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단면적이고 광주의 입체적인 면모를 보여주지 못했다는 비판이 있으나, 그러면 대체 어떻게 했어야 했냐고 되묻고 싶다. 보통 이런 비판을 하는 측에서는 피해자 집단 안의 다양한 갈등양상을 보여주던가, 혹은 가해자와 구분이 안 되는 회색지대를 보여주길 바란다. 하지만 광주는 저런 걸 입증할 사료는커녕 언급조차 하는 기록도 찾기 힘들다. 광주의 남은 미스터리라곤 전두환이 정말 어디까지 지시를 했는지와 같은 것들 뿐이다. 2차원적 기록의 어디에 층을 쌓아 올려야 한 차원 끌어올릴 수 있다는 것일까?


광주를 그 어떤 영화보다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봤던 이창동의 <박하사탕>도 지나치게 폭력적인 묘사만 피했을뿐 사건을 다시 해석하지는 않았다. 이또한 이창동이 힌츠페터의 영상을 안봤을리가 없으니, 광주에 폭력이 없어서라고 생각했던 게 아닐 것이다. 사건이 폭력적인 것과 폭력을 영상에 재현하는 것은 다른 문제고, 또 영호(설경구)가 이십여년에 걸쳐 순수함을 천천히 잃어가게도 해야 하니 광주의 폭력에 집중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택시운전사>처럼 사흘 남짓의 사건을 재현하는 영화가 폭력적이고 평면적인 묘사를 피할 길이 있을까?


만약 방법이 있다면 택시운전자 캐릭터를 바꾸는 게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 싶다. 극중의 송강호는 <변호인>의 송변을 연상케한다. 속물적인 변호사였다가 각성하여 인권변호사가 된 송변이, 학생운동만 보면 혀를 차다가 광주의 참상을 보고 자신을 희생하는 택시운전사가 된 것이다. 송변은 실제 모델이 있다. 택시운전사도 실제 모델이 있기는 한데, 여기서 결정적 차이가 있다. '택시운전사'는 힌츠페터를 태우고 광주로 진입한 택시운전사가 있다는 것 빼고는 모든 게 완전한 창작에 가깝다. 극중 사건의 대부분이 실제 증언을 각색한 것인데도(심지어 실화라고 도저히 믿기지 않는 '그 장면'도...), 막상 주인공인 택시운전사는 그렇지 않다. 당사자인 힌츠페터도 그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에 한 줄 달랑 있는 '대장금'이라는 단어로 50부작 드라마가 탄생한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송강호의 훌륭한 연기, 외화 벌러 사우디 갔다왔다는 설정, 택시운전사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보수적이고, 쪼잔할 것 같고, 말 많고, 적당히 불친절하고 등등...)이 겹쳐 설득력 있는 외부의 관찰자 캐릭터가 나왔다. 하지만 실제 택시운전사 김사복 씨는 그렇지 않았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원래 정의감이 넘치는 사람일 수도 있고, 해외 파견 노동자들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일 수도 있고, '비싼 돈 내고 학교 보내놨더니 데모하는 학생'에 별 관심이 없을 수도 있고, 나이를 보아하니 4.19에 참여했을 가능성도 있고, 손님이 듣기 싫다고 해도 전두환 욕을 줄줄 하는 사람일 수도 있고, 외국인 손님들에게도 열린 마음으로 대하는 사람이었을 수도 있고, 말투에 동남방언이 섞인 송강호와는 전혀 다르게 고향이 광주여서 귀향하는 마음으로 힌츠페터를 태워줬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영화는 이 모든 가능성을 배제하고 안 그래도 바깥사람인 송강호를 더 밖으로 내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래서 아마 다음 광주 영화가 나온다면 새로운 시선이 가능하지 않을까. 외부자의 시점에서 관찰만 하지 않고, 내부자를 억지로 찢지도 않고...요컨대 설정에서 기승전결을 끌어내는 게 아니라 내부자의 시점에서 어떤 인물들이 항쟁을 주도하였고 어떤 판단을 왜 내렸는지, 혹은 내부자들과 교집합을 가진 사람들이 사건을 어떻게 겪고 이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사태의 본질이 폭력인데 이 과정에서 반드시 폭력을 배제할 이유도 없다고 본다.


송강호는 늘 그랬듯이 훌륭하다. 대한민국에서 착잡한 표정을 가장 잘 짓는 사람이 아닐까...


Posted by 시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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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남자들이 TV에 나와 먹을 것을 추천하는 데는 질렸다. 앤서니 부르댕이 한국요리 국물을 맛보면서, 먹어보니 독극물이 아니고 의외로 맛도 괜찮다고 말하는 데도 질렸다. 태국에 몇 번 갔는지 신경도 안 쓴다. 듣지 않을 것이다. 내 도시락에 들어있던 오징어다리를 가지고 놀려대던 백인아이들이 한국의 소녀였던 내 말을 듣지 않았듯이 말이다. 그때 나를 쉴새없이 놀렸던 아이들이 이제 한국 음식이 트렌드라고 난리다.

나는 태평양 연안 북서부에서 자랐다. 대학이 있는 마을이었는데 90퍼센트의 인구는 백인이었다. 사춘기 때 스스로가 한국인 혼혈이라는 게 싫었다. 사람들이 “(북서부 말고) 정말 어디 출신인데?”라고 물어보는 게 싫었다. 나는 한국어도 할 줄 모르고 아시아인 친구도 없었다. 내게 한국인스러운 건 전혀 없었다. 음식은 빼고 말이다.

저녁에 집에서 엄마는 당신을 위해서는 한국요리를, 아빠에게는 미국식 상을 차렸다. 아빠는 군부대에 차량을 파는 일을 하면서 호텔에서 일하던 엄마와 사귀었는데, 한국에서 몇 년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본질은 필라델피아의 백인 소년이다. 그는 모험적인 식도락가이지만(그에게 개고기 수육에 대해서 물어봐라), 그의 고향의 음식은 고기와 감자이다.

그래서 매일저녁 엄마는 두 상을 차려야 했던 것이다. 아빠를 위해 브로콜리를 삶고 연어를 구우면서, 찌개를 끓이고 ‘반찬’이라 불리는 작은 사이드 디시를 상에 놓았다. 우리집 밥솥이 친숙한 기계목소리로 “맛있는 백반이 곧 준비됩니다!”라고 알리면, 세 식구가 동서양이 환상적인 조화를 이룬 밥상 앞에 앉는 것이다. 나는 젓가락으로 티본스테이크의 고깃조각과 참기름에 절인 대구알을 모두 한입에 집어넣는 식으로, 종종 입안에서 진정한 혼합물을 만들기도 하였다. 삶은 감자에 고추장을 발라먹는 것도, 마른 오징어에 마요네즈를 찍어먹는 것도 좋아했다.

한국음식에는 참 사랑스러운 점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특유의 극단성이 좋다. 뜨거운 음식이라면 혀를 델 정도로 뜨겁다. 신선한 음식이라면 아직 살아있는 것을 내온다. 국은 아직 뜨끈한 돌솥에 내온다. 계란을 까서 넣으면 눈 앞에서 익는다. 차가운 면요리는 아예 얼음으로 만든 그릇에 내온다.

십대 후반이 되자 나는 미국음식보다 한국음식을 더 좋아하게 됐다. 알탕과 칼국수 생각만 하면 배가 고팠다. 가족여행을 떠났는데 주위에 한국식당이 없으면, 나와 엄마는 호텔 부페를 건너뛰고 호텔방에서 전자레인지에 돌린 밥과 구운김을 먹었다.

2년 전 어머니가 암과의 갑작스럽고, 짧고, 고통스러운 싸움 끝에 내 곁을 떠났을 때, 한국음식이 나를 위로해주었다. 엄마는 2014년에 암진단을 받았다. 그해 5월 엄마는 복통 때문에 의사를 찾아갔다가 편평상피암이라는 희귀한 질병에 걸렸고, 4기이며, 이미 전이됐다는 것도 알게 됐다. 느닷없는 충격이었다.

나는 오레곤의 고향집으로 돌아가 화학치료를 받는 어머니를 도왔다. 그 네 달 동안, 엄마가 천천히 사라져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화학치료는 모든 것을 가져갔다. 머리카락, 정신, 그리고 입맛까지. 암은 그녀의 혀에도 물집을 냈다. 한때 아름답고 독특하던 우리집 식탁은 단백질 파우더와 맛없는 죽의 전쟁터가 되었다. 나는 바이코딘 알약을 빻아 아이스크림에 넣었다.

저녁식사은 칼로리를 계산하고, 뭐라도 목구멍으로 넘기게 하려고 엄마와 싸우는 시간이었다. 한국음식 특유의 향과 양념은 엄마가 소화하기에는 너무 강했다. 김치도 못 먹게 됐다.

나도 엄마 옆에서 쪼그라들기 시작하였다. 엄마의 건강문제에 나도 너무 지쳐, 식욕이 싹 사라졌다. 엄마의 투병기간 동안, 내 살도 15파운드가 빠졌다. 화학치료를 두 번 하고 나서 엄마는 치료를 중단하기로 결정하였다. 두달 후 그녀는 세상을 떠났다.

엄마의 죽음을 납득하기 위해 싸우는 동안, 종종 내 기억은 음식으로 향했다. 내가 대학에서 본가로 돌아올 때면, 엄마는 갈비쌈을 해줬다. 갈비살을 배추로 싸먹는 한국요리이다. 엄마는 내가 비행기에 타기 2일 전에 벌써 고기를 재워놓았을 것이고, 1주일 전에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깍두기를 사둬 익게 했을 것이다.

어린 시절 엄마와 서울에 갔던 날도 있었다. 시차 때문에 잠을 설친 우리는 친척들이 자는 동안 눅눅한 할머니집의 부엌의 검푸른 어둠 속에서 반찬을 주워먹었다. 그럴 때 엄마가 속삭이는 것이다. “이러니까 한국인 같네.”

그럼에도 엄마는 내게 한국음식을 만드는 법을 가르친 적이 없었다. 내가 밥지을 때 물을 어떻게 맞추냐고 물어보려고 전화를 하면, 엄마는 매번 “손등까지 부어”라고 말할 뿐이었다. 내가 갈비 레시피 좀 알려달라고 하면, 대충의 재료목록과 대강의 양만 알려주고는 “엄마 거랑 비슷”한 맛이 날 때까지 간을 보라는 것이다.

엄마가 죽고 나서, 나는 그녀의 병때문에 생긴 트라우마에 고통 받아서, 스타일리쉬하고 고집세고, 언제나 진심을 말하던 여성이었던 엄마의 모습을 다시는 기억하지 못할까봐 무서웠다. 내 꿈속의 엄마는 언제나 아팠다.

그때 내가 요리를 시작했다. 내가 처음 한국요리 레시피를 찾아다닐 때, 소스 몇 곳을 찾긴 하였지만, 한국식 타코같은 괴물이나 김치 슬로 같은 어설픈 요리를 만드는 바비 플레이 같은 사람을 믿을 수는 없었다. 그때, 오리엔텔 치킨 샐러드 비디오 사이에서, 나는 유명 한국인 유튜버였던 망치(Maangchi)를 알게 됐다. 영상에서 그녀가 배의 껍질을 까는데, 우리 엄마 같았다. 칼등에 검지를 얹고 한 번에. 갈비도 우리 엄마처럼 양손을 다 써서 자르고 있었다. 오른손으로는 젓가락으로 고기를 들고, 왼손으로 한입 크기로 고리를 자르고 있었다. 한국인 여성은 부엌가위를 전사가 칼을 휘두르는 것처럼 사용한다.

나는 잣죽 레시피를 찾고 있었다. 잣죽은 아픈 사람들이나 노인을 위한 요리인데, 충격과 상실감이 배고픔에게 자리를 양보했을 때 내가 처음으로 먹고 싶은 음식이었다.

나는 망치의 지시를 주의깊게 따랐다. 쌀을 씻고, 잣의 끝을 떼어내고. 요리를 하면서 엄마생각이 났다. 빨간 도마 앞에 서있던 그녀의 모습, 특유의 재밌는 억양.

많은 사람들에게 줄리아 차일드는 TV 요리프로그램의 시대에 뵈프 브루기뇽을 끌어들인 영웅이다. 그녀는 가정의 요리사들에게 요식의 산을 오르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엄마가 떠난 후 망치가 내게 이러한 것을 해준 것이다. 내 주방은 배추, 오이, 무 등을 담은 통으로 가득찼다. 엄마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김치 싫어하는 사람하고는 사귀지 마라. 네 살에서 김치냄새 난다고 할 거야.”

일년 넘게 망치와 함께 요리를 하면서 시간을 보냇다. 종종 영상을 멈추고 앞으로 넘어가서 제대로 확인한다. 가끔은 내 손과 미각이 알아서 기억을 따라가게 내버려둔다. 내 요리는 엄마의 것과 완전히 똑같진 않지만, 그래도 괜찮다. 이정도면 맛있는 트리뷰트다. 요리를 더 배울수록, 더 그녀에게 가까워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얼마 전 어느 밤, 꿈을 궜다. 엄마가 김장독에 배추 포기들을 채워넣고 있었다.

건강하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https://www.glamour.com/story/real-life-love-loss-and-kimchi

Posted by 시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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