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 전 웹툰으로 나왔을 때 유료결제 하면서 챙겨봤다. 언젠간 영상화가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고, 나 말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예상했었고, 실제로 그렇게 됐다. 웹툰도 참 답답했는데, 드라마는 답답한 것을 넘어 독하다. 영화든 드라마든 한국의 영상 제작자들이 가장 잘 하는 종류의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의 짙은 어둠 속을 직시하고 약간의 코메디를 담아 장르적으로 풀어내는 작업 말이다. 당연히 사회에 짙은 어둠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내가 군생활 할 땐 10만원 정도를 받았다. 나는 헌병이어서 주말근무를 뛰었고 특급 격오지에 있단 이유로 1~2만원 정도 더 받은 것 같다. 내가 2011년에 입대했으니, 옛날 일은 맞지만 그렇다고 아주 옛날 일은 아니다. 문제는 내가 군생활을 한 특급 격오지가 울릉도였다는 것이다. 휴가를 나가려면 배를 타야 했다. 부대에서 뱃값을 주긴 했는데, 연가가 껴야 뱃값을 줬던가, 외박을 껴야 뱃값을 줬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하여간 둘 중 하나였다. 어쨌든 뱃값을 안줄 때가 있었다. 집이 수원이었으니 가는데 10만원, 오는데 10만원. 가끔은 휴가를 나가야 하는데 교통비도 못 대서 집에서 용돈을 받아야 할 때가 있었다.
이 얘기를 하면 다들 대한민국 군대가 너무한다 했지만, 이게 내가 군대에서 겪은 각종 문제 중에 가장 사소한 것이었고, 사실 아무것도 아닌 문제였다. 그냥 좀 불편한 문제였을 뿐이다. 택배를 샀는데 잘못 배송이 가든가 택시를 탔는데 이상한 길로 돌아간다든가 하는, 그냥 불편하고 짜증나는 일 말이다. 나머지는 불편한 수준의 문제가 아니었고, 너무나 말하고 싶으면서도 절대 말하고 싶지 않다.
되게 찌질한 심정 정도는 풀 수 있다. 휴가 나오면 듣는 흔한 말이 있다. 네가 나라 지켜줘서 발 뻗고 잔다. 그말 들으면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을까. 그말마저 화가 났다. 내가 거기서 당하는 게 네가 발 뻗고 자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냐고. 전역을 하니 가족들이 말했다. 군대 건강히 잘 갔다왔구나. 감동의 순간이어야 했는데 그말마저 화가 났다. 건강히 온 적이 없다. 그때 총을 매던 어깨가 지난 8년 365일 24시간 단 1초의 예외도 없이 뻐근하다. 잘 갔다온 적도 없다. 그냥 갔다가 2년이 지나서 집에 왔다. 아빠가 남자답게 "필승" 한 번 해보라고 했다. 난 거절했다.
요 몇 년 복무개월수가 짧아지고 월급이 오르고 핸드폰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나라를 지키는 군인들은 대우를 받아야 하고 세상은 나아져야 하고 핸드폰을 쓰면 부조리가 줄어드니 합리적으로 이성적으로 찬성했다. 그게 맞지 세상이 좋아져야지. 말로는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하고 다닌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는 앞으론 아무도 이걸 모르게 된다고? 나는 계속 억울해 하라고? 이런 불만이 한구석에서 내 양심과 이성을 상대로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아귀힘이 제법 쏐다.
대우가 좋아지는 거 다 좋은 일이고 당연히 되어야 일인데, 사실 대우보다는 현역과 군필자들의 근원적인 분노나 억울함은 그와 한 차원이 다른 문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보통 돈으로 대우를 하는 게 맞긴 한데, 징병은 돈의 문제가 아니다. 그건 자유와 선택의 문제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긴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내 20대의 희생이 잊히는 건 아무렇지도 않다. 그런데 그때 느낀 박탈감, 모멸감, 고독함, 분노가 잊히는 건 못 참겠다. 태어났다는 이유로 사는 것처럼 스무살이 됐다는 이유로 자유를 뺏기는데 그에 걸맞는 대우같은 게 세상에 있을까하는 시니컬한 생각이 앞선다. 누가 군대 가서 사람 되어서 나온다고 했던가, 지난 10년간 난 내가 어딘가 한쪽 구석은 망가진 사람이 되어서 나왔다고 생각했다. 군대 건강히 잘 갔다와서 고맙다는 부모님 말에도 화가 날 정도면 어딘가 망가진 게 분명하다고 늘 생각했다.
D.P는 훌륭한 사회고발 드라마이면서도 저런 감정의 디테일까지 담아낸 정말 잘 만든 드라마였다. 그걸 잘하는 바람에, 오랜 기간 잊고 있던 트라우마가 되살아났다. 옛날 기억을 한참을 곱씹어보게 되었다. 동시에 묘한 위로도 됐다는 게 참 아이러니하다. 극중 조석봉이 말했다. "인간은 희생 없인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 맞는 말이다.
그렇다면 뭐가 위로가 됐다는 것인가...첫번째, 나보다 훨씬 힘든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는 점. "너보다 힘든 사람 많아." 위로가 안 되는 멘트라는 의견도 있지만, 혼자 버텨내야 할 땐 제법 도움이 되는 멘트이기도 하다. 드라마의 사례들이 내가 겪은 것보다 수십배는 끔찍하고, 대부분 실화를 기반으로 한 것 같다. 한두가지가 아니라 정말 많은 사례들을 기반으로.
두번째, 이 끔찍한 이야기가 넷플릭스에 길이길이 남을 거라는 점. 대한의 아들들에게는 유독 고개가 뻣뻣한 국방부는 물론, 태양의 후예 같은 건줄 알고 드라마를 시청한 외국인들까지 불쾌하게 느낄 이야기가 오랜 시간 가장 거대한 OTP 플랫폼에 남아서, 대한민국에서 징병이 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증언할 것이다. 지난 세월 고맙다 수고했다 장하다 멋있다 자랑스럽다 뭐했다 저렇다 단 한 마디도 위로가 되는 말이 없었는데, 이 드라마가 사람들을 계속 불편하게 만들 거란 건 너무나도 위로가 된다. 아주 만약에 매우 낮은 확률로 한국 사회의 군대 문제가 해결되더라도, 이 드라마가 남아 있기 때문에 기쁜 마음으로 한국 사회의 진보를 맞이할 수 있을 거 같다. 제작진에게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