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고복수라는 소매치기가 하나 있었다. 그를 사랑하는 아부지가 있었고 송미래라는 애인도 있었다. 박정달이라는 형사가 하나 있어 자주 신경을 긁었다. 어느날 맹해보이는(그런데 배우가 이나영이라서 졸라 아름다운) 전경이라는 아가씨 지갑을 하나 털었다. 알고 보니 그 아가씨는 밴드를 하고 있었고, 그 돈은 병으로 쓰러진 밴드 보컬 수술비였다. 밴드 보컬은 수술을 못 받아 죽었다. 뭐 여자 입장에서는 죽일놈 아닌가. 얼라? 그런데 정말 모든 것을 진심으로 대하는 그 남자, 둘은 결국 사랑에 빠졌네. 2002년 최고의 화제작, 「네 멋대로 해라」 이야기다.


1. 밥벌이와 미드에 관해서


  아부지와 어무이는 주로 밥벌이를 하고 있고 나는 주로 밥을 축내고 있다. 아부지는 밥벌이가 힘들어 내가 공부를 많이 하기를 바란다. 아부지는 하는게 변변찮아서 너한테 해줄수 있는게 교육밖에 없다. 일하는거 정말 힘들고 하기가 싫다. 하지만 자식새끼들 때문에 하는거 아니냐.

  오래전에 탄 어느 택시는 머리카락 흔적도 안 보여 세월의 흔적이 잘 보이는 어느 기사 아저씨가 몰고 있었다. 기사 아저씨는 내게 신세 한탄을 했다. 내가 이렇게 돈을 벌고 싶지 않은데, 마누라와 자식 새끼들 떄문에 어쩔수가 없다. 학생도 부모님에게 효도해라. 절대 이렇게 고달프게 살지는 말고. 나같이 3D, 참 힘든거다.

  3D 업종 아니라도 힘든건 마찬가지인가 보다. 부모님께 효도하고 회사 들어가도 마찬가지란다. 김훈은 밥벌이의 지겨움이라는 에세이까지 썼다. 심지어는 대중매체에서도 그런다. 도대체 영화마다 고달픈 가장들은 왜 하나같이 밴드를 하는지. 브라보 마이 라이프도 그렇고, 즐거운 인생도 그렇고.

  그런데 못난 애비 벤 스틸러가 박물관에서 삽질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참 미국 드라마와 영화에 나오는 프로페셔널은 참 프로페셔널하기도 하다. CSI 그리섬 반장님좀 봐라. 아주 증거만으로 딱딱 떨어지지 않는가. 심증은 믿지 않는다니 참 쿨하기도 하지. 닥터 하우스는 또 어떤가. 부하들을 갈구고 병의 원인을 찾아가고 부하들을 갈구고 병의 원인을 완벽하게 찾아간 후 부하들을 갈구고 치료까지 성공하신다. 참 쌈박도 하시지. 아 이건 더이상 밥벌이가 아니라 오큐페이션(occupation)이라고 불러야 할거야. 강세는 o와 a에 붙이고.

  예전에 어느 일간지에서 미국 드라마가 선전하는 이유를 프로페셔널들의 프로페셔널한 애티튜드에서 찾았고 나름대로 우리나라식의 직업 드라마를 찾으며(대장금도 들어갔던걸로 기억한다.) 이런 추세를 독려했다. 한국 드라마는 그러지 못해서 인기가 없다나? 그러나 밥벌이는 밥벌이인데. 밥벌이가 실황이 어떤지 상관없이 무조건 아름다워야 하는 나라에서 밥벌이가 고달픈 드라마를 찍을리가 있으랴. 그들은모든 밥버는 사람의 판타지를 위한 드라마를 찍을 필요가 있었다. 그러기에 직업 드라마가 많은것 뿐이다. 우리에게 직업 드라마가 많이 필요하다면 이젠 우리도 콜라'만' 마시고 팝콘'만' 씹을 때가 올 때이다. 그 칼럼의 지적대로 그러지 못해서 한국 드라마 인기가 떨어진다면 차라리 서글프다. 우리의 일반적인 판타지가 이젠 일 졸라 잘하는 글로벌한 인간이라니. MB 시대에 맞춘거야? 그런거야?

  사실 호세 레저의 발연기 같은 것과 12각 관계 같은 것이 인기 저하에 한 몫하기는 한다. 그러나 살인자를 쫓는 살인자의 이야기가 굳이 아니여도 괜찮다. 불치병 걸린 남자 고복수와 집이 참 싫은 부잣집 따님 전경의 사랑같이 통속적인 이야기여도 연출을 어떻게 하고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울리느냐, 이것이 직업 드라마인지 아닌지 여부보다 중요하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런 사랑 이야기.

  미드들이 인기를 끈 것도 저 일간지의 해석대로가 아니라 연출 덕이라고 믿고 싶다. 사실 미국 드라마에서 일만 하는건 아니잖아, 탈옥도 하고 테러리스트도 잡고, 심지어는 귀신도 잡는걸.


2. 진정성에 관해서

  그런 의미에서 내 판타지는 프로페셔널한 프로페셔널이 아니라는 고백을 해보자. 내 판타지는 이나영 같은 애인을 둔(중요) 고복수같은 삶이다.

  내가 격투기 중에서 유독 권투를 좋아한다. 사실 선수가 누가 있는지도 모르고, 자주 보지도 않지만. 마치 김광섭이 말한 "생의 감각"이 정신없이 흔들리는 것 같다. 승리는 처절하고 패배는 비참하다. 그들은 인생마저 근육같이 늘 꿈틀거릴것 같고, 무함마드 알리는 정말 그렇게 살았다. 그래서 큰 기대를 가지고 본 요즘 챔피언이라는 메이웨더의 권투는 마치 컴퓨터 게임보다 약아서 나는 실망했다.

  고복수는 정말 별 볼일 없는 소매치기였다. 그런 고복수는 출소한후 어느날 갑자기 쓰러졌고 병원에 간다. 그곳에서 뇌종양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의 삶은 어쩌면 그때부터 시작되는 것일테다.

  그리고 그가 소매치기를 때려치우고 별 생각 없는 꼬붕이를 데리고 시작한 일이 바로 스턴트였다. 몸으로 부딛치는 그의 일은 마치 정신없이 흔들려왔던 그의 인생 같았고 권투 같았다. 전경을 만나고 나서도 그는 인생을 불꽃처럼 흔들고 있었다. 그는 스턴트라는 '직업'이 있지만, 그 일은 마치 직업으로 보이기보다는 아직 숨쉬고 있다는 증명처럼 보인다.

  흔들리는 것은 고복수만이 아니다. 이 글을 쓰는 나도, 이 글을 읽는 사람들도 한시도 쉴새없이 인생은 흔들리고 있다. 하지만 그런 상황마다 고복수는 모든 것을 진지하게 대하지는 않지만, 진심으로 대하기는 한다. 전경이 그런 고복수를 잘 표현했었다. 진짜 마음을 만났다고, 최고의 마음을 만났다고. 나도 모두를 기술이 아닌 진심으로 대할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같이 몸으로 인생을 사는 액션스쿨의 스턴트맨들, 소매치기를 미끼로 쓰는 박경달같은 인간들도 참 솔직하기는 했고, 돈으로 여자를 지배한다고 공개적으로 떠들고 다니던 전경의 오빠 전강, 아주 생각나는 대로 말하던 기자 한동진, 무엇보다 사실상 고복수에게 차인 셈이었지만 그래도 걱정하고 미련을 떨치지 못한 송미래까지. 악역을 포함한 조연까지 모두 진심으로 남을 대하던 이 드라마는 그래서 쿨하다는 소리를 들었나 싶다.


3. 이나영에 관해서

  세상 살면서 하늘이 정말 원망스러웠던 적이 몇번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이나영이 79년생이라는 것이다. 세상에, 나이 차이 극복하기는 글렀어!

아, 여신이다.



뱀다리. 사실 「네멋대로 해라」가 처음 방영되었을 당시에는 그 지긋지긋한 불치병 시나리오란게 거의 없던 시절이란다. 그리고 소매치기와 갑부라는 신분 차가 나는 사랑 이야기도 드라마에 별로 없었다고 한다. 사실 그때기준으로 보면 소재도 신선한 셈이었다. 그래서 그랬던가? 그에 대해 심층적으로 따지지 않았으니, 신분 차라는 것에 딱히 그들의 사랑에 방해받지는 않았던것 같다.
Posted by 시니사
,

그렇게 쉽게 읽혀져? 2007. 11. 27. 09:38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나는 탐미주의자는 아니다. 그건 확실하게 말할수 있다. 그것이 음악이든 미술이든 문학이든, 그런 전유물을 즐길수 있는 지식도 없고 돈은 더 없다. 어쩌면 '미'라는 것은 그걸 즐길수 있는 사람들만의 전유물이라고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이나영이 예쁘다고 생각하는 것하고, 미술의 구도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하곤 아무래도 영 차이가 많다. 그러나 김훈의 문장이 예쁘다는 것은 알겠다. 그건 '탐미'하곤 좀 거리가 있다고 믿고싶다. 문장은 짧은데 템포는 느리다.

  어릴 때는 개를 키웠다. 개에 나오는 것처럼 진돗개였다. 노란털의 개는 아니었다. 다른 곳으로 팔려나가도 발바닥에 땀나게 뛰어와 고향 진도로 돌아왔다는 그런 '백구'였다. 아버지는 어린 개의 꼬리를 잡고 들고오셨고, 어쨌거나 애완견이라는 느낌은 0.1%도 안드는 태도인데다가 아마 내가 그 개를 봤을대 처음으로 했던 말은 "이거 먹을거에요?" 이랬던거 같다. 오해하지 마라. 난 개고기 못 먹는다. 난 정말 개의 안위가 걱정되었을 뿐이다.

  개의 이름은 "진자"라고 붙였다. 순전히 이름이 유치하면 오래산다는 어른들의 믿음에서 온 별명이다. 지금 생각하면 우리 가족중 아무도 이견을 달지 않았다는 것이 신기하다. 진자는 5년을 살고

  어느날 사라졌다. 뭐 풀어놓았기 때문에 새벽에 지혼자 동네 왔다 갔다 하는 일이야 흔했고, 집에만 쳐박혀있으면 비 오는 날의 진자는 우울해보였기 때문에 아버지도 묶어 두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날은 나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마 개장수가 데려갔을 것이다. 그다음에는 고기를 연하게 만든답시고···

  어쨌거나 다른 개주인들 다 하듯이, "사라진 개 찾습니다." 전단지는 붙여야 하지 않겠는가. 어쨌거나 나같이 사람 얼굴도 제대로 구분 못하는 사람도 있지만, 뭐 개 얼굴 구분 잘 하는 사람 한 둘은 있지 않겠느냐-하고 사진을 붙여야 하는데, 문제는 사진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다. 뭐 전단지 붙이는 일도 어물쩍어물쩍 되어버리고, 결국 진자는 내게 이것밖에 안 되는 거였나 생각하니까 너무 찝찝했다.

  이 책의 주인공은 '보리'고, 진자보다는 조금 더 센스 있는 이름이다. 태어나보니 개였고, 태어나보니 수컷이었다는, 굉장히 운명론적으로 사고하는 개다. 바다란 건드릴 수도 없는 아득한 존재고, 주인이 자신을 두고 옮기면 옮기는 것이지, 진도의 그 백구처럼 허벌나게 뛰어 운명을 바꾼다는 것은 떠올리지 못하고, 자신이 좋아하던 암캐도 깡패같은 개가 먼저 차지하자 '어쩔수 없지'하고 넘어가는 개다.

  김훈 문장의 담백함은 어쩌면 이런 반쯤 포기한 운명론에서 오는걸까?

  책의 마지막 쯤, 극도의 아이러니가 있다. 보리는 자신의 주인이 떠난 학교 운동장에서 웅변을 듣는다. 자신이 좋아하던 흰둥이는 고기가 되었고, 그 장면을 보리는 거기에 대해 어떤 반항도 안하고 한 번 짖지도 않고 어쨌거나 몰래 지켜봤다. 그리고 그 개주인 꼬마가 그날에 대해 슬펐다고 말하는 웅변을 듣는 것이다. 꼬마는 그 당시에 슬펐다면서 울면서, 상품으로 장난감 로봇을 주자 함박웃음을 지으면서 로봇을 들어 올린다. 보리는 거기에 대해 어떤 논평도 하지 않고 지켜만 본다. 결국 개는 꼬마에게 장난감 로봇으로 쉬이 대체될 수 있는 존재였다.  내게도 진자라는 한 '생명'은 그랬던 것 아닐까? 분노인지 회한이지 알수도 없는 개가 본 그 아이러니가 자꾸 머릿속을 멈돈다.

  이럴때 김훈의 운명론은 문장만큼 달콤하다.

Posted by 시니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