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06년 Orion Books에서 출간된 Jon Spurling의 저서의 번역본입니다.

태동기-이웃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1)

리엔트, 스퍼즈, 그리고 첼시의 대표단이 '가능한 최대한 강경하게' 울위치 아스날을 하이버리로 이전하겠다는 노리스의 계획에 반발했다. 그들은 런던[각주:1]에 새 팀이 생긴다면 자신들의 기존 팬층을 갉아먹을까봐 걱정한 것이다. <토튼햄 헤럴드>의 만평에서는 노리스를 마치 바스커빌 가의 개처럼[각주:2] 스파이크 달린 목걸이를 하고, 농장을 기웃거리며 토튼햄의 닭들을 갈기갈기 찢어 식량을 훔쳐갈 태세를 한 것처럼 그려놓았다. FA에서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청문회를 열었다. 노리스는 그의 친구들과 같이 위원회를 구슬리며 쓸만한 정보를 주었다. 인구 400,000의 버밍햄과 인구 250,000의 쉐필드에 리그 최강의 팀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인구 200만명도 넘기고 끝없이 확장중인 런던에서 네 팀 정도 수용 못할리가 있겠냐고 말이다. 위원회는 역시나 고소한 측에 '방해할 권리'가 없다고 판결하였다. 그리고 '토튼햄 헤럴드'는 팬들에게 간곡히 부탁하는 광고를 게제했다. "…노리스가 이끌고 온 울위치의 불법 침입자들 경기를 보러가지 마십시오. 그들은 여기 있을 자격이 없습니다."

  이제 다음 문제는 하이버리에 살고 있던 강경한 주민들이었다. 그들은 대문짝 앞에 "프로 축구의 부정한 면모"이자 "저열한 계획"의 산물이 생긴다는 것에 정당한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다. 이슬링턴 구청(The Islington Borough Council)의 기록에는 하이버리 파크 거주자였던 컨벤튼 씨의 발언이 적혀있다. "이 마을에 재앙이 될 것 같은 이번 계획을 구청에서 막을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아베넬 가(Avenell Road)에 사는 A. 베일리 씨는 이렇게 적었다. "울위치 아스날이 이 곳에 세울 고층의 스탠드 때문에 이곳 주민들은 상당한 정신적 고통과 불편함에 시달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구청에서 조치를 세워주셨으면 합니다." <이슬링턴 가제트>의 기자인 헨리 월러(Henry Waller)가 1913년 2월에 쓴 글은 더 구체적이다. "저 침입자들이 이곳에 자리를 잡는 날은 이 지역민 모두가 슬퍼해야 할 날이다. 모범적이고 마을한 동네가 소란스러운 폭도들과, 두렵게도 음주의 중심이 되고 말 것이다. 하이버리 사람들이 모두 들고 일어나 이 계획을 온몸으로 막아야한다. 울위치 아스날이 그들이 있어야 할 켄트에서 공을 차는 것에는 아무런 이의가 없지만, 짤막하게 말해서 여기는 그들이 있을 있을 곳이 아니다."

  노리스는 님비의 본질을 너무 잘 알고 있었고, 지역 행정에도 도가 튼 사람이었다. 그는 경기장이 주거지 사이에 생겨도 별 신경도 쓰이지 않을 것이고, 매 토요일마다 30,000명이 넘는 손님들은 지역 경제를 활성화시킬 것이라고 반대자들을 강하게 설득했다. 많은 반대자들이 이에 동조하여 건설 과정 동안 콩고물이 떨어지길 기다렸다. 항의를 계속하던 사람들은 노리스가 지역 언론 인맥을 통해 완벽히 차단했다. 하이버리 사람들은, 마치 조지 오웰의 소설 속에 사는 것처럼 이전 반대 계획 회의는 결코 열리지 않았고, 반대 모임 같은 것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믿고 말았다. 나치당의 대중 선동 담당자였던 괴벨스에 맞먹는 검열 기술로 노리스의 동료들은 반대자들에게 대중의 관심을 완전히 차단시켰고, 결국 이전 반대 운동의 깃발은 꺾이고 말았다.

  레슬리 앤더슨(Leslie Anderson)의 아버지인 도날드 앤더스(Donald Anderson)은 울위치 아스날의 하이버리 이전을 반대한 지역 주민 중 하나다. 나는 1990년대 초에 레슬리 앤더슨씨를 인터뷰 한 적이 있었는데, 그는 노리스의 도저히 꺾을 수 없었던 추진력을 또렷히 기억하고 있었다. "제 아버지는 노리스를 사업상 이유로 알고 있었습니다. 당신께서는 허튼 짓은 용납하지 않는 분이셨고, 세계 대전에서 4년 동안 참호 속을 이리저리 헤집으면서 끝까지 살아남으셨죠.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아버지는 노리스 만은 두려워하셨습니다. 아버지가 노리스를 만나고 돌아오시면 벌벌 떨면서 위스키를 단숨에 들이키셨죠. 당시 노리스 같은 사람이 많았지요. 사회 지위를 이용해 어떤 비열한 짓이든 다 할 수 있는 사람들 말입니다. 아버지는 그가 항의하는 사람에게 명령하는 듯 말하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소용 없는 일이었고, 결국 모두 무시 당했죠. 그 사람들 중 일부가 아스날이 하이버리에서 첫 경기를 하던 날 항의 시위를 했습니다. '울위치로 돌아가라'고 쓴 커다란 현수막을 걸기도 했지요. 하지만 노리스가 경찰을 동원해서 어쩔수 없이 그만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경찰서장과 노리스는 매우 친한 친구였는데다가 둘 다 프리메이슨이었습니다. 결국 아스날은 새 자리를 지켜낸 셈이죠."

  노리스의 마지막 장애물은, 그리고 절대 쉽게 굴복시킬수 없는 상대는 바로 가톨릭 교회였다. 교구의 높은 분들은 대개 축구가 '반종교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역 주민들은 영국국교회가 축구 클럽에게 땅을 파는 일은 있을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노리스의 손은 교회 상부까지 닿아 있었다. 20,000파운드 수표를 눈 앞에서 설렁설렁 흔들어대니, 교회 위원은 떡밥을 물었고, 노리스의 오랜 친구인 캔터배리의 대주교가 계약서에 서명했다. 노리스는 성일(聖日)에는 경기를 하지 않기로, 또한 절대 '해로운 액체'를 경기장에서 팔지 않겠다고 서약했다. 그러나 일년도 채 안되서, 그는 대부분의 독재자들이 그러하듯이 약속을 깡그리 무시했다. 20세기 초에 노동자들은 기존의 종교 대신 축구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그러니 악마같이 비열한 회장이 운영하는 잉글랜드 내 가장 성스럽지 못한 축구 클럽이 예비 사제들이 볼링과 테니스를 즐기며 심신을 단련하던 곳에 하이버리 경기장을 짓는다는 사실은 참으로 적절하기도 하다.

  노리스가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으려 했어도, 대부분의 하이버리 사람들이 울위치 아스날의 이전을 반대했다는 인상은 쉽게 받을수 있다. 팻 스탠던(Pat Standen)의 가족은 클럽이 이사갈 준비를 할 때 세인트 토마스 로드(St Thomas's Road)에 살고 있었는데, 그는 사태를 조금 다르게 기억하고 있었다. 1990년대 초에 그와 인터뷰를 했었다. "우리 대부분은 우리 지역에 새로운 축구 팀이 생긴다는 사실이 너무 좋았지. 당시에는 난 꼬맹이었지만 주위에서 온통 울위치 아스날의 위상과, 그들의 미래에 대해 논했거든. 이전을 반기는 사람과 꺼리는 사람들간에 크게 충돌이 있곤 했어. '교회의 미친 광신도들'이라고 아버지는 아스날이 오지 않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그렇게 부르곤 하셨지. 수많은 사람들이 과음과 신성모독에 대해 걱정한 것은 맞아. 그런 시절이었으니까.

  당시 하이버리는 벽촌이나 다름없었어. 요즘이야 아스날 덕에 하이버리, 하이버리 하면 어딘지 조금은 알아주잖아. 그러나 당시에는 그 동네에서는 아무 것도 없었어. 영화관도 생기기 전이었고, 부모님은 웨스트 엔드로 이사갈만한 돈이 없었으니까. 동네 술집에서 한잔 하는 것도 아버지에게는 큰 출혈이었지. 목수라서 당신께서는 술집을 들락날락 할만큼 돈을 받지 못하셨어.

  하지만 으레 그렇듯이 일하는 남자들은 집에 갖다 주는 돈 이외에 더 쓸 돈을 몰래 챙겨두고 있었고, 하이버리의 관중들은 늘 떼로 모였어. 처음부터,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토요일날마다 '새로 온 애들 경기 보겠다고' 나가봐야 한다고 하셨지. 어머니는 굳이 왈가왈부하지 않으셨어. 집 앞에 축구팀이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 자부심과 뿌듯함을 안겨 줬어. 많은 친구들이 첫 경기를 기념해서 현수막을 만들었어. 낡은 시트를 잘라 빨간 페인트로 "환영합니다. 우리 팀 대박나기를!"라고 글씨를 썼던게 기억이 나. 지금 들으면 유치하게 들릴지 몰라도, 근처 술집에서는 온종일 새 축구 팀 이야기 뿐이었어. 아버지는 늘 헨리 노리스가 영리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어. 그때는 지금보다 선수들과 팬들이 함께 어울리던 시절이었지. 울위치 선수들 중 몇몇, 예를 둘만 들자면 조지 자비(George Jobey)와 작 러더포드(Jock Rutherford)같은 선수들은 근처 술집 단골이었고, 지역 행사나 비스무리한 것이 있으면 모두 참가했거든. 지금 생각해보면 클럽이 사람들의 반응을 슬쩍 떠보는게 아니었나 생각이 들기도 해. 당시 벽보나 지역 신문을 훑어보면 어느날 어느 선수가 우리 가게 옵니다, 하는 광고를 많이 찾아 볼 수 있었어. 아버지 같이 단 한번도 축구 선수들과 만나지 못한 인간들은 좀 많이 궁금해 하더군. 그래서 하이버리에서 첫 경기 할 때 쯤에는, 우리 동네 사람들은 반대자들이 부른 명칭대로 하자면 그 "침입자들"을 완전히 우리 이웃으로 생각하고 있었어. 노리스 생각대로 다 된거야."

  1913년부로 노리스의 아스날(이때부터 완전히 '울위치'라는 머리표를 땐다.)은 새 구장으로 이사를 완료했다. 하이버리에서나, 옛 집에서나 계속 성토하는 소리가 쏟아졌다. 다시는 1시간 거리의 하이버리를 밟지 않겠다는 켄트의 어느 팬은 쓰디쓴 켄티쉬 인디펜던트에 결별의 편지를 날렸다. "헨리 노리스는 클럽의 영혼을 팔아 넘겼다. 그는 맘몬 교도다. 너 같은 졸부도 최후가 있을테니, 명심하고 있어라." 노리스는 무시했다.



머릿말

태동기
침입자들-이웃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1)-자리 잡기-첫번째 경기-토튼햄 놈들-아스날의 첫번째 슈퍼스타

1930년대
채프먼이 하이버리를 위해 무엇을 했는가-고백:건설 인부들-타지 마할-"위이 알렉"-가장 가슴쓰린 경기-하이버리의 전투-"이 친구들 만날 때가 됐군"-야유 받은 친구들:브라인 존스-고백:테라스 청소부-은막 위에서

1940년대
뻥 터져버렸네-내 축구는 어디 있지?-"계집들이 여기에 있어"-컬트 히어로:조 머서

1950년대
환한 불빛 아래서-구사일생-앙증맞은 것들이 돌아왔다네

1960년대
텅 빈 공간-가장 위대한 인간-두 스탠드 이야기-규칙 따위 필요 없어-고백:정비사, 악사-런던의 악동들

1970년대
부활-어중간하게 하지마라-머리부터-잊혀진 영웅-찰리 조지 만세-컬트 히어로:테리 만시니-때리고 부수고-편견 없이?(1)-교감하기-컬트 히어로:윌리 영-불세출의 천재

1980년대
검투사들-라디오 매치-야유 받은 친구들:하이버리의 무능력자들-이게 아직도 축구로 보이니-컬트 히어로:블라디미르 페트로비치-찰리 왕자님의 길-아스날 액션 그룹-고백:마스코트, '부자 되세요' 걸-"문을 열고 나가 아스날의 일원이 되어라"-컬트 히어로:페리 그루브스-막대기와 돌맹이-고백:팬진 편집자-기업정체성-변하지 않는 것이 뭐가 있으리

1990년대
정권교체-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우리 생애 최악의 순간-사요나라 노스 뱅크-이웃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2)-개좆?-컬트 히어로:앤더스 림파-환상특급-심장마비-베르캄프 원더랜드-초전박살-저스트 던 잇-맨체스터 촌놈 길들이기-아름다운 날-이웃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3)-이상 기류-록키를 추억하며

새천년
바바붐(1)-사인해서, 봉인하고, 배달 완료-이웃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4)-고백:변호사, 암표상, 경기장 관리인, 안내인-타이틀 냄새가 난다-바바붐(2)-권력 이동-무적의 팀?-컬트 히어로:레이 팔러-외인부대-고요를 깨우다-편견 없이?(2)-감회어린 곳-유럽 제패의 길-초침은 흘러가고-그리고 마지막

감사의 말




  1. 당시 런던은 대런던(Greater London)이라고 불리는 광역의 일부였다. 울위치는 대런던에 속해 있었지만 런던의 일부는 아니었고, 따라서 노리스는 북런던으로의 이전이 런던 내의 이동이라고 주장할수 있었던 것이다. 대런던은 1986년 폐지되었다. [본문으로]
  2. 아서 코난 도일의 장편 추리 소설 '바스커빌 가의 개'(Hound of the Baskervilles)에 나오는 개를 지칭.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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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06년 Orion Books에서 출간된 Jon Spurling의 저서의 번역본입니다.

태동기-침입자들

리 노리스 경 없이 하이버리 경기장은 그 자리에 결코 뿌리를 내리지 못했을 것이고, 아스날은 오늘날 같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클럽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포병대(Gunners)의 팬이 된다는 것 자체가 그에게 빚을 지는 것과 같은 일이지만, 그는 사실 초기 잉글랜드 프로 축구에서 가장 논란을 빚은 인물이기도 하다. 그가 사망한지 어연 70년이 지났음에도 아직도 그의 행적은 논쟁거리이다. 그의 이름을 인터넷 검색창에 치고 엔터키를 누르면 제법 쓸만한 정보를 찾을 수 있다. 최소한 20개의 (아스날을 집시나 '울위치의 불법침입자들'로 비유하는) 토튼햄 핫스퍼즈 관련 사이트가 그들이 아스날을 싫어하게 된 가장 큰 원인으로 그를 꼽는다. 심지어 어떤 네티즌은 스퍼즈의 팬들이 세븐 시스터즈 로드 반대편의 라이벌 팀에게 느끼는 열등감이 전적으로 노리스의 책임이라고 한다.

  더 이상한 것은, 16세기에 동명의 외교관이 있었는데, 그도 상류계층의 사기꾼이었다. 헨리 8세를 직접 알현할수 있는 권한이 있는 사람이었는데, 후에 왕의 어린 왕비인 앤 불린을 유혹했다는 죄로 처형당했다. 성적인 매력이 넘쳐 바람둥이로 명성을 떨쳤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촌수가 상당히 먼) 후손도 악독한 인물로 유명했다는 것이 적절해 보이기도 한다. 결국 두 사람 다 이카루스같이 파멸한다. 너무 높이 날아 오른 죄였다.

  두번째 헨리 노리스 경은 울위치 아스날을 1910년에 사들여서 중세의 영지처럼 다스렸다. 이사들과 회장들이 순전히 지역사회에서 행세하기 위해 이사진 자리를 차지하던 시대를 노리스가 깨버렸다. 그는 여러 '의문이 남는' 분식 회계를 구사했고 깡패들을 동원하기도 하여 축구계에서 적을 쌓아갔다. 축구계의 첫번째 '짜르'는 거의 신화속 존재였다.

  1865, 풀햄 출신의 헨리 경은(아니면 간단하게 헨리 할아버지, 1910년에는 작위가 없었다.) 부동산 사업으로 부를 쌓은 자수성가한 사람이었다. 그의 회사 앨런&노리스(Allen & Norris)는 반쯤 시골이었던 풀햄을 현대 도시를 탈바꿈시킨 주역이었다. 집을 짓고, 보수하고 파는 와중에 건축과 은행업쪽에 방대한 인맥을 쌓고 그들의 호감을 얻었다. 이것이 후일, 특히 새 구장을 지을 때 큰 도움이 되었다. 그는 떼로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고, 대인 능력은 따라올 자가 없었다. <후즈 후> 1910년 판을 보면 그는 와인 동호회, 다이닝 클럽, 빈티지 자동차 전시회에 관심이 있다고 한다. 주니어 칼튼 클럽의 회원이자 풀햄의 시장이고, 지역 보수당의 선도자이자 열렬한 프리메이슨인 그의 이름은 런던 시내 널리 알려져 있었다. 신을 경배하는 토리 당원으로서 지역 사회에 박애 정신을 널리 떨치는 것이 그의 사명이라고 믿기도 했다. 수년동안 그는 배터시(Battersea) 제의실과 지역 고아원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럼에도 정계의 적들은 그가 사회적 위치를 순전히 캔터베리의 주교들과 친해지기 위해 쓰는 사기꾼이라고 생각했다. 노리스는 늘 억측이라며 반박했지만, 1913년 캔터베리의 주교는 그를 위해 결정적 도움을 주었다. 물론 호의에 보답하는 것은 집단을 결속시킨다.

  사진과 기록에 따르면 노리스는 마치 아내를 잔혹하게 죽인 크리픈 박사처럼 섬짓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였다고 한다. 6 피트가 족히 넘는 키에 고집스레 파이프를 물고 있는 사진을 보면, 그는 문자 그대로나 비유적으로나 경쟁자들을 왜소하게 보이게 하였다. 바짝 깃이 선 흰 셔츠와 중산모자, 트렌치 코트를 입고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경쟁자들을 코안경으로 음험하게 노려보았다. 안경의 렌즈는 도수가 높아 그의 눈매는 완전히 굴절되어있었다. 이사진 모임에서 특히 위력이 있었다. 아무나 살짝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모든 이사진을 눈에 띌 정도로 불편하게 만들수 있었다. 어딘가 살짝 런던 사투리가 섞인 상류층 사람같은 그의 억양은 그가 태어난 노동자 계급의 것이 아니었다. 그의 부모는 그를 작은 공립 학교에 보냈다. 하지만 그는 "학교는 내가 있을만한 곳이 아니다."라며 겨우 14살의 나이에, 변호사의 제자로 들어가 빠르게 성장해나갔다. 일년 후, 그는 치열한 건축계에 매력을 느끼고 회사를 떠난다. 그는 다소 다혈질이었고, 권위적인 인간과 시간을 낭비하는 사람들을 제일 싫어한다고 했다. 노리스는 언제나 서둘렀고, 늘 자신의 주도로 일을 처리하고 싶어했다. 그의 고민 중 하나는 늘 잉글랜드 북부가 축구계를 지배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런던 팀이 최고가 되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노리스는 상대를 구슬리는데 있어 천재적인 사람이었고 순수한 열정과 신념으로 그들을 끌어들였다. 성공한 부동산 중개업자였던 그는 언제 사람을 구슬려야 하는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가 건물 거래에까지 사업을 확장하자, 그의 기술도 더욱 널리 퍼졌다. 런던의 난지대 윔블던에(님비 현상이 심하기로 유명했다.) 건물을 세워야 할때가 있었는데 그는 근방에 살던 친구들을 구슬려 눈 깜짝할 새 대형 주거지역을 지었다. 건물 거래 분야의 경쟁자 중 하나가 노리스가 회사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암거래를 한다는 주장을 했다. 그러자 노리스는 그의 변호사들을 떼로 동원한다고 협박해서 고소를 취하시켰다. 울위치 아스날에 발을 담그기도 전에 노리스는 온갖 암수에 능했던 셈이다. 축구의 세계 이외에 어느 곳에서 악의 제왕이 이만큼 더 잘 어울리겠는가?

  지난 세기 초입쯤 헨리 노리스는 이미 풀햄의 단장이었고, 마침 스포츠 분야까지 사업을 확장시키고 싶어했다. 그는 축구 클럽을 하나 사고 싶어했고, 잉글랜드 남부의 잘 나가는 팀들을 알아보고 있었다. 첼시, 스퍼즈, 레이튼 오리엔트, 그리고 울위치 아스날. 앞의 세 구단은 당시 재정적으로 깨나 안정적인 편이었다. 반대로 울위치의 팀은 정말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1부 리그의 팀이었는데도 홈 구장 메이너 그라운드(Manor Ground)의 관중은 평균 만명정도였고 이는 첼시나 스퍼즈에 비해 반의 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 숫자였다. 웃기는 사건이 따라다니는 팀이기도 했다. 울위치 아스날은 1905년 FA컵 준결승전에서 쉐필드 유나이티드에게 1-3으로 패했다. 이 경는 참 우습게도 언덕같이 가운데가 불뚝 솟아있는 경기장에서 펼쳐져서 골키퍼들은 서로 쳐다볼수도 없었고, 부심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독재자들이 그렇듯이, 노리스는 상황이 바닥일 때 권력을 잡았다. 울위치 아스날의 실은 그의 득이였고, 20세기 독재자 같은 방식으로 팀에게 새 생명을 불어넣고 그의 신념을 막는 모든 것을 부셔버렸다.

  이사진은 풀햄을 남부 리그에서 2부 리그로 믿을 수 없는 승격을 시킨 그의 권모술수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에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겨우 4년만에 이루어진 이 승격은 타 구단 이사진의 의심을 샀다. 그들은 헨리 노리스가 상당량의 검은 돈을 거낸 것 아니냐고 비난했지만 결국 확실한 증거는 찾지 못했다. 노리스는 부정의 흔적을 지우는데 있어서도 따라올 자가 없었던 셈이다. 그는 울위치 아스날의 대주주가 되자마자 런던 최대의 클럽을 만들기 위해 풀햄과의 합병을 추진했다. 축구 협회에서 그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제지해서 겨우 막았지만, 그래도 그는 여전히 풀햄의 단장이자 아스날 회장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 사실을 통해 그때는 아직 독과점 방지 위원회가 없었다는 사실 또한 깨달을 수 있다.

  두 클럽을 합치려는 계획이 물거품이 되자 그는 만신창이가 된 울위치 아스날을 쇄신할 계획을 세웠다. 1912년 정기적으로 물이 차는 메이너 그라운드에서 일련의 재해가  벌어지자, 그는 연고를 옮기기로 결심하다. 스퍼즈를 아스날이 3-1로 이긴 경기는 <스포츠맨>에서 '머드 축제'라고 표현하기까지 했다. 지역 신문 기사에서 그라운드를 묘사한 부분이 있었다. "…완벽한 수렁이어서, 터치 라인을 따라 수영장이 있는 것 같았다." 그 날 날씨는 지독하여, 어떤 관중들은 푼돈밖에 안되는 입장료를 내기를 거부하고 수도관에 올라가서 경기를 관전했다. 어쨌거나 그들은 돈을 내고 젖지는 않은 셈이다. 신문에서는 경기장 안의 팬들과 밖의 팬들끼리 난투극을 벌일뻔 했다고 적어두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지만, 상대팀 캐러밴이 교통 체증과 낮은 접근성으로 경기장에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한 적은 자주 있었다. 그런 사태들이 노리스의 화를 돋구었고, 그는 놀림당하는 것을 전혀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클럽은 1913년 1부 리그 역사상 최악의 기록으로 강등당한다. 38경기 3승 12무 23패. 노리스에게 남은 선택권은 하나뿐이었다.

  1913년 초, <켄티쉬 인디펜던트> 독자들은 헤드라인을 읽자마자 꿀먹은 벙어리가 되버렸다. 아스날, 런던 내 다른 지역으로 이전 결정. 공식 석상에서 노리스는 오십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이전하는 장점을 말했다. 새 보금자리를 찾은 아스날은 핀스버리, 해크니, 이슬링턴, 그리고 홀본의 수많은 거주자들을 끌어모을수 있게 된 것이다. 교회 쪽의 인맥을 통해 그는 하이버리에 있는 세인트 존스 신학 대학에 6 에이커 정도의 땅을 얻어냈다. 런던의 웨스트 엔드에서 지하철을 타면 겨우 10분인 곳에 짓는 구장이니 더 좋은 장소가 있을리가 있나? 노리스는 온갖 권력과 정치적 기술을 동원해서 그의 앞을 가로막는 규제와, 지역 단체와, 님비 현상까지 모조리 쓸어버린다.

  그는 울위치의 열혈 팬들의 발악은 전혀 계산에 넣지 않았다. 노리스는 울위치라는 지역의 단점만 언급했을 뿐이다. 울위치의 관중수는 충분하지 않다고. 많은 사람들이 노리스가 더러운 속임수를 쓴다고 확신했다. 강등당하던 그 해, 그가 일부로 구장 이동에 관한 뉴스를 흘리고 팀에 투자를 적게 해서 고의적으로 관중수를 줄인 후, 구장 이동의 변명거리를 늘렸다는 소리다. 지역 신문에서 그를 클럽의 영혼을 팔아넘긴 비정한 자본가라고 하는 투고가 쏟아졌다. <켄티쉬 가제트>에 보낸 폴 도날드선 씨의 투고는 오늘날 AFC 윔블던 팬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될것이다. "노리스 씨는 우리 지역 클럽을 보전하는 것보다 경제적 이익이 더 중요하다고 결정했다. 당신은 큰 실수를 저질렀다. 축구 클럽을 가지고 장사를 해서는 안된다. 울위치 아스날은 울위치 근방에 있어야 한다. 노리스씨는 리버풀이나 맨체스터를 이사 가는 것도 지지하는가? 그런 사람은 축구계에 있어서는 안된다."

  <켄티쉬 인디펜던트>에 투고된 월터 베일리씨의 편지는 더 날카롭다. "팀 운영이 어느정도 원활하게 될만큼의 지지는 충분히 있었다…현재 세계 대부분의 클럽이 그정도 서포터면 충분할 것이다. 울위치는 완전히 무시당한 셈이다…토튼햄이나 첼시가 가지고 있는 만큼 관중수를 채우지 못한다는 이유로 말이다. 예정 대로 런던 반대편으로 이전한다면 클럽을 만드는데 공헌한 자들이자 동시에 도덕적으로 타고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자들이 클럽에 영향을 끼치는 것을 막을 것이다. 내 말이 틀린가?"

  지역 언론은 만평을 실었는데, 그 중 울위치 가제트에 실린 하나는 노리스가 켄트의 유일한 자식을 납치해간다고 주장했다. 노리스는 반론을 하며 사태에 불을 지피는데, 그는 켄트가 아니라 울위치는 어쨌거나 런던의 일부일 뿐이고 클럽이 이제 런던에서 호강을 누려야 하지 않겠냐고 했다. 일설로는 그가 살해 협박까지 받았다고 했지만, 어쨌거나 그는 밀어붙였다. 울위치 사람들이 반박이 얼마나 거셌는지는 모르겠지만, 북런던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에 비하면 애들 장난 수준이었다.




머릿말

태동기
침입자들-옆집 골리기(1)-자리 잡기-첫번째 경기-토튼햄 놈들-아스날의 첫번째 슈퍼스타

1930년대
채프먼이 하이버리를 위해 무엇을 했는가-고백:건설 인부들-타지 마할-"위이 알렉"-가장 가슴쓰린 경기-하이버리의 전투-"이 친구들 만날 때가 됐군"-야유 받은 친구들:브라인 존스-고백:테라스 청소부-은막 위에서

1940년대
뻥 터져버렸네-내 축구는 어디 있지?-"계집들이 여기에 있어"-컬트 히어로:조 머서

1950년대
환한 불빛 아래서-구사일생-앙증맞은 것들이 돌아왔다네

1960년대
텅 빈 공간-가장 위대한 인간-두 스탠드 이야기-규칙 따위 필요 없어-고백:정비사, 악사-런던의 악동들

1970년대
부활-어중간하게 하지마라-머리부터-잊혀진 영웅-찰리 조지 만세-컬트 히어로:테리 만시니-때리고 부수고-편견 없이?(1)-교감하기-컬트 히어로:윌리 영-불세출의 천재

1980년대
검투사들-라디오 매치-야유 받은 친구들:H 범스-이건 단순한 경기가 아니라구-컬트 히어로:블라디미르 페트로비치-찰리 왕자님의 길-아스날 액션 그룹-고백:마스코트, '부자 되세요' 걸-"문을 열고 나가 아스날의 일원이 되어라"-컬트 히어로:페리 그루브스-막대기와 돌맹이-고백:팬진 편집자-기업정체성-변하지 않는 것이 뭐가 있으리

1990년대
통치의 종말-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우리 생애 최악의 순간-노스뱅크여 안녕-옆집 골리기(2)-개불알?-컬트 히어로:앤더스 림파-환상 특급-심장 마비-베르캄프 원더랜드-초전박살-저스트 던 잇-맨체스터 촌놈 길들이기-아름다운 날-옆집 골리기(3)-이상 기류-록키를 추억하며

새천년
바바붐(1)-사인해서, 봉인하고, 배달 완료-옆집 골리기(4)-고백:변호사, 암표 장수, 관리인, 수위-타이틀 냄새가 난다-바바붐(2)-권력 이동-무적의 팀?-컬트 히어로:레이 팔러-외인부대-고요를 깨우다-편견 없이?(2)-감회어린 곳-유럽 재패의 길-초침은 흘러가고-그리고 마지막

감사의 말



Posted by 시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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