡을 사용한 적은 없다시피 하였다. 벨벳 언더그라운드에서 활동하던 시절 만들었던 Heroin 같은 곡이 존 케일이 기존에 현악을 록음악에 사용하는 방식이었다. 막상 이 앨범에서도 오케스트라 편곡이 전면에 나오는 곡은 동명의 타이틀곡인 Paris 1919 한 곡 뿐이다. 아마 이게 가장 끔찍한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오케스트라 편곡 자체도 60년대의 비틀즈나 비치 보이즈의 방식하고는 꽤 다르다. 벨벳 언더그라운드가 비틀즈를 경멸하고 다른 길을 갔듯이, 벨벳 언더그라운드를 나온 존 케일도 여전히 비틀즈와는 다른 길을 걷고 있던 것이다. 마치 미니멀리즘 음악에서 그러듯이 바이올린 파트를 드론으로 활용하고(마치 Heroin에서 비올라가 그러했듯이!) 시시때때로 첼로가 웅장한 존재감을 내세우며 등장한다. 예나 지금이나 록음악에서 현악이 선율을 보조하는 방식으로만, 즉 예쁜 화음 만드는데 사용되는 것과는 딴판이다. 존 케일 본인도 이런 식의 편곡이 마음에 들었는지, 이후의 음반에서 음악을 어떻게 만들든, 라이브에서는 현악으로 재편곡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앨범에서 Paris 1919를 제외하고 직접적으로 양차 대전을 언급하는 곡은 2차대전 독일 병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Half Past France 하나 뿐이다. 하지만 나머지 곡들도 20세기의 유럽 이야기이다. 웨일즈나 안달루시아처럼 직접적으로 지명이 등장하는 곡도 있다. 흥미로운 점은 웨일즈 사람이었던 존 케일이 이 앨범을 프랑스에서는커녕, 유럽하고는 물리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멀던 캘리포니아에 살던 시절 녹음하였다는 것이다. 외부의 시점에서 보기 위한 고의는 아니고, 당시 케일이 캘리포니아에 있던 음반사에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별 도리가 없었다. 케일은 그래서 이 앨범에 유럽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담겨있다고 하였다. 합리성, 오만함, 폭력으로 20세기 세계 역사를 뒤틀어놓은 유럽, 그래도 그리운 고향 유럽이 이 앨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이어지는 두 가지 주제다.

그러니 1970년대에 이런 대기획이 나오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국가간에는 냉전으로 인한 갈등이 첨예했고, 국가 안에서는 전쟁을 치른 세대와 그 이후에 태어난 젊은 세대 간의 갈등이 폭발하기 시작했던 게 1970년대였다. 하지만 바로 그때문에 이 앨범이 세대를 대표하는 음악이 될 수 없었기도 하였다. 1970년대는 대중음악계의 가장 찬란한 시기였다. 워낙 날고 기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그때를 대표하는 명반이라 함은, 보통 음악적으로 혁신적이며, 비주얼적으로 전위적이며, 내적으로 깊고, 대중들의 뜨거운 반응까지 이끌어내고, 그중에서도 젊은이들의 마음에 불을 지르는, 이 어려운 조건들을 모두 만족시키는 앨범을을 일컫는다. 당장 같은 해 발매된 앨범이 핑크 플로이드의 다크 사이드 오브 더 문, 친구였던 루 리드의 베를린, 데이빗 보위의 알라딘 세인 같은 음반들이다. 이 와중에 수트를 차려입고 피아노를 연주하던 존 케일과 세기말의 독일어권 소설 같았던 Paris 1919가 시대를 대표할 수는 없었다.

아쉬운 일이지만 나는 Paris 1919가 그저 시대를 못 탔을뿐, 앨범도 곡도 듣기도 편하고 지금까지도 스타일이나 수준이나 비슷한 경지의 곡이 별로 없을 정도로 좋은 음악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들을 때마다 학교에서 배웠던 아우스터리츠 같은 소설도 생각나고. 똑같이 웨일즈도 나오고 유럽사도 나오고. 어쨌든 이런 음악이 잊히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구구절절 글도 쓴 것이다. 혹시 듣다가 곡이 좋다 싶으면, 다른 사람을이 좋은 노래 뭐 있냐고 물어볼 때 이 곡 이름을 대주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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